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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죄다 거짓에 불과하다.
게시물ID : phil_81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막의낙타
추천 : 1
조회수 : 6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2/04 16:33:44
 
 
 
 
 
"모든 진지한 진리 탐구나 썰들은 죄다 거짓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창조적으로 구라를 치고 창조적으로 멋진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과학은 금욕주의다

금욕주의는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만이 수용한 게 아니었다. 니체에 따르면 근대의 과학자들도 금욕주의자였다고 한다.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과학자들을 가리켜 금욕주의에 반기를 들었다고 말해야 옳을텐데, 그들이 오히려 최후의 금욕주의적 이상에 물든 자들이라니. 왜 그럴까?

과학을 금욕주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근거는, 과학이 신을 거부하면서도 그것이 아직 '진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진리를 믿고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과학적 진리는 우리가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수많은 지식들의 근거이기도 하다. 실험을 통해 인과적으로 증명된 결과를 진리라고 믿는 습성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기는 어렵지만 눈에 보이는 실험과 증거들을 신봉하지 않기란 어렵다. 그래서 과학자는 진리의 신봉자들일 수 밖에 없다.



전문가를 신뢰하는 사람들

나도 그렇고 내가 아는 많은 이들도 그렇고, 우리는 대부분 전문가 집단을 신뢰한다. 티비나 매체에 등장하는 이름있는 전문가나 학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사건을 이해하고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전문적인 지식을 얻은 결과,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안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지식은 과학적 지식이다. 과학적 추론이나 과학적 실험에 의해 논증된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심리분석을 프로이트나 프로이트를 공부한 전문가 집단에게 맡기며, 자신의 부부문제를 다른 부부 전문가에게 맡기고, 아이의 진로를 입시전문가에게 맡기며, 영화나 예술작품의 해석을 평론가들의 글을 통해 받아들인다.

진리를 추종하는 과학자들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제의 작용 때문이다. 푸코는 그것을 지식권력이라고 명명했다. 사람들은 확증된 진리를 원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원한다. 결과에 대한 원인을 과학적으로 추론하여 안심하길 원하며, 행위와 사건의 목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야만이 그것을 전반적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과학자는 진리를 추구하고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오늘도 열심이다.


삶의 본질은 부도덕이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진리 추종이 관능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의 이상이라고 잘라 말한다. 니체에게 관능 부정은 삶에 대한 부정이다. 과학 수업에서 배운 것을 응용하자면, 모든 생명체는 번식하고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기만하고 속인다. 박테리아에서부터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기만이고 속임수다. 그러므로 자연은 전혀 도덕적이거나 선하지 않다. 어떤 것을 속이지 않고 속속들이 파헤치겠다는 사실관계에 대한 집착이 과학적 진리를 낳은 동기라면, 과학적 진리는 자연스러움을 거역하는 반대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추종하려는 그 의지는 종교의 정서와 맞닿아 있고 그것은 결국 금욕주의로 환원된다.

과학이 신을 부정한 것은 맞지만, 내면의 종교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니체의 발견은 멋지다. 나 역시 과학적 진리에 대한 추종이 있고 해답을 구하려는 경향도 강하며 어떤 식으로든 완결하려는 패턴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내 속에도 금욕주의적 이상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다. 니체의 질문처럼 만약 모든 진리가 오류라는 것이 판명된다면, 인간은 다시 신에게 귀의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신으로 귀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리의 가치를 따져묻는 일은 의미있다.


진리에 대한 문제제기만이 진리의지를 파괴한다.

왜 그것이 진리인가? 라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진리 의지는 파괴된다. 맹목적으로 진리를 따를 게 아니라 그것이 왜 진리이고 내가 왜 그것을 추종해야 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볼 시간을 갖는다면, 진리는 매우 나약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임을 금세 깨닫게 된다. 의문을 제기하고 가치에 대해 따져묻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존중이며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확고한 진리가 많이 필요한 사람일수록 그는 약한 자이다. 이 세상은 확고하지 않고 부도덕하며 무질서하고 우연과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부조리 그 자체다. 그러한 세상을 확고한 하나의 해답과 명백한 하나의 사실로 환원하려는 생각은, 생성과 변화와 다양성을 거부하려는 부정적이고 우울한 의지이며 나약한 본능에서 나온 자기 비하다. 과학적 진리를 숭배할수록 인간의 본능이나 감각은 왜소화되기 때문이다.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내 삶이어야 한다. 과학적 진리나 실제적 사실에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은 맹목적인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애국심이나 아나키즘, 분노의 회오리, 증오, 허무 따위의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힘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확실성이 없고 불안정하며 아무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심연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는자. 그런 자의 정신이야말로 자유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일치가 아름답다

휴머니즘이란 어떤 합법칙성을 갖는 세계라는 점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이다. 현대인의 민주주의 본능에 영합한 것만이 자연선택되는 휴머니즘의 지향성은 우연과 생성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발명해 낸 법칙의 탑에 불과하다. 필연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목적적인 것만을 절대화한다. 그것에 가까울수록 좋은 것이고 그것에서 멀어질수록, 그러니까 완전하지 않고 혼란스러우며 질서정연하지 않는 것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세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무질서하며 삶 자체가 이성적이지 않다. 이성적이지 않은 삶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노력이란 공허한 것이다.

다양한 현상에 대한 하나의 진리가 있다는 생각은 도식화와 단축의 예술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오류는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잘못과 기만을 저지른다. 왜 거짓, 이기심, 정욕 같은 부정적이라 불리는 가치들이 더 높은 가치를 가져서는 안되는가. 그것들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고 삶의 근본 형식이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관계-세계이다. 어떤 것과 관계 맺느냐에 따라 새로운 다양성들이 만들어지는 세계이며, 하나의 진리로 일치되지 않는다. 불일치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는 그 무엇은(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물자체')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될 수도 없다. 세계는 흐르는 강 속에 있다.


진리를 낳은 것은 인간의 두려움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해지는 것, 이성적 사유, 진리의지 따위를 깨뜨리기 위해서다. 참과 거짓의 대립은 없다. 선악을 넘어서 살아야 하듯, 참과 거짓, 진리와 허구의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 오히려 허구의 세계라고 내쳐진 곳에서 허구의 춤을 열심히 추는 것, 그것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진리라는 확고한 해석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두려움이 촉발한 매우 쉬운 사유의 방식이다. 모든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쉬운 사유는 어려운 사유를 이긴다. 삶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신을 대신한 그 곳에 진리에 대한 믿음을 낳은 것이다.

진리 의지를 비판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나약함을 비판하는 일이다. 진리를 원하고 추종하는 인간이 많을수록, 전문가 집단에게 자기의 문제를 떠넘기는 경향이 팽배할수록 인간 개개인은 더욱 무능력해지고 삶은 점점 더 무가치한 것이 된다. 다수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사람들은 과학적 진리가 그것을 중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적 진리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는 인간의 오류가 낳은 산물이다. 인간 오류의 집대성이 바로 언어가 아닌가. 언어란 본질적으로 차이를 무화시켜 하나의 개념으로 용해시키는 법칙이다. 언어의 규칙성으로 만들어진 진리란 이미 오류 투성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진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실험을 하자

인간이 언어를 만들어 언어에 갇히듯 진리를 만든 인간은 스스로 진리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언어나 진리로 다양한 해석들을 제한하거나 전문가 집단의 말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태도들 모두, 실험하지 않겠다는 게으름이 낳은 태도다. 우리에게 실험이란 진리를 이치에 맞게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더 건강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의혹이나 비논리적인 질문이나 불합리하고 엉뚱한 생각들을 진리라는 틀에 가두어 폐기해선 안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진리를 보존하고 진리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리는 없으며 다양한 개개인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오류가 진리라면 진리를 삶의 지표로 삼아 떠받드는 일은, 자기 삶과 자기 세계를 무화시키는 바보스런 일이다. 진리의 세계가 몰락할 때(내가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거부할 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진리의 척도에 맞출 필요없이 내 삶을 창조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몰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삶을 사는 일이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람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너희는 벌레에서 사람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너희는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벌레다. 너희는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원숭이다운 원숭이다.
너희 가운데 더없이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역시 식물과 유령의 불화이자 트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나 너희에게 유령이나 식물이되라고 분부하고 있는 것인가?
보라.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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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글이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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