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박정희의 유신 정권 시절 동아일보의 몇몇 뜻 있는 기자들 (예:송건호,정연주)은 기자이면서도 진실을 말 하지 못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며 박정희에게 저항한다.그리고 그 유명한 "자유 언론 실천 선언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박정희가 이들을 내버려 둘 리 있겠는가? 자신의 수족인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동아일보의 광고를 끊어 버린다. 그러나 독자들이 광고를 달아주고 (맨 처음으로 광고를 단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임) 동아일보는 힘을 얻어 저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 1975년 박정희는 기어이 일을 저지른다 전투경찰과 깡패들을 매수해서 농성중인 기자 180여명을 끌어낸다.
그리고 180여명은 해직을 당하고 중정에 의해 항상 미행을 당하게 된다. 마침내 1979년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원하는 그들의 정신은 밟아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양아들인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켜 광주를 장갑차로 쓸어 버리고 언론사를 통.폐합 시켜 버린다.(1980) 그 과정에서 무려 2000여명의 기자들은 해직을 당한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죽어서도 죽지 아니하였으니, 때는 1986년 "권인숙" 이라는 휴학생이 부천경찰서에서 문귀동이라는 쓰레기 형사에게 성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해직 기자들이 실어 버린다.
이에 몇몇 기자들은 외신 기자들을 모아 놓고 유명한 "보도 지침"을 폭로한다. 이에 분노한 전대갈은 선언문을 발표한 기자들은 물론이요 써 준 사람,인쇄를 도운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서 고문을 시켜 버린다.
그리고 국민의 불만이 쌓여서 폭발 직전이던 1987년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소에서 물고문을 당해 사망하고 만다. 처음에는 쇼크사로 구라를 쳐 보지만 그걸 믿을 리 없는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에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내용:나는 간선제를 유지한다) 마침내 분노가 터진 시민들은 시위를 하고 6월 9일 "이한열" 이라는 연대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이 의식 불명이 된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우리 국민들, 6월 10일 노태우를 후보로 선출하는 과정과 동시에 시위를 벌이게 된다. 처음에는 시위대가 만만해 보였지만 점점 시위가 커지자 전두환은 계엄령을 내려 쓸어버리려고 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된다.
마침내 6월 29일 전두환은 노태우를 시켜 6.29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다. 전두환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이한열은 7월 5일 연대 병원에서 21세의 나이로 산화한다.
이에 힘을 얻은 해직 기자들은 국민들과 함께 주식을 만들어 그것을 함께 나눈다. 또한 전 세계 전국 각지에서 후원금이 100일만에 모이고 마침내 1988년 5월 (초대사장 송건호) 세계 최초의 국민주주제 방식의 신문 한겨레가 탄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