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무명논객
강신주가 말이 많은 모양인데, 강신주에 관해서 글이나 한 번 써보라는 선배의 권유가 있기에 아침에 개운한 김에 그냥 한 번 주저리주저리 써보겠다.
흔히들, 강신주를 향해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따위의 수식어가 붙곤 한다. 으레껏 이러한 강신주의 강의나 강연에는 '힐링'류의 상업성 멘트가 뒤따라 다닌다. 아무래도 강신주를 강력히 비판하는 '인문학팔이 장사치'라는 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말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는, 인문학팔이라는 비판이 그다지 온당해보이진 않는다. 잠깐 내 의견을 밝히자면, 난 강신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다지 접할 기회도, 접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강신주에 관해 많이 알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신주의 말들로부터 발견되는 것은 인문학자 내지는 철학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다. 강신주가 인문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세속화된 치유의 문법으로 철학을 탈바꿈시키는 것은 그게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강신주가 그렇게 된 것은 철학 혹은 인문학이 위치한 '모호한' 자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강신주, 그리고 '강신주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엔 인문학의 위기라는 지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상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인문학'이라는 모호한 위치가 강신주 현상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일종의 무규범이랄까. 인문학과 철학 사이에 놓여있는 간극을 인지하는 것도 어렵고, '철학'에 관한 모호함 역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나마 요즘에는 분석철학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철학에 관한 편견은 여전히 극심하다.('저 철학 공부해요'라고 하면 '점 좀 봐달라'는 농담이 들어온다는 것은 예삿일이다.) 철학에 관한 편견 내지는 환상이 만들어낸 것이 '강신주 현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스펙트럼을 좁게 잡아서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함이 더 편할 것 같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론의 시대"라는 말로 현대 사회를 정의한 바 있는데, 오늘날이야말로 정말 이론에 관한 '철학적 개입'이 필요한 시대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서 '철학적 개입'이라 함은 끊임 없는 논증과 해체와 분해 과정이다. 다시 말해, 어떤 미지의 신비한 힘이나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명징한 사실들에 의해 법칙적으로 규명되는 것도 아니다. 전자는 종교의 영역이고 후자는 과학의 영역이다. 철학은 이 중간자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중간 지점에서 철학은 끊임 없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가령, 철학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어려우며 가장 오래된 논제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제를 보면 간단하다. 이 문제에 관한 '철학적 접근'은 신앙심에 의해서도, 과학적 진리들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끊임 없는 해체와 분해와 철저한 논증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철학이 끊임 없는 논증의 과정인만큼, 철학이 말해주는 것은 명징한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신비한 존재에 관한 믿음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통해 현상을 해체하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를 이해하고, 그렇게 새롭게 세계를 재구성한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철학적 진리'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이며, 그것은 과학을 통해서도, 종교를 통해서도 규명되지 않는, 오로지 '철학'에 의해서만 논증되고 해명될 수 있는 명제들이다.(가령, 정치철학에서 '주권'은 오로지 철학적 작업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강신주의 강연이나 책을 보다 보면 이러한 철학적 논증들과 '철학적 고민'들이라는 것이 그다지 잘 묻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선대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논증해놓은 것을 순식간에 '삶에서 배워야 할 지혜' 정도로 격하시키는 태도는 너무도 잘 드러난다. 살아가면서 듣는 '선배들의 인생 충고' 정도로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철학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철학을 일종의 도덕으로 바꿔버린 셈이다. 강신주 자신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난 '힐링'이란 단어를 싫어한다"라고 말을 했다는데, 오히려 강신주가 '나는 힐링이란 단어가 싫어요'라면서 화려한 레토릭을 구사하는 것이야말로 차라리 더 '힐링'의 형식에 가깝다.
강신주나 혹은 그의 추종자들을 향해 '탈레반'이라는 비난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철학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모든 '철학적 고민'에 있어서 문제를 도덕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도덕과 윤리에 관한 '철학적 고민'은 중요하지만, 모든 '철학적 고민'을 도덕의 문제로 바꿔버리는 것은 전혀 '철학적 태도'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적 태도'는 '나쁜 자본주의'에 대한 정념분출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생산, 착취와 억압이라는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