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이념과 실제가 자유, 인간 발달, 인간의 공통 이익의 보호와 증진이라는 가치들에 의해 정당화되는 한, 민주주의의 이념과 실제는 또한 세 종류의 평등을 전제한다. 즉 모든 사람의 본질적인 도덕적 평등, 성인은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가를 결정할 자율권을 갖는다는 추정 속에 표현되어 있는 평등, 그리고 여기에 따라 민주적 과정의 기준으로 정의되어 있는 시민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이 그것이다.
민주주의와 어떤 종류의 평등들이 밀접히 결합함으로써 강력한 도덕적 결론에 도달한다. 즉 만약 자유, 자기 발달, 공통 이익의 증진 등이 실현되는 것이 좋은 목표라면, 만약 사람들이 도덕적 가치에 있어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면, 이러한 것들을 획득할 기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주적 과정은 분배 정의의 필요조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민주적 과정은 그 것이 목표로 하는 가치들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 과정은 분배 정의를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서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적 과정은 역사적 조건들이나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인간들로부터 유리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민주적 과정의 가능성과 한계는 현존하는 그리고 장래의 사회적 구조와 의식에 크게 달려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적 관점은 그 약속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로 하여금 기존의 구조와 의식의 한계를 넘어 멀리 보게 하고 그 한계를 돌파하도록 요구한다. 최초의 민주주의 변환은 군주정, 귀족정, 과두정, 독재정, 그 어느 것이든, 앞서 있었던 전통적 소수 정부의 한계를 넘어 나아갔으며 민주적 혹은 공화적 도시 국가들에서, 다수에 의한 정부를 지지하는 새로운 구조와 신념을 창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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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제3의 변환에 직면해 있는가?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지만 또한 경고를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만큼이나 실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기존 한계를 초월하는데 실패한 역사이며, 일시적 돌파에 뒤이은 참담함 패배의 역사이며, 때로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려는 야망에서 출발하지만 환상이 부서지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 역사이다. 민주주의의 엄밀한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실제 민주주의이든 그 불완전성이 너무 분명하고 크다. 이상과 실제 사이의 이 뚜렷한 괴리는 끊임 없이, 이상이 어떻게든 실현되리라는 끝없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실현 가능해보이는 해법들은 종종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그들의 상상 속에서 이상적 민주주의를 쉽사리 건설하였던 사람들이 그 이상을 실제 세계에서 건설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거나 아니면 불가능하기조차 하다는 것을 곧 발견한다.
로버트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문학과지성사, 1999, pp.582-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