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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성폭행 사건의 문화 인류학적 고찰
게시물ID : sisa_7393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둥글이8
추천 : 3/7
조회수 : 130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6/07 15:53:46


숫컷들에게는 불끈불끈 솟아나는 본능이 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중력의 힘에

도 불구하고 솟아나는 그 힘은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힘인 동시에 생명 창조의 원천이기

도 하다. 만약 그런 ‘난데없이 솟아나는 힘’이 없었다면 현재의 인간 문명은 커녕 인류

는 태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앙증맞은 햄스터로부터 인간과 가장 비슷한 영장류인 오랑우탄·고릴라라에 이르기까지

수컷들이 ‘난데없이 솟아나는 힘’으로 암컷을 폭력적으로 정복하는 특성을 보이는데, 이

는 한편으로는 자연계의 유행인 듯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기를 거부하기에 문명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재

산과 지위와 장애의 유무와 피부색과 나이와 성별에 차별을 받지 않고 평등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여 여성에 대한 성적인 착취는 분명한 범죄로 규정된다. ‘원하지 않은

것을 강제할 권리’를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안타깝게도 원론일 뿐, 현실이 아니다. 즉, 앞으로도 여성의 성을 흉악한

방법으로 강제로 취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빚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전세계 보편의 문제로 우리가 아직 충분히 문명화가 되지 않았기에 그 본능을

절제할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 생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만들

어져서 진화를 시작한지가 수십억년 전이다. 그런데 인간의 문명이 시작된 것은 불과

수 천 년이다. 더군다나 몇 백년 전까지는 여성을 강제로 취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수십억년 진화의 역사 속에 우리의 핏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 본능이 얼마 되지

않는 문명에 의해 절제될 것이라고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그렇다보니 그 문명의 약한

고리를 뚫고 끊임없이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너무 놀라워하지는 말기로 하자. 우리 인류가 진화 과정을 통해 생

존본능을 충족시키기 만들어낸 ‘욕심’이라는 기재는 우리 후손들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

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계를 온통 파괴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

직 잘 먹고 잘살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 자신이다. ‘성적 충동’ 역시

‘잘 먹고 잘살려는 욕심’처럼 앞뒤 안 가리는 특성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지구가 이

렇게 파괴가 되고 있음을 뻔히 보고도 자신의 소유와 소비를 줄일 의지를 못 느끼는 우

리의 본능처럼 안타깝게도 성폭력 문제도 인류가 멸종의 순간까지 가지고 가야하는 숙

제인 것이다.


(여성의 성을 흉악한 방법으로 강제로 취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빚어질 수 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첫째와는 정 반대로 ‘너무 문명화된 결과’?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권 문

화에서 보이는 특성으로 가부장적 사회 체제가 여성을 인격적 주체가 아닌 물건 다루듯

하던 습속이 있다. 아직 그 잔제가 남아 있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주체와 결정권을 무

시하는 행태에서 그러한 성적 결정권에 대한 침해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여성의 성을 흉악한 방법으로 강제로 취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빚어질 수 밖에 없는)

세 번째 이유는 먹고 사는 데에 정신 팔려 자아실현을 할 수 없었던 미숙한 인간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내는 대중소비사회 구조를 둘 수 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채워질

수 없는 열망에 늘 마음이 공허하다보니 그 상실의 열망이 엉뚱하게 성적 본능의 갈구

로 전이되는 것이다. 특히나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자기상’을 가진 섬마을 촌부들이 도

심에서 온 젊은 여선생을 보고 느꼈을 갈망은 병적으로 폭증했으리라. 권력에의 갈구가

성적욕망으로 전이되는 흔한 사례이다. 특히나 고립된 공간에서 술에 취해 무기력한 대

상을 접한 그들의 본능은 문명화된 정신을 해제시키기에 충분했다.


속구 치는 숫컷의 특성, 문명화를 희석하는 본능, 욕망에 압도되는 의지, 성장하지 못한

자아, 인간의 상실을 부추기는 사회구조의 부품으로의 비루한 삶, 그리고 사건이 있기까

지의 우연한 일들의 연속... 저들 미숙한 이들이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는 힘에 압도

되어 일을 저지르고, 앞으로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지금 이 순간 교도소

에서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인간 존재의 가련함이 밀려온다.


[이 글이 또 '성폭행 두둔하는 거냐?'는 미친 답변이 붙을 수 있어 우선 해명부터 해야겠다. 

범죄-사회심리학적으로 60년대까지는 죄를 저지른 사람 자체에 대한 처벌에 집중했다.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응징이 범죄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때는

죄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범죄가 줄어들지

않자 심리학자, 교정전문가들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80년대 후로는 그 개인을 단순히

죄인으로 보지 않고 ‘정신병리 환자’로 보는 관점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죄인들에 대한

‘심리적 치료’에 치중하는 방법을 병행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로는 ‘사회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게 단순히 개인의 정신병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때 ‘죄수’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지위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죄수들

을 사회에 복귀시키기 다양한 지역사회 프로그램 등이 병행되었고 사회안전망 구축과

사회복지의 증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범죄율도 줄어들었다.


물론 이는 서양의 정신병리 연구, 교도행정의 발달과정이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떤

범죄 행위에 대해서 ‘잘 못한 것은 잘 못한 놈만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철저

한 죄형법정주의 입장이다. 서양에서는 60년대까지 써먹던 방법이다. 그렇기에 TV에 나

오는 범죄기사를 보면 하나마나한 아주 시야 짧은 분석과 해법, 응징주의만을 고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쓰는 글이니 혹여나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려 한다’는 오해는 하지 마시길. 이런 글

쓸때마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폐절하고 욕하고 사라지는 이들이 있는데... 정말 한숨밖

에 안나온다. 씨바 내가 성폭력 가해자 두둔하려고 이런 글 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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