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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73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3
조회수 : 79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1/24 11:09:00



양비론을 떠나 간단하게 몇가지 나마 작성해보려합니다.



1. 유태인은 팔레스티나에 대한 권리가 있다.


1900년 이전에 분명히 유태인들이 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그리스 정교, 개신교인과 엇비슷한 극히 소수의 집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유태인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시기는 1890~1900년대 유태인 총회 이후부터입니다. 정확히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동유럽계 사회주의자 계열의 유태인들이 급속하게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이 바로 1세대 시오니스트들입니다.


이 들은 사회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여러 집단별로 모여 살았고 이것이 바로 현재의 키부츠의 유래입니다.


즉 독립 이전에 유태인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것은 20년도 채 안됩니다. 


이러한 주제로 정당성을 언급하는 것은 북아일랜드 인들을 바보로 만드는 이야기 이지요,



2. 유태인들은 비폭력 주의자들이었다.


아시겠지만 아랍인들은 민족 의식이 대단한 편은 아닙니다. 부족이나 씨족 단위의 의식이 대단하면 대단하지요, 따라서 팔레스티나는 어떠한 민족적인 쟁점의 중심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한 주일뿐이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유태인들은 민족 중심으로 시작된 이주 초기 부터 구성한 키부츠라는 집단 농장에서 볼수 있듯이, 대단히 조직적이며 민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건국과정에서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부락에 대한 공격 (보스니아 내전을 생각하시면 쉬울지 모르겠습니다.)이나 영국측 민간인들이 세운 호텔등과 총독부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고, 이러한 테러에 앞장선 이 들이 이스라엘 군의 시작입니다.



3. 이스라엘의 정책은 그 들의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비릇된 고육지책이다.


이스라엘이 요구했고 얻어낸 땅은 갈릴리 일대 그리고 텔아비브에서 하이파를 잇는 해안지역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하며 교역에 유리한 지역들입니다. 그에 반해 아랍인들에게 돌아간 땅은 나볼루스, 제리코, 베들레헴등 내륙의 황무지였지요,


또한 그 들의 외교 정책을 위시로한 주변국에 대한 시각이나 건국 이념은 주변국에 대하여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국가'이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함께 사는 나라가 아니니 말이지요,


(비 백인계 유태인에 대한 백인계 유태인의 차별 즉 순혈주의는 따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4. 이스라엘은 두 개의 국가를 인정했다.


아라파트 전 PLO 의장은 이집트 공대 유학파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수에즈 전쟁 당시 말은 형제국이라지만 난민을 거부하는 연합군의 모습에서 아랍과의 외교적 노력으로 팔레스티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라는것을 알게됩니다.


때문에 그는 팔레스타인 자유 해방 기구 PLO를 창설하고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인구의 1/4이 모여있는 요르단과 레바논의 난민 캠프를 중심으로 대 이스라엘 무력 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무력 투쟁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PLO를 정벌한다는 명분하에 레바논 전쟁을 일으킵니다.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이스라엘도 강경파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온건파도 있지요. 온건파는 시몬 페레스, 라빈등 노동자, 군부 출신자들이며, 강경파는 유태인 정통파들에게 지지를 받는 리쿠르당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 하마스가 강경파이며, PLO는 온건파입니다.)


87년 12월 초 가자지구의 난민 캠프에서 4명의 청년이 이스라엘 군의 트럭에 깔려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이전부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행하여진 이스라엘 인과 이스라엘 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분노하던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군의 주둔에 반대하는 민중항쟁(인티파타)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강경진압에 나섰지만 여태까지와 다르게 유엔은 이스라엘이 아닌 PLO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90년 즈음부터 팔레스티나 서안부근에서의 이스라엘 군의 회군과 팔레스티나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것을 골조로 하는 시몬 페라스와 아라파트의 평화를 향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비록 라빈은 죽었지만 98년 상황은 희망적이었습니다. 바라크 노동자 정부가 시작되었고 아라파트가 영국여왕을 예루살렘의 밀레니엄축제에 초청하느냐를 놓고 기사가 나올정도로 팔레스티나에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는, 꿈을 현실로 이끌어낼수 있다는 희망이 팔레스티나 전체에 감돌았습니다.


그러나 리쿠르당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강경파인 샤론이 무장 병력을 이끌고 이슬람의 성지인 황금사원을 '강제'방문하면서 이 모든 일은 물거품으로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는 비유해보자면 전두환이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광주 망월동을 방문하는 수준의 행동입니다.


당연히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으며 역시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시작하여 12살 어린이를 비릇하여 팔레스타인 인 십수명이 사망 혹은 중경상을 입으며 제 2차 인티파타가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평화 회담을 진행시키던 온건파 노동자 정부는 무너졌고, 샤론이 정부 수반에 등극하게됩니다.

샤론를 정부 수반으로 삼아 강경파로 전환한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리더쉽이었던 아라파트를 라말라에 연금시켜버립니다.


아라파트를 배제시킨다는 것은 팔레스타인세력을 분산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자치정부의 통제를 받는 서안지구와 하마스의 통치를 받는 가자지구로 나뉘어 지게 됩니다. 팔레스티나는 2000년 이후 뉴스처럼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게 돼죠. 


단 하나의 리더쉽이라고 까지 말할수 있는 아라파트를 샤론정부가 인정하지 않은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 독립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습니다. 당시의 시각으로도 아라파트 없는 팔레스타인은 사분오열에 빠지게 되는 것이 불보듯 뻔했으니까요. 


70~90년대까지 아라파트는 모사드의 암살제거명단 1호였으며 대부분의 삶은 야전침상을 옮겨다니는 것이었습니다. 


AK소총을 들고 하루에도 몇번씩 숙소를 바꾸며 살았던게 아라파트입니다. 2차 인티파타 이후 라말라에 연금시킬때 망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한것이 아라파트입니다. 


90년초기부터 2000년까지의 10년을 제외하고는 아라파트의 인생을 이스라엘과의 투쟁 연속이었습니다. 팔레스티나 뿐 아니라 아랍전체를 봐도 아라파트와 같은 인물은 드물었습니다. 팔레스티나 자치정부라는 주변의 아랍연합국도 하지 못한 일을 무장독립투쟁으로 관철시킨 아랍인에게는 체 게바라와 맞먹는 인물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러로 아라파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지만 물론 테러가 옳은것은 아니지만 PLO의 테러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대해 앞뒤없이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는 미국 정부관료를 주대상으로 제한했습니다. 노벨 평화상이 말은 많은 상이라지만 그 가치를 생각해볼때 상을 받을만한 자격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아라파트가 죽은 이후를 보면 이스라엘의 시각을 쉽게 알아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첫째로 팔레스티나 도시 외곽에 방벽을 만들어 생존권을 침해하며 

두번째로 팔레스타인 도시 주변에 유태인정착촌을 유지하여 군사개입여지를 항상 남겨두고 있고 

마지막으로 황금사원 즉 이슬람의 성지 근방에 대형 유대인 회당 건설을 통해 종교적인 박해 더 나아가 국제법상으로 그 누구의 도시도 아닌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손에 넣겠다는 비약하자면 수도로 삼겠다는 의지 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라파트가 주도했던 평화회담내용은 다 물거품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며 팔레스타인은 서안중심 자치정부와 가자중심 하마스로 나뉘어져 리더쉽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투쟁유도 강경진압의 패턴에 끌려다니고 있지요,


이게 1998년보다 못한 2000년대의 이스라엘 - 팔레스티나의 모습입니다.



5. 유태인 정착촌 문제


라말라,나블루스,베들레헴,가자에서 1~5km 남짓 떨어진 매우 가까운 곳에는 항상 유태인 정착촌이 있습니다. 


모든 팔레스타인 도시 옆에 유태인 정착촌이 나란히 붙어있죠. 정착촌 유태인의 정체는를 본다면 대개 강경파와 정통파 들이 중심이 되어 이주 정착하거나 관여한 부락들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서 팔레스타인들의 도시를 압박하기 위해서 일부러 바로 옆에 유태인부락을 만든겁니다. 


가끔 TV를 보시면 서안도시에서 팔레스타인이 유태인에게 테러를 저질렀고 이에 대응하기위해 이스라엘이 군을 투입했다는 이야기가 종종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착촌에는 항상 1+1으로 이스라엘군이 치안을 이유로 주둔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당연히 검문검색을 실시하죠. 이는 생각해보시면 쉬운 애기입니다, 


옆집에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 불법으로 이주를 했고 내가 집에 들어갈때마다 검문검색을 하며 때로는 집에 못들어가게 창과 문을 모두 막아버리는 것이니 말이지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항의를 하고 시위를 하게 되죠. 이때 바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도시에 투입됩니다. 


유태인 정착촌 보호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대 팔레스타인 기본 정책은 앞서 설명드렸지만 분노유발 -> 봉기 -> 무력진압 인데 유태인정착촌은 여기에서 분노유발과 정당성획득이라는 역할을 맡은겁니다.


유태인 민병대의 공격도 대개 이러한 유태인 정착촌에서 실시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태인 민병대에 대한 저항은 이스라엘 시민에 대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뉴스에 나오며 이스라엘 군의 투입을 정당화하는 빌미가 됩니다.


이러한 유태인 정착촌은 유엔으로부터도 불법이나 생존권 침해등의 이유로 철수할것을 지속적으로 권고를 받고있지만 이에 대하여 그 어떠한 반응조차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6.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독립전쟁시에 유태인들은 유태인들의 국가를 건설 하기 위해 팔레스타인들을 레바논 요르단 등으로 강제이주를 시켰습니다. 


이러한 난민들은 40년대말부터 70년대까지 집중적으로 이주되었는데 현재까지 50~60년동안 코앞에 있는 본국의 땅을 밟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난민수용소가 있는 나라에서도 이동의 자유가 없이 수용소내에서 살아가게 되죠. 때문에 레바논과 요르단등의 수용소는 가자지구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난민들을 다시 팔레스티나에 들어오게 하느냐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가장 큰 쟁점사항 중 하나인데 이스라엘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니 받아들일수 없는 문제입니다. 


난민이 들어오면 현재도 비등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인구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최우선 목표가 '유태인들'의 나라라는 점에서 비 유태인의 증가에 따라 발생할 정체성의 혼란은 이스라엘에 있어 나라를 위협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목표를 바꾸지 않는한 난민들에게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올 날이라는건 앞으로도 요원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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