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조공무역은 '속국이나 제후가 종주국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써 이뤄지는 공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공무역은 매우 전근대적인 외교방식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권국가들 간의 평등'이라는 개념이 도입 된 근대 이후의 통념일 뿐, 실제로 조공무역은 조공하는 나라에게 큰 이익이 되었으며 동북아시아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외교였기 때문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조공무역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고대사에서 중국과 중국 바깥의 국가들 사이에는 경제·문화 등 여러 면에서 현격한 수준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에 조공국에게 조공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608년 사절단을 이끌고 수나라에 조공하러 갔했을 때 그의 수행원 중 한 사람이었던 다카무코노 구로마로(高向玄理)는 중국에 정착하여 수십 년간 공부를 한 뒤 640년에 귀국해 율령국가 건설과 신라와의 외교를 맡았다고 한다. 조공외교 과정에서 그와 같은 ‘엘리트’들이 키워지지 않았다면 과연 중국과 지리적으로 떨어진 일본에서 당나라를 모토로 한 율령국가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창시자인 사이조(最澄·767~822)와 밀교적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인 구가이(空海·774~835) 등 장차 고승이 될 두 승려도 조공무역선에 탑승한 덕에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할 수 있었다. 즉, 조공외교 속에서 일본 고대 문화가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보다 중국의 문화를 훨씬 일찍 접한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예컨대 소수림왕(371~384) 때 전진(前秦)과 교류하여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설립했으며 율령 반포와 같은 성과도 이룰 수 있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고구려가 598년 수나라의 1차 침입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2차 침입이 일어난 611년까지 수나라에 조공을 몇 차례나 한 것이다. 수나라에 적대적이면서도 계속 조공을 했던 이유는 불편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조공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당시에는 필수적인 ‘국제 예절’이었기 때문이다.
6세기 신라와 남중국 왕조들의 종교 교류도 성과가 컸다고 한다. 565년 진나라 사신이 불경 1700권을 신라 왕실에 선물하여 신라 불교 발전에 도움을 주었는가 하면, 589년에 원광법사는 조공 사절들이 닦아 놓은 길로 진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 그리고 원효와 의상은 중국유학을 통해 7세기 신라 불교가 발전하는데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불교 뿐만이 아니라 대세나 구칠과 같은 몇몇 유식한 신라 귀족들은 이미 도교에 꽤나 정통했다. 신라가 그 당시 도교적 현학(玄學)의 본고장이던 양나라·진나라에 조공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유식한 인재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결국 대세와 구칠도 조공무역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외에도 통일신라의 조공 사절들이 당나라에 자주 방문하여 8세기 초반에는 신라 사신들이 한꺼번에 2천~3천 필의 비단을 얻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무역은 9세기 이후 사무역의 발전, 그리고 해상무역으로 상당한 재력을 축적한 태조 왕건의 왕씨와 같은 호족 세력에게도 큰 발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조공무역을 미개한 것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고대 동아시아의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로 인식하고 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국가적인 교류를 가능케 한 동력으로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