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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비잔티움 제국사 (16) 황제, 사도, 그리고 神
게시물ID : history_73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4
조회수 : 51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1/25 18:08:56

http://cafe.daum.net/shogun의 마법의활 님이 쓰신 글입니다.

 

보통 역사책들을 보면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은 단 두 개로 요약됩니다.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립 - (천도!)"

...........물론 시험 볼 때는 답안에 저것들을 채워넣어야겠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좀 멉니다.

이유인즉슨, 세계사 교과서에는 아무래도 예전 서구 학자들의 업과만 업데이트되어있고, 현대의 수정된

보다 올바른 시각을 넣으려면 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황제 교황 주의에 대한 오해입니다. 저 역시 이에 대해 상당히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교회 까페를 들어가서 몇번 물어도 보고, 관련 내부 게시물들을 보면서 다른 비잔티움 관련 서적들과 대조해본 후에야 좀 이해가 되더군요. -아쉽게도 정교회 까페는 현재 폐쇄 상태입니다. (-_- ) - )

제 생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이마저도 상당 부분 늦을 것 같지만...여튼 계속해봅니다.

언급할 것은, 로마 제국의 운영 소프트웨어 "기독교"의 완전한 인스톨은 결코 콘스탄티누스 때 완결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아예 이걸 자기 시대에 인스톨이 가능하리라고 믿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천재적인 정치 감각이 입증되는 동시에..... 이 사람이 죽을 때의 그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독실한 진정한 크리스트 교도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입증되겠습니다. -_- )

313년에 리키니우스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운영 소프트 웨어 기독교의 인스톨이 그때에야 들어갔다는 데 있습니다. 0%, 1%, 2%....하지만 바로 그게 중요했습니다.

물론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도 기독교를 공인하거나 묵인한 황제는 많았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제들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에 따른 문제였지 뭔가 공적으로 적법한 "로마 법적인 절차" , " Res Publica"의 인증을 받은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Res Publica 와 Familia가 종심 방어 전략의 확립과 기독교로 다 무너졌다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_- )

때문에 이건 차후로 황제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와서 이것이 법적으로 공인이 되어서, 설령 후대에 이교도 황제가 나오더라도 저것을 뒤집으려면

상당 부분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기독교도 황제가 나오면 저 공인에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서 강화가 가능하게

끔 되었지요. 인스톨 과정의 완성입니다.

즉 예전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처럼 무작대기로 "넌 기독교인 = 무법자, 고로 법의 심판을 받아라!"가 안 통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의 율리아누스도 이 장벽 때문에 자신의 바램을 실천하는 데 상당한 부담을 느꼈으며, 율리아누스 이후로도 실은 완전한 이교도 황제가 한 번 더 등장하지만 그는 그냥 술주정뱅이 임포텐쯔로 역사에 남는 불명예밖엔 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콘스탄티누스로 돌아와보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무병 장수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이교 세력이 강세였고 제국을 돌리는 운영 체제는 기독교 인스톨이 한 70 80 넘기 전에는 이교도가 기본 베이스겠지만, 뭐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자기 죽은 다음에 인스톨 %가 어느 정도만 넘으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습니다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인스톨 폴더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어쨌든 제국의 행정 수도를 어딘가에 건립할 필요는 있었습니다.

다만, 로마는 애초부터 탈락.

애초에 로마가 행정 수도 노릇을 못하게 된건 이미 3세기때부터 증명된 사항이라 그건 이미 얘깃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설혹 로마에 기독교도가 콘스탄티누스 시대보다 100배는 더 많았을지라도, 이교 유적이 없었어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에 다시 행정 기능을 되돌리는 등의 일은 여러 요건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야! 전통의 수도를 무시할 거냐? 이제 나라도 태평하니 과거의 영광을 돌려달라!

인스톨을 그냥 예전 인스톨 폴더에 겹치기 해랏! 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다소 생각이 달랐습니다.

"니미..........겹치기 했다가 뻑나면 니들이 책임질겨? 속도 존내 안 받쳐주는 로마 파티션으로 뭐 어쩌라고? "

그러나 대놓고 이 말을 할수는 없는 법. 제아무리 콘스탄티누스라도 제국 수도를 옮긴다는 청천 벽력의 말을 했다간....

모가지감이 너무 뻔했습니다. 이건 독불장군 내공으론 콘스탄티누스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도

끝내 할 수 없었던 짓이었지요.

하지만...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했던 구라 방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분간 분할 파티션으로 부팅했다가 로마 파티션 파일을 슬슬 다른 파티션에 백업하는 거야...폴더만 살려두면 지들이

뭘 알겠어? 폴더 안은 나만 볼 수 있는 내용인데...힛힛힛"

해서.....그래서 어느 파티션에 인스톨 할거냐?

이번에 인스톨할 파티션은 기독교 인스톨을 잘 백업해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우수한 하드 성능을 발휘할 그런 데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1안. 실상은 니코메디아가 모든 면에서 가장 우수하고 유력한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분 통치할 때 심혈을 기울여 건설해두어 인프라는 이미 완비된 상태였고,

이 곳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른 꼬붕 황제들을 컨트롤했기 때문에 소통이라면 그것또한 큰문제가 없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 는 조건도 동일. 기독교인도 많고.

그러나..........

"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영감태기하곤 달라!"

2안. 해서 선택된 곳은, 비잔티움이었습니다.

2안이 1안보다 나은 점은.....

1. 심시티를 즐길 수 있다.

요게 제일 좋은 점이었지요. 그리고 다른 점도 하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니코메디아는 그렇게 못하죠.

"니코메디아를 봉헌했......... <- 이 새X야, 몇백년 역사 니코메디아를 네가 다 만들었냐? "

(여담이지만 엠비우스 분봉왕이 이점에서 누구보다 몇 배는 더 위대합니다.)

2. 뻥치기 하기에 좋다. (언덕이 거기도 일곱 개고 신께서 나한테 새로운 도시를 지으라고 등등등등....-_-)

근데 2안에는 중대한 결점이 있었습니다.

돈이 존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가족의 피가 묻은 손으로 행해졌다는 데 암운이 있었습니다.

ps. 여담입니다만 그 세베루스 황제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물리칠 때 비잔티움을 파괴하는 삽질만 안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여기가 니코메디아 못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이 없었다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필시 비잔티움을

자기 수도로 택했을 겁니다.

..............

근데 아니네. 그랬다면 니코메디아를 택했겠군요. -_-

......왜냐하면 황제의 손에 친아들의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푸스의 제거인데, 크리스푸스가 황제인 아버지보다 위명이 높아지니까 제거했다는 식으로 누구는 얘기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그 정도로 구제불능의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건이라면....

콘스탄티누스가 죽인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에게 죄를 물을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파우스타는 비록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와 오빠를 죽였지만 여전히 콘스탄티누스에게 충성했고, 그 결과는

많은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우스타가 왜 콘스탄티누스에게 충성했을까? 그건 콘스탄티누스가 결국 그녀의

자식들에게 제국을 상속할 거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크리스푸스가 갈수록 위명이 높아지니 이건......

파우스타는 베갯밑 공사로 크리스푸스를 갈리아 지역 담당 카이사르에서 해임시키고 그 자리에 자기 큰아들을

올려놓는데, 결국 제거에는 실패한 모양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정말로 크리스푸스에게 위협을 느꼈다면 해임한 그 단계에서 바로 살해를 하거나 구금헸어야 합니다.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죽일 때 그렇게 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벨리사리우스에게 그렇게 하려했고, 유스티누스 2세가 그런 식으로 나르세스를 쳐냈습니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그 다음 단계. 자신과의 불륜 관계였다고 속이는 것. 콘스탄티누스는 욱하는 성질이 다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극하는 게 아주 효과적이었지요. 해서 크리스푸스가 단박에 죽었지만, 콘스탄티누스도 실상을 깨달았고,

파우스타에게 신속한 죽음을 내립니다. 결국 파우스타도 제거.

해서 남은 게 골칫덩이 철부지들이었는데...이건 일단 나중에.

아직 안 다룬게 있어서 그걸 짚고 넘어가도록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립 외에 콘스탄티누스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개최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당시 선풍적으로 밀어닥치던 아리우스 파가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아타나시우스 파로 알려진

삼위일체가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나올 수 밖에 없는 모작가 얘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모 작가의 해석이

문제가 되는 건 ,콘스탄티누스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데 있습니다.

무슨 행위를 했다하면 그 모두에 심층적인 배려가 있었다고 해석을 하는 건데

(.....유명한 예: 카이사르가 빚을 많이 진 것은 크라수스에 대해 강자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다!!!!

아....이거 진짜...... 미안하지만 이건 박조께서 일제 국민학교 다니실 때 뒤에서 삼등 한것을 두고 황민화 교육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한 갑제 본좌의 해석과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_-

그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빚을 변제받을 능력이 없는 놈이 자꾸 빚을 얻으러 오면 끝내는 몸으로 때우도록 하는 건

동서고금 마찬가지입니다. 실상은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에게 투자를 했던 것임에 불과합니다.

이런 식의 투자는 크라수스 말고도 고대의 부자들이라면 누구나 했던 방식입니다. )

그리스어도 어눌했던 콘스탄티누스가 자기도 이해 못하는 유의 교리 따위가 정통 교리로 채택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는 이건 어불성설의 얘깁니다.

실인즉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국가 통합에는 더 유리합니다.

핵심 문제에서는 대단히 간단명료한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를 생각해보면 나오는 결론입니다.

콘스탄티누스 같은 경우도 이해하기 쉬운 아리우스의 교리에 마음이 더 기울어져있었고요.

(성자는 성부와 동등한 신이 아니며, 성부보다 한 단계 낮은 신으로써 성부의 피조물이다.

----> 아리우스 자체는 대단히 신실한 크리스트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도 성자가 인간이고 신이 아니다, 라고까지 주장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리우스가 그렇게 주장했다고 아타나시우스가 오독을 했고, 혹은 그렇게 몰아붙였습니다.

나중엔 아리우스 파들마저도 헤깔려서 이런 식으로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서 그렇지만, 아리우스 자신은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교리 논쟁들 보면 거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세싸움들하고 아주 똑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

그러나 왜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결론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는가?

이로 인해 수많은 오해와 억측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황제 교황 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풀어가면 답이 나옵니다.

소집자고, 의장이라고 해서 회의에 참여해서 결론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낼 권리가 황제한텐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고, 주교가 아니며 교회의 위계 체제 밖에서 교회를 보호하는 수호자일 뿐.

공의회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결론을 낼 권리가 있는 것은 위계가 높은 대주교들이었고, 그것은 이후의 공의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위일체론은 그 시초가 교부들한테까지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주류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신흥 이론 세력인 아리우스

파로써는 제아무리 일시적인 우위를 점했다한들 보수파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의회가 신도들의 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얘기를 풀려면, 플라톤 주의와 원수정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니까, 이에 대해선 글 하나를 더 려서 더 자세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

여하튼 일단 이정표는 정해졌고, 콘스탄티누스는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서,

이후 황제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이 선례를 마구 깨려 들었던 후임 황제들이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가 원로원 역할, 그리고 철학자 역할을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교와 사제단 자체가 실은

고대 유태교 랍비들과 선지자들의 후예라기보다는 (자기네는 그렇게 믿고 싶어했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제자들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역시 부정하고 싶어했지만)

근데.....그러거나 말거나, 콘스탄티누스는 그딴거 관심도 없었습니다. 여하튼 교리 문제만 매듭졌으니 그 다음은....

도시를 봉헌하는 문제가 남았는데.....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의 폐허 위에 로마 노바를 지으면서, 뭔가를 깨닫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좀 아깝네...도시를 지어서 왜 봉헌하냐? 그냥 내가 가져야지...."

(엠비우스도 이렇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_- )

즉, 자신이 사도도 하고, 신도 해야겠다!!!!

해서 미친 듯이 신 도시 건설 공사가 강행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없는 재정에 무리를 해서 각지의 신전에서 석재를

공출하고 예술품을 공출했으니 이건 뭐....

해서 불과 한 오륙년만에 소위 로마 노바라는 도시 하나를 뚝딱 해치워만듭니다.

실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중앙 성당이란 곳에는 12사도 무덤이란 걸 주변에

빙 둘러 만든 뒤 중앙에 자기 꺼 하나 세운 모양인데, 이게 후대에 12사도와 동급이니 뭐니로 알려진 시초였습니다만,

콘스탄티누스의 의도는 그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잖으면 도시 중앙에 대가리 모양을 자신을 본떠 만든 태양신 주상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의 목표는 바로 12사도보다도 우위인,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였습니다.

도시도 결국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만족의 의미로, 남들은 경멸의 의미를 붙여 부른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으로 통칭되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업적 중 일부가 그랬듯이 영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겉보기에는 썩 좋았는데, 모든 것이 부실에 부실의 연속으로 지은 날림 공사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벌써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가 되면 콘스탄티누스가 지은 건 고작 기둥 몇개만 꼴랑 남은채 전부다 새로 지은 것이

들어서게 됩니다만.... -_- 물론 콘스탄티누스 의도는 아니었고, 콘스탄티누스 자체가 상당히 뭐랄까, 그런거 있잖습니까.

군대 다녀온 분들이면 다 아는 그런거.

"아, 그 기간 안에는 도저히......."

"이 색히, 기간 안에 안되면 알아서 해!!!! 누군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뭐 이럼 동서고금 다 똑같습니다.

"제길할....야! 눈에 보이는 부분만 삐까번쩍하게 해!!! 아 씨 철사가 부족해? 네 개 할거 두개만 집어넣어, 하루 이틀 해보냐?

검열할 때만 대충 넘어가면 되...

석재가 부족해? 야 임마 부족하면 니가 알아서 때워야지....... 옆에 작업하는 얘들 꺼 밤에 셉여서 끼워넣어! "

....분명히 말하건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행보관들의 땀과 노고로 완성된 도시였던 것입니다. -_-

전방 막사라면 모르겠는데 일국의 수도를 그 따위 마인드로 지었으니 결과는 너무 뻔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근거는 없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세웠다는 성벽도 그딴 식으로 세워졌을 게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말년에 과대망상증에 걸린 황제의 닥달질에 관료들이 거의 공포에 질린 채 속전속결로 완비하려 했기 때문이죠. 뭐 나중에 도시를 확장하면서 어물쩍 철거된 모양인데, 부실 공사로 지은 성벽이라 허무는 건 좀 쉬웠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도 선견지명이라고 보면 아주 곤란하지만 말이죠.

여하튼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전에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죽어 소원대로 12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를 상징하는 위치에 안장됩니다. 소원대로 그는 죽어 신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가톨릭에서도 정교회에서도 명실공히 성인으로, 일명 성 콘스탄티누스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앞서 언급한 철부지들의 시대인데.... 그래도 후대의 진행 경과를 아는 저는 이들을 구태여 단죄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호부견자 없다고, 그래도 철부지들이 모 작가의 묘사와는 달리 전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기본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단죄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경제에 대한 무관심인데, 전쟁이나 정치도 아예 못했던 테오도시우스 아들들의 바보 듀엣 쇼에 대면 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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