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셀프힐링을 위해서는 꼭 봐야 한다는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이라 안 볼 수가 없었다. ‘레미제라블’은 뉴욕에 있었을 때 꼭 보려고 했던 뮤지컬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린 상태였다. 할 수 없이 10주년 기념 공식 CD를 사서 계속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뮤지컬에서는 총 49곡이 나오는데 영화를 위해서 새로 작곡된 몇몇 스코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뮤지컬의 원곡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친숙한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이 영화와 한국의 정치상황을 연결 짓는 내용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무장봉기 장면에서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 (배경이 된 사건이 6월 봉기라) 1987년의 6월 항쟁이 상기된다는 식이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을 한국의 정치상황에 그대로 대입해서 재조명한다는 것이 사실 말이 안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스러운 현실을 극복해보려는 것이기에 공감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터넷에 관련된 정보가 차고도 넘쳐나지만 그런 것을 하나하나 다 읽어볼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영화의 중반부터 마지막까지 주된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The June Rebellion, or the Paris Uprising of 1832)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자. 이 나라에서 살려면 이제 프랑스 혁명사까지 공부해야 할 판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부터 1871년 파리코뮌까지 거의 10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는 왕정의 타파, 제정의 등장, 왕정의 복귀, 입헌군주제의 도입 등이 매우 혼란스럽게 이어지던 시기였다. 왕당파, 공화파 등 여러 정치세력들이 툭하면 무장봉기를 일으켜 파리 시내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싸우던 격변의 시기이기도 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부르봉 왕가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13년간 실시되지만 공화정은 바로 나폴레옹의 제정(1795~1815)으로 대치된다. 나폴레옹의 제정이 끝난 후에는 역사적인 반동이 일어나서 이미 쫓겨났던 부르봉 왕가가 다시 복귀해 프랑스를 통치하게 된다.(1815~1830) 이렇게 복귀한 부르봉 왕가의 두 번째 왕 샤를 10세를 퇴위시키는 것이 ‘1830년 7월 봉기’다.(이 7월 봉기를 묘사한 것이 들라크루와의 그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와는 실제 1830년 7월 봉기에 참여해 현장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7월 봉기는 부르주아, 공화파, 노동자, 학생, 오를레앙파 등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연합해서 일으켰는데 부르봉 왕가를 이을 정치체제를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하기로 하고 프랑스 하원에서 루이 필립을 시민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이 루이 필립의 통치를 오를레앙 왕정(1830~1848)이라고 한다.
그런데 새롭게 추대된 루이 필립이 부르주아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다른 봉기 세력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7월 봉기가 있은 후 2년 만에 공화파와 학생 세력이 주축이 된 반란이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1832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1박2일 동안 일어난 ‘1832년 6월 봉기’다.
모든 정치적인 봉기 뒤에는 경제적인 상황이 내재되어 있는데 1827~1832년 사이에 프랑스의 경제적인 상황은 만성적인 흉작, 식량부족, 인플레이션 등으로 극도로 나빠진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봉기가 일어나던 해 봄에는 전 유럽을 강타한 콜레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여 민심이 무척 뒤숭숭했다. 이 콜레라의 희생자에는 1815년 방데에서 왕당파를 진압하고 국제 공화주의 운동을 지지해서 공화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라마르크 장군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장례식이 바로 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이다.
공화파는 2년 전의 7월 봉기와 같은 무장봉기를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거사일을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일로 잡았다. 당시 공화파의 많은 행동대 중에서 제일 활발했던 것은 ‘인권회’(the Society for the Rights of Man)였다. 무장봉기를 모색하는 단체였으므로 거의 준 군사조직처럼 운영이 되었다. 영화에서 봉기를 주도하는 것으로 나오는 마리우스(Marius)와 앙졸라(Engjolras)가 소속한 곳은 ‘민중의 친구들’(the Friends of the ABC)인데 이것은 실제로 존재했던 조직은 아니고 빅토르 위고가 만들어 낸 가상의 조직이다. 어쨌든 이 조직은 실제로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인권회’의 하부조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잠깐 여담을 하자면 영화와 원작 소설에서 다른 부분이 한 가지 있다. 마리우스와 앙졸라는 마치 같은 혁명적 이상을 공유하는 둘도 없는 절친처럼 영화에 나오는데 원작에서는 상반된 정치적 노선을 걷는 것으로 묘사된다. 앙졸라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고 마리우스는 나폴레옹의 복귀를 꿈꾸던 보나파르티스트로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바리케이드가 함락될 때 앙졸라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살 당하지만 마리우스는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코제트와 연애할 것 다하고 다른 동료들은 다 죽지만 장발장에 의해서 결국 목숨을 부지한다. 위고가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것을 감안할 때 마리우스에 (연민은 가지고 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봉기 당일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행렬이 파리 시내를 천천히 이동하는 가운데 봉기를 준비한 공화주의자들은 장례행렬을 자연스럽게 현재 바스티유 오페라가 있는 the Place de la Bastille로 인도한다. 이곳은 매우 상징적인 장소로 2년 전에 있었던 1830년 7월 봉기 기념탑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그곳에는 이미 약속된 대로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에서 왕정의 탄압을 피해 망명해온 국제 공화주의자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죽은 라마르크 장군이 생전에 국제공화주의자들을 지지했던 것을 상기시키는 격정적인 연설을 시작한다. 이 연설을 들은 청중들은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자유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합창하게 된다. 바로 이때 왕이 보낸 프랑스 국방군(the National Guards)이 발포를 시작하고 무장하고 있던 공화주의자들도 바로 반격을 가하게 된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서 파리 동부 지역 일대가 전장으로 변했다. 봉기의 수준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왕은 국방군 2만5천명을 급파해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공화파 무장봉기 세력은 자신들의 예상과 달리 파리 시민들이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자 지금의 생 메리 성당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후까지 항전을 한다. 하지만 전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였기 때문에 하룻밤 만에 항전은 종결되고 만다.
봉기세력이 전력 상으로는 절대열세였지만 사실 사상자의 수로만 보면 거의 비등한 전투였다. 국방군은 전사자 73명에 부상자 344명이었고 공화주의자들은 전사자 93명에 부상자 291명이 발생했다. 그만큼 봉기세력이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화파의 무장봉기는 결국 완전히 진압되었고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이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이렇다 할 봉기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출간하는데 까지는 거의 2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원작을 보신 분들을 알겠지만 총 5권으로 구성된 1500페이지짜리 대하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1862년에 출판되었는데 빅토르 위고는 그 준비기간 내내 프랑스 왕정의 탄압을 피해 도망 다니던 망명객의 신분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6월 봉기가 발생했을 때 그 인근에서 희곡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들려온 총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총소리의 진원지로 발길을 옮긴 그의 눈에 사살당한 젊은 공화주의자들의 시체들이 들어왔다. 마치 1980년 봄의 광주항쟁 다시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들이 다 사살당한 뒤에 도청건물을 둘러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신도 철저한 공화주의자였기에 희생당한 공화주의자들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오월의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경험이 훗날 [레미제라블]이라는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고 보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울려퍼지는 '그대들에게는 민중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라는 노래가 어떤 역사적인 함의를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프랑스도 진정한 공화체제를 수립하는데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로 했다. 그 기간에 무수한 격변과 혼란이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이런 역사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아직 포기하고 좌절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점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써낸 것은 6월 봉기가 있고 30년 만이었다. 비유하자면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책이 2010년에 출간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뭐가 하나 이뤄지려면 이런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러니 근혜 누나의 5년에 미리부터 너무 좌절하지 말자.
(사족1)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원래 제목이 [가난한 자들]( Les Misere)이었다. 이것을 [Les Miserables]로 고치는데 이것을 '비참한 사람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당시 상황에서 '소외당한 (모든) 사람들'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사족2) 엥겔스의 '6월 혁명-파리봉기의 경과'라는 글에서 말하는 6월 혁명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화파의 무장봉기를 의미한다. 그는 1848년 2월 혁명을 앞두고 1830년 6월 봉기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그 글을 썼다.<페친 김정호님의 글을 옮김>
출처: http://blog.naver.com/zskmc?Redirect=Log&logNo=90160786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