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고종의 군제 개혁(2) : 임오군란 이후 ~ 갑신정변 이전
게시물ID : history_73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댓글매니아
추천 : 11
조회수 : 116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1/28 14:05:50

1. 정책의 배경


 운요호 사건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군제 개편이 필요함을 느낀 고종은 군제 개혁으로써 전통적인 5군영을 2군영으로 통합하고 새로운 신식 군대로써 별기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앞 편 한계 부분에서 다루었듯이 신구의 조합을 이루지 못하였고 오히려 신식 군대는 우대하고 구식 군대는 홀대하는 차별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구식 군인들의 불만을 초례하였고 결국 이는 임오군란이라는 변란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 개화 정책에 큰 혼란을 겪던 민중의 불안감까지 더해져 변란은 주요 관서가 습격당하고, 궁궐에서 대신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정도로 사태는 점점 더 커지게 되죠.


 임오군란은 결국 조선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이 조선에 파병됨으로써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만 문제는 변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파병 온 청나라 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한 했다는 것입니다.


<원세개>

 이는 조선에 대해 날로 높아져 가는 일본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기존의 조공관계에서 실질적인 지배관계로 정책 변경을 시도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청나라에게 있어 언제 다시 있을지 모르는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기회로 조선의 내정 간섭을 시도하였고 이는 군제 개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 되어갔습니다.


2. 정책의 전개


 임오군란 이후 잠시 동안이지만 다시 정계를 잡은 대원군은 변란이 원인 중 하나였던 구식 군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고종이 친정 이후 구축하였던 2군영 체제의 신 군제를 다시 과거의 전통적인 군제로 되돌려 버렸음은 물론이고 이어 신식 군대였던 별기군 또한 해체시켜 버립니다. 1881년 4월에 설치되어 1882년 6월, 즉 단 1년 2개월 밖에 존속되지 못하고 별기군은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개입하고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임오군란 가담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군란에 가담한 대다수의 구식 군인들이 도망 또는 죽게 되면서 조선의 중앙군은 와해, 거의 공백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조선의 상황은 위의 배경에서도 설명했듯이 조선과 청나라 간의 관계를 기존의 조공관계에서 실질적 지배관계로 변환하려는 청나라에 있어 철호의 기회였고 결국 파병 온 청나라군은 조선의 와해된 중앙군을 대신해 치안을 유지하겠다는 핑계로 계속 조선에 주둔,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군제 개편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영향력이 뒤따르게 됩니다. 물론 이홍장은 와해된 조선군을 다시 재건을 위해 청나라가 적극 ‘도와주겠다’라고는 합니다만 그 범위가 부대 창설, 훈련, 군제 개편, 무기 구입, 군사 문제 전반에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 상 군사 부분에 있어 청나라가 관여하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을 바로 친군영체제라고 합니다. 초기 친군영체제는 각각 5백 명으로 구성된 좌영, 우영으로 청나라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신식 군영 2개, 기존 구식 군영 4개의 영이 같이 공존하는 체제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구식 군영의 경우 기존의 훈련 방식을 고수하였지만 좌우영은 청군식 훈련을 받고 청나라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청군 수뇌부에게 운영을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죠.

 좌우영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자 추가로 친군영을 신설, 확충하는 단계로 넘어가는데 기존의 군수지원부대였던 양향청과 주향국을 친군신영으로 개편하였으며 이어서는 박영효가 일본식 훈련을 통해 양성한 5백 명을 친군전영으로, 윤웅렬이 훈련시킨 5백 명을 친군후영으로 새롭게 개편한 것입니다.

 그리고 친군별영까지 새롭게 창설되면서 조선의 중앙군은 임오군란 이후로 하여 청군식 군편제로써 친군 5군영 체제로 새롭게 개편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원군이 다시 환원한 전통 5군영 체제는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3. 정책의 한계


 사실 이때의 군제 개편은 고종의 주도로써 이루어졌다 보다는 그 과정에 있어 청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청나라 수뇌부에게 운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유사시 이들 부대가 누구의 명령을 따를지도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와해된 중앙군의 재건에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지방군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였고 결국 친군 5군영 체제가 완성되면서 조선의 중앙군은 이전보다는 강화 되었을지는 몰라도 조선 군사력의 전체적인 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향상이 없었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지적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군제 개혁에 있어 또 하나의 치명적인 한계는 친군 5군영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친군 5군영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 박영효가 일본식 훈련을 통해 양성한 5백 명, 윤웅렬이 양성한 5백 명이 각각 친군영으로 개편되었다고 이야기한바 있는데 이는 친군 5군영이라고는 하지만 그 내부가 조선식, 청군식, 일본식 훈련을 받은 서로 다른 부대들이 혼재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이질적인 3개의 체제가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친군영이라는 틀 속에서 따로 놀았다는 것이죠. 결국 이러한 내부 문제는 갑신정변 때 터지게 되는데 박영효에게 일본식 훈련을 받은 일부 병력들이 중앙군이라는 임무에 맞게 궁궐 수비를 담당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변에 가담해 버리고 마는 사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임오군란 이후 시기부터 갑신정변 이전 시기 동안의 고종의 군제 개편에 대해 알아보았으며 다음번에는 갑신정변 이후부터 갑오개혁 이전 시기 동안의 고종의 군제 개편에 대한 글을 들고 다시 오겠습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