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 난 이후 이어진 오호십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는 우리에겐 그다지 중요한 시대로 보진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특히나 북위의 경우 수와 당을 설명할때 반드시 북위를 설명해야만 하죠.
북위는 선비족이 주류가 된 국가죠. 북위가 성립하면서 인근의 후연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고,
따라서 후연의 모용수는 탁발부 선비들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항상 그들과 싸웠지만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후연이 대패한 이후 북위는 대세력으로 성장하고 태무제 시기에는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 전역을 통일합니다.
그런데 이 북위의 계승제도 중 다른 국가에서 볼수 없는 특이한 제도가 세가지 있습니다.
부락해산, 조기감국, 자귀모사
부락해산은 이미 북위의 태조인 도무제가 중국 전통의 국가체제를 채용하면서 주요 부족을 해산시켜 황제권력을 강화해갑니다.
그리고 한족 출신 인사들을 주요 공직에 등용시키면서 점차 귀족화가 자리잡아 가죠.
조기감국은 황제의 후계자인 황태자를 조기에 선정해 감국, 즉 일부 실권을 나눠주어 태자의 권위를 강화한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괴랄한 제도는 바로 마지막 자귀모사(子貴母死)제도였습니다.
자귀모사(子貴母死), 아들이 귀해지면 모친을 죽인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귀모사 제도는 황제의 자식들 중 후계자가 결정되면 그 후계자를 낳은 어머니를 죽이거나 자살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모후와 외척이 득세해 황제 권력을 등에업고 이후에는 아예 외척이 황제를 이리저리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귀모사 제도로 황제의 생모를 죽이고 더이상 외척이 날뛰지 못하게 막으려는 거였죠.
실제로 도무선목황후 유씨부터 시작해서 후계 황제들을 낳은 황후들은 구제(舊制) 또는 구법(舊法)에 따라 죽였다는 기록이 숱하게 나옵니다.
이런 자귀모사 제도가 유독 북위에서 심하게 나타난 이유는 북위의 성립과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탁발부가 북위를 세우기 전 315년 탁발선비 족장인 탁발의로는 서진에게 대나라 왕이 됩니다. 이 대나라는 탁발십익건 시대에 전진의 부견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고 탁발십익건은 도망치다가 아래의 각 부가 반란을 일으켰고, 서장자였던 탁발식이 십익건을 죽이면서 대나라는 멸망했죠.
그 손자인 탁발규는 모족인 하란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고부의 여인을 비로 맞아들여 선비의 2강인 하란과 독고부의 도움을 받아 대나라를 재건하고 후연과의 전쟁을 통해 북위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탁발규가 도무제가 되어 북위의 황제가 된 이후, 하란부와 독고부의 세력이 신경쓰이게 됩니다. 만일 태자였던 탁발사가 황제가 되면 독고부는 외척이 되고, 황후 역시 자신의 출신 종족인 독고부의 정계진출에 관여해 황제권력이 추락할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부락해체와 바로 자귀모사 제도였죠. 자귀모사 제도는 512년 북위 선무제 13년에 철폐됩니다.
그런데..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냐구요? 친모를 죽여가면서 황제권력을 키우려했던 도무제의 생각과는 달리, 자귀모사 제도는 이상한 상황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자, 생모를 죽였습니다. 물론 태자의 반발이 있었겠죠. 도무제가 어머니를 죽인 것을 안 탁발사는 며칠에 걸쳐 통곡만 해댑니다. 도무제는 그런 아들을 설득하려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죠. 결국 도무제는 탁발사를 죽이려는 생각까지 합니다. 이것을 전해들은 탁발사는 도망쳐 숨어버렸죠. 결국 도무제는 아들 중 탁발소를 태자로 새로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탁발소의 어머니는 유력부족이었던 하란부 출신 하 부인이었습니다. 유폐된 탁발소의 어머니 하부인은 아들인 탁발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고, 아들인 탁발소는 휘하의 사람을 모아 궁으로 쳐들어가 도무제를 살해합니다. 아버지인 도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사는 바로 군사를 휘몰아가 탁발소를 죽이고 제위를 되찾습니다. 바로 명원제죠.
자귀모사 제도로 인해 이런 상황이 왔지만, 명원제는 아버지가 세운 자귀모사 제도를 폐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강력하게 실행합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자귀모사 제도는 북위 선무제가 없애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실행됩니다. 이후 북위의 후궁은 점차 한족 여인들이 차지하게 되죠. 한족의 명족(이름난 집안)출신들이 관료들이 들어서면서 북위 후궁 역시 한족여인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후궁들은 명족출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자귀모사 제도가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외척의 정치개입이 없을거라는 도무제의 의도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먼저 어린나이로 태자를 세우는 조기감국의 경우, 백관들이 황제당과 태자당으로 나뉘어 분쟁을 벌이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후계자로 지명된 아들이 죽었을 경우, 그 모친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괜히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자귀모사로 인해 사망한 모친과는 달리 생모를 잃은 태자를 양육하기 위해서 후궁이나 황후가 이 태자를 보모로서 양육해줍니다. 그리고 이 태자가 즉위해 황제가 되는 순간, 이 보모는 보태후로 모시거나 혹은 황태후로 모시게 되면서 이 보태후의 친족들이 중앙 정계로 나아가는 상황이 벌어지죠. 그리고 이 보태후들은 오히려 황제 못지 않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는데, 북위 문성제의 황후이자 헌문제, 효문제 재위당시 태황태후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문명태황태후 풍씨가 좋은 예입니다.
출처 : http://pgr21.com/?b=8&n=4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