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 약간의 상황적 오해와 착시가 있다 해도 마음의 영역에서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사람은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존재의 근원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살아갈 힘의 최소한의 안정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직장 생활이든 감옥 생활이든, 부자든 빈자든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나 집중을 받는 경험이 적으니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다. 충전기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배터리처럼 내 존재 자체가 계속 방전만 거듭하다 꺼져간다. ...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
누구도 완벽한 행복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상처받는 것도, 상처를 주는 것도, 훼손되는 것도, 엉망이 되는 것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삶은 늘 어느 정도 부서져 있는 것이고, 처치 곤란한 것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통제에 모든 것이 들어올 수는 없고, 완벽하게 유지될 수도, 아름답게 균형잡히기만 할 수도 없다. 늘 어설픈 면이 있고, 실수가 있고, 상처가 있고, 연습 같은 데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부스러기 같은 삶, 완벽할 도리가 없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삶을 살아내는 기술을 이룬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는 완벽한 사랑을 지키려다, 사랑을 통째로 잃은 남여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사랑하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우리는 결혼 첫 날, 처음으로 싸우는군요." 여자가 실망하듯 말하자, 남자는 이런 건 싸움이 아니라며 거부한다. 그런데 원래 삶에 싸움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상처가 없을 수도 없고, 실수가 없을 수도 없다. 삶은 완벽한 관현악 연주일 수는 없다. 단 한 점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음악이 담긴 앨범일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겪고, 상처 받아 울고, 역겨움과 분노에도 휩싸이고, 그러다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다시 한 걸음을 내딛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실수나 실패, 상처나 훼손을 두려워할수록 삶은 완성을 향해가는 게 아니라 뒷걸음질친다. 그 속에서는 나아갈 방법이 없다.
완벽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불완전함 속에서도,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에 한줌의 행복이 허락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관념, 사랑에 대한 기준 같은 것들에 얽매이다보면 그 한줌의 행복조차 허락되지 않고, 손 안을 떠나버린다. 어쩌면 완벽에 집착하는 것은 당신에 대한 사랑, 혹은 내 삶에 대한 사랑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스스로를 견디게 하는 하나의 강박증일 따름일 뿐, 당신과 나를 묶어주지도, 나를 삶 속에 안착하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부서진 대로 받아들이기, 그럼에도 마주잡은 손을 놓지 않기, 그리고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있기 ─ 그래서 관념으로 도피하지 않기, 완벽한 관념 혹은 완전한 균형으로 도망가지 않기. 그것이 삶을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망가진 것 같아 짜증스러울 때, 모든 게 엉망이된 것 같아 절망스러울 때, 이대로 다 끝장을 내야만 할 것 같을 때, 다시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작하고 싶을 때, 다시 한다면 완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을 때, 그렇게 불가능한 관념에 사로잡힐 때,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허망한 관념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에는 부서질 수밖에 없고, 무너질 수밖에 없고, 훼손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무너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다. 그 무너짐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그리고 당신을 붙잡고서는, 다시 살아 마땅한 삶을 그저 살아가는가, 하는 일이다.
꽤 오랫동안 나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꿈꾸었다. 어쩌면 그것은 어린 시절, 모든 사람의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작은 동네 뿐이었고, 그보다 조금 더 컸을 때도 내가 사는 고장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면서는 다른 도시도, 나라도 갈 수 있게 되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 꿈꾸었던 '넓은 세상'은 조금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그 넓은 세상이란, 단순히 비행기를 타거나 걸어서 갈 수 있는 어떤 물리적인 땅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나의 꿈을 펼칠 수 있고, 나의 이름으로, 나의 능력으로 세상과 소통할 어떤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세계를 가리켰을 것이다. 그것을 정확히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갇혀 있는 이 협소한 세계, 이 작은 동네, 이 한정된 경험이 있는 곳이 아닌,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들이 가디라는, 보다 신기하고 자극적이며 화려한 어떤 세계가 있으리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믿었을 것이다.
어떤 만화에서 그런 세계에는 무수한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 신비한 보물들과 다채로운 세계들, 악당들이 저 바다 어딘가, 저 섬들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넓은 세계'란 무엇일까? 아마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는 있을텐데, 하나는 여행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정투쟁을 벌이는 자신의 업계, 그리고 소비생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과연 내가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인 '그 넓은 세계'가 맞는지는 의심스럽기도 하다. 며칠이든 떠났다가 돌아와야 하는 여행이라는 것, 어딘가로 가서 며칠밤을 묵고, 관광지를 구경하고, 맛집을 찾아 맛있는 걸 먹고 사진을 찍는 게 어릴 적 꿈꾸던 그 넓은 세계는 아니지 않은가? 혹은 호텔에서 조식뷔페를 먹고, 고급 사우나에서 목욕을 즐기고, 외제차를 몰면서 해안선 드라이브를 하는 게 그 넓은 세계일까? 아니면 업계에서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야근을 하고, 승진을 하고, 경쟁업체들과 싸워 이기는 것?
어느 쪽도 어릴 적 내가 나서리라 믿었던,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만나기를 원했던 그 넓은 세계 자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어쩌면 이미 흔히 말하는 넓은 세계라는 것을 만나 보았을지도 모른다. 유명 작가들과 북콘서트도 함께 해보았고, 핫한 연예인들과 방송도 나가보았고, 정부부처에 초대받아 장관과 좌담회같은 것도 해보았다. 그밖의 흔한 유명인들과 크고 작은 일들을 같이 해보았는데, 어떻게 보면, '넓은 세상'이라는 것에는 이미 충분히 발을 디뎌보았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런 것들이 내가 꿈꾸는 어떤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 때문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갈 거라고 절규하며 노래부르는 어느 가사의 구절이 이상할 정도로 와 닿지 않았다. 내가 가고자 했던 세계는 어디지? 내가 더 나아갈 '넓은 세상'이라는 게 있을까? 얼마나 더 넓은 곳으로,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지? 이 다음에는 대통령을 만나고, 공중파 백분토론회에 나가면 되나? 아니면 세계적인 학회에서 세계적인 지식인들과 치열한 토론을 하면 될까? 유명한 샐럽이 되어 더 자주 방송국을 돌아다니면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던 것이다 ─ 나는 더 가고 싶은 넓은 세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꿈꾸는 것은 더 작은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세상 같은 것보다는 내가 가꿀 수 있는 작은 정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기억을 쌓아 올릴 수 있는, 아름답고 호젓한 앞마당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넓은 세상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쌓아나갈 수 있는 작은 저녁들이 주어지면 좋겠다. 아이와 매번 계곡을 찾을 수 있는 시간, 아내와 매일같이 걷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고요한 밤, 우리의 추억을 새길 수 있는 거리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시간, 그런 공간을 공고히 얻어낼 수 있다면, 사실 넓은 세상 같은 건 구깃구깃 접어서 얼마든지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넓은 세상을 원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런 시간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넓은 세상에도 발 하나를 디딜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원하는 시간의 현실적인 조건, 안정적인 기반을 위해 별 수 없이 넓은 세상을 버릴 수는 없달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어릴 때 꾸던 꿈이라는 게 사실 그다지 신뢰할 건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꿈도 제대로 꾸려면 시간이 걸리는구나, 꿈을 제대로 알아가는 일도 꽤나 중요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야 제대로 꿈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