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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으로 살펴보는 검투사들의 생활상
게시물ID : history_73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20
조회수 : 16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25 20:08:54



<로마의 검투사 경기>


왼쪽이 미늘창과 그물로 무장한 레티아리우스(Retiarius), 오른쪽이 칼과 방패로 무장한 세쿠토르(Secutor)이다.



FLAMMA SEC(VTOR) VIX AN(NORVM) 

XXX PVGNAT XXXIIII VICIT XXI 

STANS VIIII MIS IIII NAT(IONE) SYRVS 

HVI DELICATVS COARMIO MERENTI FECIT 


세쿠토르였던 플람마(Flamma : "불꽃"이라는 뜻으로 사람 이름) 30에 조금 못미쳐 살았다. 

34번 싸워 21번 이기고 

9번 지고, 4번에 걸쳐 관중들의 자비를 얻었다. 시리아 태생이다. 

이 비석을 델리카투스(Delicatus)가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는 동료를 위해 만들도다. 



D(IS) M(ANIBVS) VRBICO 

SECVTORI PRIMO PALO NATION(E) FLORENTIN(VS) 

QVI PVGNAVIT XIII VIXSIT ANN(ORVM) XXII OLYMPIAS 

FILIA QVEM RELIQVIT MESI V 

ET FORTVNESIS FILIAE 

ET LAVRICIA VXSOR ANN(O) VII 

TE MONEO VT QVIS QVEM VICERIT OCCIDAT 

COLENT MANES AMATORES IPSIVS


죽음의 신들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D. M. : '고인'을 표현할 때의 관용구) 

우르비쿠스(Urbicus)에게. 그는 세쿠토르이자 

프리무스 팔루스(Primus Palus : 창을 쓴 검투사)였으며 플로렌스(=피렌체) 출신이다. 

22년을 살았으며 슬하에 올림피아(Olympia)라는 딸이 있는데 난 지 다섯달이 되었다. 

나 라우리키아(Lauricia)는 그의 아내로서 함께 7년을 살았도다. 

난 당신께(아마도 비문을 보는 제 3자) 경고하느니, 누군가의 승리 뒤엔 언제나 죽는 사람이 있다오. 

이 비석을 사랑하는 남편의 영혼을 위해 세운다. 



ALPIVS AN(NO) XXX 

H(IC) S(ITVS) E(ST). S(IT) T(IBI) T(ERRA) L(EVIS) 

POSVIT AMAB- ILIS DE SVO AMABILIS ANNO(RVM) 

XXX NAT(IONE) GALL(VS) 

H. S. E. S. T. T. L. 


30을 산 알피우스(Alpius)가 여기에 잠들도다. 

그대 위의 흙이 가볍길! (H.S.E.S.T.T.L. : 망자가 여기에 있다는 의미의 관용구) 

아마빌리스가 이 무덤을 만들었다. 

아마빌리스는 30을 살았으며 갈리아 출신이다. 

H. S. E. S. T. T. L.




<무르밀로 검투사의 예시>



MVRMILLO 

AMPLIATVS NATIONE SYRVS 

PVGN(AVIT) XXXIII ANN(ORVM) XXX T(H)R(AEX) 

STVDIOSVS 

FRATER D(E) S(VO) P(OSVIT) 

H. S. E. S. T. T. L. 


무르밀로(Murmillo)인 

시리아 출신의 암플리아투스(Ampliatus), 

33번 싸우고 30년을 산 그가 여기에 잠들도다. 트라키아 사람인 

스투디오수스(Studiosus)가 그의 형제(실제 형제가 아니라 검투사 학교의 동료란 뜻인 듯)로서 이 무덤을 세운다. 

H. S. E. S. T. T. L. 



MVR(MILLO) CERINTHVS NER(ONIANVS) II 

NAT(IONE) GRAECVS AN(NORVM) XXV ROM(A)E 

CONIVX BENE MERENTI DE SVO P(OSVIT) TE R(OGO) P(RAETERIENS) D(ICAS) S(IT) T(IBI) 

T(ERRA) L(EVIS) 


르밀로 케린투스(Cerinthus)는 네로 황제의 검투사 학교 출신인데 2번 싸웠다. 

그리스 태생이며 25세에 로마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가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는 남편를 위해 이 무덤을 세우노라. 

이 곳을 지나는 당신께 청하느니, "그대 위의 흙이 가볍길"이라 말해주시오. 



D. M.

HOMINI PAGANO 

THELONICO QVENDAM 

RETIARIO QVI PIETATE 

POPVLI RVDE 

LIBERATVS EST 

XVSTVS AMICVS 

ET PEPTICVS SODALIS 


죽음의 신들로부터 부름을 받은 

형제(homo paganus) 텔로니쿠스(Thelonicus)는 한 때 

레티아리우스였지만 관중들의 

요구로 인하여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의 친구인 크수스투스(Xustus)와 

동업자인 펩티쿠스(Pepticus)가 (이 무덤을 만들도다) 



D. M. 

RVTVMANNE RET PVGNARVM XXIII 

INVICTO VXOR BENE MERENT(I) 


죽음의 신들로부터 부름을 받은 

루투만누스(Rutumannus)는 23번을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았도다. 

그를 위해 아내가 (이 무덤을 만든다.) 



D. M. 

FILEMATIO 

NA(TIONE) AGRIPPIN(ENSIS) 

QVI VIX ANN(ORVM) XXX 

RET(IARIO) PV(GNARVM) XV 

AVR(ELIA) APHRODI(TA) 

B(ENE) M(ERENTI) F(ECIT) COI(VGI) DV(LCISSIMO) 

AQ LV(DVM) MAG(NVM) CA(E)S(ARIS) 


죽음의 신들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필레마티우스(Filematius : 키스하는 자들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은 

아그리피넨시스 식민지(=오늘날 독일 쾰른) 출신이며 

30에 조금 못미쳐 살았고 

레티아리우스였으며, 15번 싸웠다. 

나, 아우렐리아 아프로디타(Aurelia Aphrodita)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랑스러웠던 남편을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그는 황제 폐하의 위대한 검투사 학교 출신이다. 



D. M.

PVRPVRIO 

RET(IARIO) GRAE(CO) 

AD CAES(ARIS) L(VDVM) M(AGNVM) 

MOADV OCCI(DIT) 

PVG XI B(ENE) M(ERENTI) 

CON(SERVI) FECER(VNT) 


죽음의 신들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푸르푸리우스(Purpurius)는 

그리스 출신의 레티아리우스였으며 

황제 폐하의 위대한 검투사 학교 출신이다. 

그는 11번째 싸움에서 죽임을 당했다. 

마땅한 자격이 있는 그를 위해 그의 노예들이 이 무덤을 만들도다. 




이를 종합해서 알 수 있는 사실 


1. 관중의 요구로 인하여 자유를 얻었어도, 30 넘어서 사는 검투사가 드물다. 이는 아마도 경기 도중 입었던 부상 때문에 건강에 악영향을 받아서였던 듯. 


2. 검투사도 아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De vitis Caesarum의 클라우디우스 - 22장을 보면 4아들을 둔 검투사가 황제의 호의에 힘입어 자유를 얻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경우는 워낙 특이하기에 역사 기록에 실린 사례일 것이다. 


3. 검투사 학교의 동료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모종의 유대가 검투사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몇몇 비문에서는 같은 검투사 학교 출신의 불화를 암시한 내용도 있다고 한다.





옮긴이의 덧붙임 : 


에트루리아의 장례 풍습에서 출발했다 추정되며 기원전 3세기에 처음 실시된 이래 로마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 전체를 통틀어 약 7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검투사의 경기는 제정 로마가 시작되는 1세기를 전후하여 대개 현대의 프로레슬링과 같은 엔터테이먼트화가 됩니다.


이는 팍스로마나가 급속하게 진척되며 공급되는 노예의 수가 급감하여, 노예 즉 재산의 손실을 감당치 못한 노예주들의 영업 방침 변경(?)의 이유도 있지만 가령 용기있는 자로 여겨지게된 짐승과 싸우는 검투사인 베스테아리와 같은 경우나 키케로가 명예를 언급할 정도로 초창기와 달라진 시민들의 인식 변화와 2대 메이저 스포츠로서 포퓰리즘 정책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담당한탓에 정치인들이 국가차원에서 장려한 까닭도 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여집니다.


때문에 검투사를 배출하는 여러 명문 학원들이 생겨났으며 검투사의 팬클럽은 물론이거니와 검투사들의 단체, 스폰서, 프로모터 등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지요, 이렇듯 시스템을 보자면 현대의 프로 격투 대회와 일치하지만 로마의 경우 5만명을 수용이 가능한 콜로세움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며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대결을 넘어 사서와 소설, 신화등에 기록된 여러 전쟁이나 결투들을 넘어서 심지어는 모의 해전까지 할 정도로 스케일, 인기, 비용에서는 현대를 압도하는 수준입니다.


이러한 검투사의 시합은 글래디에이터, 스파르타쿠스 등의 영상매체와 다르게 대개는 토가를 걸친 '심판'이 함께 했습니다. 즉 프로레슬링 처럼 바닥을 두들겨 항복을 하거나, 때려 눕혀 항복을 받아내어 경기가 끝나는 식의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가 말한 대중은 피를 원하는게 아니라 예술적인 검투사의 기교에 열광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야만적인 경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자들 마다 이견이 갈리지만 검투사는 실제 경기당 5 ~ 20%수준만이 사망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즉 패자라는 이유만으로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이야기 이지만 경기내용이 엉망이라면 관객들의 요청으로 죽을 확률은 급격하게 상승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검투사들은 영상매체나 소설등의 묘사와 다르게 보리와 콩 말린 과일등만을 먹는 채식주의자 이기도 하지만 살집이 통통하게 오른 스타일을 선호했습니다. 


이는 지방층을 두텁게 하여 상처로 부터 급소를 보호하고자 하는 현대의 의학 지식으로는 말이 안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매우 효과적이라 판단되었던 목적도 있지만 실상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섭취를 늘려 지구력을 향상시키며 근육은 힘을 쓸수있게 초기 추진력을 만들어 내지만 지방은 그 추진력에 질량을 만들어내는 원리에 따라 힘을 키우기 위한것과 더불어 관절을 보호하려는 방책이었을겁니다.


(물론 로마 벽화에서 볼수 있듯이 선수에 따라 달라질수는 있습니다,)


장비는 경기나 목적 ,선수, 취향등에 따라 갈리지만 에페수스의 유적에서 발굴된 뼈에서 볼수있듯이 이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참여하는 경기가 무엇인가 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기는 맨발로 나간셈이지요,


이러한 검투사들의 양성 비용이나 몸값은 매우 비쌌지만 그 만큼 수익도 대단했는데 삼년만 하면 노예가 자유인이 될수 있을정도로 파이트 머니가 높았으며, 스타급 선수들은 원로원 의원과 친구일 정도로 인기는 물론이고 돈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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