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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군제 개혁(3) : 갑신정번 이후부터 갑오개혁 이전까지
게시물ID : history_74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댓글매니아
추천 : 6
조회수 : 65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30 14:43:11

1. 정책의 배경



 1884년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결국 청군의 개입과 함께 단 3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맙니다. 이러한 청군의 개입은 임오군란 이후 2번째였으며 이는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더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갑신정변에 협조했던 일본은 그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질타를 받게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본은 재미있게도 오히려 자국 군대의 피해를 주장하며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와의 대립을 자초합니다. 조선 내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사태가 국제적 대립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원했던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양 국의 군대가 조선 내에서 철수하며 만약 양국의 군대가 혹시 조선으로 파병될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통보한다는 내용의 텐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표면 상 일본이 한 발짝 물러난 것으로 보일 뿐 실상은 조선 내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개입 여부 마련, 그리고 우월한 청나라의 영향력 견제라는 차원에서 일본이 이득을 챙겼던 조약이었습니다.

 텐진조약은 일본에게 뿐만 아니라 조선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기회가 되었는데 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미묘한 균형이 형성되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이 줄어들어 독자적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그 기회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국왕에게 자위 군대를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ㆍ일 양국 교관 대신 조선 국왕의 권한 하에 제 3국의 무관을 고용함으로써 해결한다.'(제 2조)


 이에 따라 이 시기의 군제 개혁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에 의해 이루어졌던 친군 5군영 개편 시기에 비해 비교적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2. 정책의 전개

 

임오군란에 이어 갑신정변으로 또 다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친위부대를 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폐지했던 용호영을 다시 부활시키고 이어 부활한 용호영의 규모를 더 늘린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어 임오군란 이후 구축된 친군 5군영 체제를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의 3군영으로 개편하는데 이는 당초 임무가 궁궐 수비라는 한정적인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비해 청군에 의해서 지나치게 높은 대우 및 비효율적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개편이었습니다.


 궁궐 수비 뿐 만이 아니라 도성 수비와 관련해서도 경리청 설치를 통한 강화의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이는 지금껏 개혁과 개편이 주로 궁궐 수비대로만 이루어져 왔다는 점과 이로 인해 오히려 도성 수비가 약화되었다는 점을 인식한 탓이었습니다.

 또한 텐진조약 제 2조에 의거해 청나라나 일본인 교관이 아닌 제 3국에서의 교관 초빙을 추진하는데 그 대상국으로 러시아와 미국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는 당시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던 청나라와 일본 양측의 거센 견제, 그리고 영국의 거문도 사건과 관련해 결국 최종 협상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미국의 경우에는 러시아와 달리 협상에 있어 순조로운 편이었는데 이는 초기 미국의 불간섭 원칙으로 미국이 교관 파견에 대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고종의 적극적인 요청과 텐진조약으로 파견 여건도 형성되면서 결국 현역 장교는 아니지만 퇴역 장교를 파견하는 것으로 협상을 이루어낸다.

 조선으로 파견 온 이들 미국 교관들은 초기에는 1882년 2월에 고종이 사관 양성을 위해 설립한 연무공원에서 선발 인원들을 대상으로 서양식 무기, 교복을 갖추어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이후 그 훈련 대상은 점차 확대되어 결국 친군 3군영의 병사들을 대상으로도 훈련을 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시기에 들어 고종은 근대적 해군과 관련해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관심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연무공원을 통해 육군 사관생들을 육성하려고 노력했던 것과 같이 해군에서도 사관생들을 육성하기 위한 양성 기관의 설립과 교관의 초빙을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893년에는 강화도를 기점으로 해군 사관생 양성기관인 해군통제영학당이 새워지며 이번에는 미국이 아닌 영국을 대상으로 교관을 초빙하여 사관생 양성에 노력합니다.


  

                                                  <해군통제영학당의 모습>                             <통제영 생도 훈련 광경>


 또한 약해진 해방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기연해방영을 새로 창설하는데 이는 이양선의 출몰과 침탈이 가장 빈번했던 황해 연안을 방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수륙방어 시스템을 기연해방영의 설치와 함께 육군이 담당하였던 것을 수군이 중심이 되어 수륙방어를 하는 시스템으로 변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 기존의 경기, 충청, 황해 연안지방의 수군을 관할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육군이 관할하던 지역 또한 이속 받으면서 해서, 호서지방까지도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해방영은 1885년에는 용산으로, 1886년에는 다시 남별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수륙 방어의 최전선에 있어야 함에도 점차 서울로 이동함에 따라 점차 그 기능은 퇴색되어 갑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시위 업무를 부가적으로 담당하게 되는 등 점차 중앙군으로써 변질되어가게 됩니다.

 고종은 근대적 군함의 도입도 이 시기에 시도하였는데 다만 군함 도입과 관련해서는 일본과 영국 등 여러 국가들에 군함 도입 의사를 알리고 물색하였음에도 조선의 구입 능력에 따른 의구심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다만 일본만이 의사를 타진해 왔는데 이는 사실 상 판매를 통한 자금의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의 해군 근대화와 관련해 일본이 조금이라도 관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극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군함인 양무호가 들어오게 됩니다만 정작 조선에 인계된 것은 1903년이어서 제대로 활용되지는 못하였으며 구매 과정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어 비운의 군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 양무호의 모습 >


3. 정책의 한계


 정책의 한계와 관련해 일단 이전 앞에서 보였던 한계점들(예산, 인식, 외세, 통합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죠. 특히나 훈련 방식에 있어 기존의 조선식, 청군식, 일본식이 혼재된 상황에서 많은 혼란이 있었는데 여기에 미국식, 영국식의 추가는 이러한 혼란에 오히려 기름이 더해지는 격 이었습니다.

 정책의 진행에 있어서도 고종과 조선 정부는 많은 문제점을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최초의 근대적 군함이라고 도입하였던 양무호입니다. 당시 양무호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정식 군함이 아닌 일본에서 화물선으로 쓰고 있던 ‘중고’였습니다. 게다가 석탄도 너무 많이 잡아먹고 말 그대로 연비도 안 좋았고 일본이 본래 영국에서 사들였을 때의 가격보다 오히려 비싼 가격으로 조선에 팔아 넘겼는데 이는 바가지를 써도 너무 큰 바가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구입 당시의 여론도 구입 목적이 해양 방비 강화보다는 단순히 고종이 재위 40주년을 기념해 행사용으로 구입했다, 실제로는 군함이 아니라 화물선이다, 충고 화물선 치고는 너무 비싼 가격에 구입했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군함 구입과 관련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한계점은 이러한 개혁이 텐진조약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틀이 깨지고 상황이 급변하면 바로 이러한 정책의 방향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실제로 청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균형의 틀이 깨지면서 무력으로 경복국을 점령하고 들어온 일본에 의해 무산되고 이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다시 군제 개편이 이루어지는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 어느덧 중반입니다. 사실 이 시기는 대한제국 시기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 있게 보는 부분입니다. 육해군의 사관 양성을 통해 자립성을 키우고 이어 근대 해군에 대한 구상을 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보이는 부분이거든요.

 다음 화에서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갈 때 무력으로 궁궐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강요하였던 갑오개혁부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시기까지의 군제 개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연재 이후에는 따로 설명이 부족한 부분들을 골라(예들들면 해군통제영학당이라던지 연무공원이라던지) 좀 더 상세한 내용으로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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