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무명논객
필자는 공적 영역을 확장해야 하며, 또한 그러한 '행위'는 끊임 없이 '획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시게 채팅방 친목 논란에 부쳐, 이것을 약간의 담론으로써 구조화시키자면 나는 바로 제목과 같은 '존중'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적 영역'이며, 친목 행위는 철저히 사적인 행위이므로 이러한 공적 영역을 파괴한다는 것이 친목금지의 주요한 논거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여다볼 수 있는 문제의 틀은 어떻게 될까? 나는 이 문제가 해체의 대상이라고 바라보는 바, 심심한 김에 이 글을 통해 한번 논지를 전개해볼까 한다.
오늘날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은 쉽지 않다. 가령 페이스북은 사적 공간인가 공적 공간인가? 하물며, 공론의 장이어야 한다는 대의 기구인 의회조차 의원들의 사적 이익이 관철되는 현장으로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단적으로, 우리는 공적 영역을 잃어가고 있다. 정확히는 붕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적 영역이 붕괴되는만큼, 우리는 공적 영역에 관련되는 토론과 의제를 발의할 공간이 더더욱 필요하다는 욕망을 자극받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오유 시게가 그 동안 그러한 공적 영역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한다.(담론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시사채팅방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채팅방은 있었고,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시사 채팅방의 개설된 주 목적은, 게시글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실시간 토론의 요구가 있었으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보고자 만들어졌다. 내 경험적 주관이지만 시사채팅방에서 소위 '사담'이라 불리우는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토의' 내지 '토론'이라 불리워도 될만한 내용들이었다. 필자 같은 경우엔 필자의 글에 대한 주석과 설명을 채팅방에서 종종 하고는 했다.
맹점은 여기서 유발된다. 시사채팅방에서 친목이 있었다는 자들의 주장은 대부분 "사담이 있었다"라는 것인데, 물론 사담은 있었다. 사담이 아예 없었다면 그건 사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로그를 눈여겨보자.(아래에서 위로 읽으시라.)
위의 대화 내용은 과연 사담인가, 공적 토론인가? 이게 시사채팅방의 평소 모습이다. 누군가 알아서 발제를 하고, 거기에 대한 토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종종 실없는 농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차라리 부차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화의 형식이 아니라, 대화의 내용이다.
굳이 하버마스를 인용할 것도 없이, '공론장'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면 시사채팅방이 존재할 하등의 이유도 없을 것이지만, 저런 대화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시사채팅방이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못한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은가? 혹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친목을 유도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듯 한데, 내 생각은 다르다. 서로 으르렁 대는 분위기에서 제대로 토론이 오가겠는가? '나와 이념적 노선이 다르다'라는 이유로 적대하는 행위야말로 공론장에는 해악이다. 웃긴 얘기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리버럴, 좌파, 심지어 우파적 주장들(우파적 주장이라고 할 것이 사실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베충이였으니까..)도 같이 공존하였다. 그 와중 싸움이 있었으면 있었지, 결코 오유인들 대다수가 생각할 법한 그러한 '친목 행위'는 없었다. 오히려, 싸움이 더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야말로 친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쪽으로 넘어간다. 공적 영역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공적 영역을 파괴하려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나르시스트들이다.
나르시시즘이 왜, 어떻게 공론장을 파괴하는가? 나르시시즘이 공론장의 적이 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허구의 관념, 그것도 정체가 불분명한 모호한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상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자신의 리비도를 투사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상정한 극단적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생기게 되면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이 행위는 구체적으로,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객체로 전락시켜버린다. 이성의 공적 사용보다는, 자신과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 이미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란을 정념으로 분출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들을 "정념전사"라고 지칭한다.
공론장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적 행위다. 바꿔 말해, 타자성의 존중이다. 타자성이 결여된 곳은 공론장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시사채팅방이 공론장으로서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였는가? 내가 볼 때, 이 문제는 상당히 '과열'되어 있다.(내가 친목 종자로 몰려서 빡친 것도 한 몫했다.)
여하간,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친목논란의 중심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공적 영역을 존중하는 법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반성이 필요한 지점도 분명히 있으며, 나아가 충분히 개선될 여지 역시 있다. 그러나 단편적 증거들로 문제를 포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난 반대한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