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반공주의의 또 다른 부정적 효과는,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에서 보편적인 정치 언어로서 좌와 우라든가, 또는 영어의 people, 프랑스어의 peuple, 이탈리아어의 popolo 등에 해당하는 적절한 말을 사용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일상적인 정치 언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쉽게 채색될 때 인민, 민중, 계급 등의 말들은 이내 일체의 좌파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합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북한 공산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이념적 불러내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언어와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정치의 실천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조건에서 정치사회의 여야 구조 또는 정당 체제는 이념적으로 좁게 열린 스펙트럼에서 각축할 수 밖에 없고, 사회 세력이 시민 사회의 수평적-기능적 갈등을 조직하거나 사회의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대안적 담론이나 정치 운동을 조직화하기는 어렵다. 사회의 기능적-계층적 이익이 분화되고 갈등하게 됨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 농민, 교사, 중소기업가, 자영업자 등의 집단들이 자신의 특수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변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적-담론적 언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여러 형태의 공적 영역에서의 토론과 더불어 대중 동원화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집권자들의 정치적 이익 및 지배적 담론과의 충돌 내지는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기능적-계층적 분화와 갈등이 자연스러운 것인만큼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이념과 언어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냉전 반공주의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냉전 반공주의의 헤게모니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 것은 이런 조건에서다. 대답은 양자의 양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냉전 반공주의는 정치의 대표 체제 내지는 정당 체제의 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크게 저해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정하고 주기적인 선거, 참여의 평등, 다수의 결정, 언론-집회-출판의 자유 등 절차적 최소 요건을 갖춘 정치 제도의 실천을 그 핵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공적 이성의 사용을 통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정치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그 중심에 포괄하는 정치적 이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냉전 반공주의에 기초를 두고서는 그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어렵다고 하겠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2판)』, 후마니타스, 2002, pp.8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