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이란 무엇인가?
알랭 바디우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수식할 수 있는 표현이 무엇이 있을까? 다른 무수한 프랑스 철학자들에게는 나름의 어울리는 광고성 수식어들을 손쉽게 붙일 수 있다. 가령 들뢰즈에게는 '유목적' 욕망의 아나키즘을 옹호하는 철학자, 푸코에게는 지식과 권력의 공모관계를 예리하게 파헤친 생명정치의 철학자, 데리다는 철학을 철학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한 문학적 자기논평으로 변모시킨 '해체주의적' 철학자, 기타 등등. 그러나 사실 다른 (프랑스) 철학자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독서시장에서 한참 인지도가 떨어지는 '바디우'1) 에게는 딱히 어울리는 '섹시한' 수식어가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알랭 바디우를 소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답변은 그는 다른 무엇이 아닌 그야말로 진정한 '철학자'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물론 이러한 대답은 아직 우리나라 독서대중에게 낯설고 불충분하기만 하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철학'이란 마치 '느와르'라는 하나의 장르가 다른 기타 영화 장르에 대해 그렇듯 지금까지 다른 철학 외적인 영역을 얼룩 짓는 일종의 술어의 역할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느와르가 자신의 최초의 역사적 기원을 넘어서 탐정물뿐만 아니라 SF 그리고 심지어 서부극과 사극의 각 영역에서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로서 기능했듯이, 오늘날 얼마 안 되는 교양 독서층에게도 철학이란 마치 그러한 장르적 역할을 다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필자는 '미셸 푸코'가 얼마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 일이 있었다. PSAT 모의고사 지문에서도 푸코에 대한 아티클들이 단골 소재로 다뤄지는 것에서부터 『감시와 처벌』이 군용 인트라넷 인문학 페이지 상단을 차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평소에 철학이나 인문학 전반에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한 지인은 『감시와 처벌』 서평을 보여주며 그것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말해준 적이 있었다. 푸코는 그야말로 '장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신호일까? 어쩌면 사법제도나 근대적 감시체계에 대한 그의 계보학적 묘사들은 근대성의 공간 자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포르노그래픽한 쾌감을 주었던 건 아닌가?
그리고 비슷한 사정은 오늘날의 잘 알려진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푸코/들뢰즈 열풍 이후 오늘날 교양 독서층에 알려진 사상가/비평가들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사태는 더더욱 명확해진다. 오늘날 철학계에서 유명한 상당수 인물들은 사실 철학 외부의 어떤 '장'에서 철학을 사고하며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에 연루되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 비평가의 위치에서 철학에 접근해 왔으며,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의 감성적 영역에서 철학적 담론의 아포리아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슬라보예 지젝과 아즈마 히로키는 대중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철학에 대한 자신의 참조점을 끌어오곤 했다. 그 외에도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쥬디스 버틀러, 정치신학에서는 아감벤…. 물론 이들의 원조 격은 자신의 분석담화에 철학적 담론을 일종의 '우화'로서 끌어들인 '라캉' 자신이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철학 자체를 어떤 근본적인 장면으로 인정하길 거부한다는 점이다. 철학 이면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철학적 반성은 언제나 자신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역사적 장면으로 소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철학은 각자의 공식적인 입장이 무엇이든 간에 다소 간에 '해체주의적'이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반철학적 제스처'는 고진이 "철학이 수행하는 작업에 요점을 부여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이다"2)라고 발언하는 데서 정점에 달한다. 가령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은 68혁명이라는 역사적 배경 없이는 제대로 읽힐 수 없다. 그들이 고안해낸 알쏭달쏭한 개념어들(전쟁기계, 유목적 사유, 클리나멘, 기관 없는 신체, 기타 등등)은 당대의 프랑스 젊은이들을 둘러쌌던 지적-정치적 분위기를 파악해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적 사유'는 진정 '새로운 것'이 발생하는 다른 (정치적, 예술적, 기타 등등) 사건의 영역에 자신의 자율성을 전적으로 위임해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철학은 단순히 형식적인 말장난에 불과한 게 되고 말 것이다. '사건의 장소'는 다른 데에 있다. 사유는 자신의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뒤늦게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모든 것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바디우의 포지션을 일별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은 철학적 사유가 그 자체로 사건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건은 철학 외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사건적 진리로서 선언하는 것은 철학이다. 가령 바디우에게 플라톤 이전과 이후는 결코 동일한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점은 데카르트와 칸토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사유 자체가 수학과 과학의 영역에서의 새로운 변화를 ‘사건화’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뭉뚱그려' 철학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 하나의 명확한 전선으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디우라는 철학에 ‘적대’를 도입한다. 그는 모든 철학적 입장에 대해 '적과 아군'으로 명확히 나누는 작업을 수행해 왔다. 그것은 ‘철학’(철학적 사유는 그 자체로 역사적 변화 내지는 단절을 사건화시킨다)이냐 ‘반철학’(철학적 사유는 실제 삶과 세계의 신비를 뒤늦게 반성하는 것에 불과하다)이냐는 두 진영의 구분으로 요약된다. 이런 점에서 바디우는 다른 어떤 게 아니라 진정한 철학자 그 자체인 것이다.
[출처] 알랭 바디우 입문Alain Badiou Intro|작성자 박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