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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위안시설협회라고 아시나요?
게시물ID : history_73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quinox
추천 : 1
조회수 : 58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23 14:33:15

특수위안시설협회(特殊慰安施設)
RAA(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에 만들어진 연합군(진주군, 정확하게는 점령군) 병사 전용의 매춘부가 있는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 영문 명칭과 한자 이름이 꽤 차이가 많은데, 이는 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에서 갖는 의미와 미군에서 갖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군에서 군 위안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위문공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처음엔 미군도 그렇게 알았다가 실체를 알고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당연히 일본 군사용어에서의 위안은매춘 그 자체를 가리킨다.


협회의 개설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정확하게는 전투정지 발령)로부터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 조만간 해산될 것임에도 아직 군정을 맡을 미군이 진주하지 않아 실질적으로 일본 국내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내무성이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경무보안)국장 통첩"이라는 포고를 각 현에 발령, 이를 근거로 점령군 대책의 일환으로서 위안시설의 설립을 준비할 것을 지시, 26일에 발족했다.


일단 기본적인 발상은 전시 일본의 종군위안부과 같지만, 이 경우는 약간 다르다.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종군위안부 모집처럼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고, "일본 여성을 위한 방파제를 쌓자!"는 슬로건을 내세워서 아예 일반 여성 대상으로 정부가 공개 모집을 한 것이다.
[다만 흔히들 알려진 것처럼 대놓고 성노예화하는 것은 아니었고, 엄격히 따지자면 호스티스로서 모집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는 미군이 대놓고 윤락업소를 만드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당초에는 전문적인 윤락여성 및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게이샤들을 대량 고용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일본인 윤락녀가 종군위안부로 동원되어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가 없었다. 이에 특수위안시설협회는 협회 명의로 <신일본 여성을 구함. 숙소, 의복, 식료 모두 지급> 같은 내용의 공고문을 도쿄 및 미군 진주가 예상되는 주요 도시의 번화가에 설치하는 한편, 신문 광고를 내서 일반 여성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부터 위안부 문제에서 드러난 협잡질이 그대로 재현되는데, 채용 목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광고에 기재되지 않았고, 이를 보고 온 여성 상당수는 윤락업 및 접객업 종사 경험이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은 일의 내용을 듣고 취업을 포기했다. 위안부 문제에 비해 그나마 자국민이라고 강제 납치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당장 생활력이 없는 전쟁과부 입장에서는 마땅히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고, 또한 일본 사창문화 특성상 가족이 딸을 파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탓으로, 결국 1945년 9월 미군 진주를 전후해서 1,300명 남짓한 인원이 협회의 접대부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들은 9월 미군 진주 이후 1946년 1월까지 약 4개월간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영업, 즉 접대 및 매춘에 나섰다.

그런데...

1946년 1월 21일, 전 미국 대통령 영부인 멜레노어 루즈벨트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했다.

"우리 미군 장병들이 해외에 가서 윤락녀들과 놀아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주머니. 원래 미군은 어디 가든 그러는데요?;

사실 이런 업소들은 미군이 주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었지만, 패전국 정부 차원에서 미리 시설을 만들어 미군을 대접한 것은 일본이 유일했다. 루즈벨트 여사가 이 문제에 격분한 것은 본인이 여성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인물인 것과 더불어, 이렇게 정부 차원에서 윤락업소를 운영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던 탓이 컸다. 여기에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의 접대부들 상당수가 일반인이어서 성지식이 부족한데다 공창 또는 사창처럼 엄격한 관리가 이뤄진 것도 아닌, 2차 중심의 업소여서 성병이 만연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의해 결국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시설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병크가 하나 더 터지는데...

정부에서 모집한 주제에, 여성들에게는 아무 보상도 하지 않았던 것.

결국 이때 해산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여성 대다수는 배운 게 이것뿐이라고 결국 기존의 특수위안시설협회 위안소 근처 술집들에 채용, 다시 미군 병사을 상대하게 되었다.(...) 
[웃기는 얘기지만, 이때가 차라리 더 대우가 좋았단다. 협회에 속해 있을 때는 상대 미군에게 개인적으로 받는 팁도 협회에 바쳐야 했지만, 사창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게 개인 소득이 되었다고... orz;;;]

이들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 접대부들이 현대 일본 호스티스의 원조이다.

또한, 이 일과 관련해서 미군은 결국 1947년 1월 15일,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 포츠담명령(포츠담선언 수락에 따라 미군의 명령을 받아 일본 정부가 내리는 행정명령) 중 칙령 제9호 <부녀에게 매음을 시킨 자 등의 처벌에 대한 칙령>이라는 명령을 자그마치 일본 덴노의 이름으로 내리게 만들었다. 이는 성 구매자는 처벌하지 않으면서 성 판매자와 포주를 동시에 처벌하는 현대 일본 사창금지 및 인신매매 금지법의 배경이다

[또한, 이 일과 관련해서 미군은 결국 1947년 1월 15일,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 포츠담명령(포츠담선언 수락에 따라 미군의 명령을 받아 일본 정부가 내리는 행정명령) 중 칙령 제9호 <부녀에게 매음을 시킨 자 등의 처벌에 대한 칙령>이라는 명령을 자그마치 일본 덴노의 이름으로 내리게 만들었다. 이는 성 구매자는 처벌하지 않으면서 성 판매자와 포주를 동시에 처벌하는 현대 일본 사창금지 및 인신매매 금지법의 배경이다.]


엔하에서 이전에 봤다가 문득 생각나서 올리는데 마무리를 못짓겠다!
그냥 링크걸고 이만..
http://mirror.enha.kr/wiki/%ED%8A%B9%EC%88%98%EC%9C%84%EC%95%88%EC%8B%9C%EC%84%A4%ED%98%91%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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