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교는 피로 물들었다. 함수갑판 중갑판 함미갑판 어디건 전사자와 중상자들이 뒹굴었다. 주포인 3인치 포신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함체는 이미 크게 기울었다. 피투성이 함장과 포술관은 고통에 찡그리면서도 고함을 질러댔다. “위치를 사수하라!” … “쏴라! 연막탄이건 뭐건 다 쏴라!” 한낮이었다. 태양이 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바다엔 풍랑도 별로 없었다. 그 멀쩡한 시간, 대한민국 해군 56함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강원도 금강산이 보이는 어로저지선 인근 해상이었다. 1967년 1월19일, 정확히 오후 2시34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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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는 무슨 일이?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했다. 침몰원인은 분명했다. 북한의 해안포 직격탄을 맞은 것이었다. 명태 잡이 어선들의 어로저지선 월선(越線)을 저지하고 북한 함선의 납치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작전 중이던 56함은 이날 북한의 122mm 해안포 8발을 정면으로 맞았다. 해군 56함, ‘당포’호는 그 전해 12월28일 진해기지를 출항했다. 동해 해상 휴전선 인근 명태어장에서 어로보호 임무를 하고 1월15일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명태 어획은 기대에 못 미쳤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출어일수가 줄어 평년 어획량 6,600톤보다 1,000톤이나 감소했다. 11월1일부터 3만3천여 척의 배가 나선 걸 감안하면 형편없는 실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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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 56함 북괴 피격침몰 1967. 1. 20 [동아일보]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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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은 어로저지선 인근 명태 잡이를 1월 말까지 15일간 연장했다. 설마 이것이 56함의 최후를 불러오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작전기간이 연장된데 대해 승조원들도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적전(敵前) 해상근무의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기대 어획고를 올리지 못한 어선들이 고기떼를 따라 북상, 해상 휴전선을 넘나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날도 어선 수백 척이 명태 어장에 몰렸다. 날도 청명했다. 부진했던 실적을 만회하려고 어선들은 필사적이었다. 70여 척이 어로저지선을 지그재그로 넘어 들어갔다. 56함은 이들에게 경고방송을 하며 남쪽으로 선수를 틀도록 유도했다. 그러던 오후 1시 반, 수원단(水源端·북한 장전항 인근 해안 돌출부) 동방 6마일에 북한 경비정 2척이 나타나 선단 쪽으로 접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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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보낸 마지막 신호에는 긴박함이..
사건 경위 해군 발표 1967. 1. 20 [동아일보] 2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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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꼭 30분 후인 오후 2시. 56함은 “본 함, 육상 포와 교전 중”이란 긴급무전을 보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56함이 보낸 마지막 신호였다. 56함은 북한 함정이 명태선단에 접근하자 이를 어선 납치 기도로 보았다. 함장은 즉각 “우리 어선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한 함을 막고 어선들을 더 북상 못하게 추스르며 내려 보내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해안 절벽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대함포가 발사된 것이었다. 북한의 수원단 포대는 ‘나바론의 요새’처럼 위장돼 있었다. 절벽 속에 동굴을 파고 레일을 놓아 포를 갑자기 돌출시켜 바다 위 목표물을 타격하게 돼있었다. 물론 동해 경비에 나선 우리 해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느닷없이 표적사격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물기둥이 치솟자 함장은 ‘전투배치’를 발령하고 엔진을 모두 가동, 전속력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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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기관실에 포탄이 날아들었다. “기관실 맞았습니다, 감속 기어 파손…”이란 보고와 “탄약고 불 붙었습니다.”란 보고가 동시에 함교로 전달됐다. 그리고 이어 전부기관실에 또 한 방을 맞았다. 첫 번째 포탄을 맞고도 표적에서 벗어나려고 지그재그로 달리던 배가 뚝 멈췄다. 수병들은 3인치와 40mm 기관포에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적 포대를 향해 포를 쐈다. 사정(射程) 시야를 가리려고 연막탄도 터트렸다.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배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생존자들은 나중에 그 상황을 생생히 전했다. 박태만 중위는 파편에 끔찍한 부상을 당하고도 수병들을 독려하며 연신 “쏴라!”고 외쳐댔다. 연막탄까지 남김없이 쏘라고 지시한 것도 그다. 나중에 퇴함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는 포대 옆 벽에 머리를 숙인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끝까지 지휘하다 앉은 자세로 전사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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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무 중위는 통신실이 포격으로 부서지자 비상통신실로 달려가다 작렬하는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포탄에 다리가 떨어져 나간 하사관, 복부에 파편을 맞아 장이 쏟아져 나온 수병, 몸 가득 파편이 박힌 장교들이 갑판 여기저기서 신음했다. 기관실을 복구하러 들어간 기관장은 배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함장에게 “침수 중입니다. 퇴함해야 합니다.”고 소리쳤다. 이때 북한의 해안포는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나 56함이 구명정을 내리는 순간 다시 포격을 개시했다. 처음 준비한 포탄을 다 쏘고 새로 장전한 모양이었다. 해군은 그날 북한이 56함을 향해 286발을 쏘았다고 밝혔다. 북한 해안포대가 포격을 완전히 멈췄을 때 배는 절반 이상 가라앉아 있었다. 함수 앵커 부분에 몰려있던 장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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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호의 최후..필사의 교전 40분 1967. 1. 25 [경향신문]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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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장 김승배 중령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부상한 수병에게 입혀 구명정에 태운 뒤 마지막으로 생존자가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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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함과 함께 영원히 귀대하지 못한 대원들
수병들의 군인정신도 투철했다. 전탐 근무자 정완섭 병장은 극비서류인 21MC 전탐일지를 허리띠 아래에 묶은 뒤 바다에 뛰어들어 53함에 구조됐다. 암호사 김영석 하사는 전 해군 공용 암호 문건을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함께 수장시켰다. 가지고 탈출하다 적에 잡히기라도 하면 암호가 누출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구명정에 탔거나 바다에 뛰어내린 51명이 달려온 해군함정에 구조됐다. 그러나 그중 11명은 이미 숨진 채였거나 구조 직후 숨을 거뒀다. 작전관 포술관 등 장교 2명을 포함해 28명은 침몰한 배와 함께 수심 200m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애초 출항한 진해기지로 영원히 귀대하지 못했다. 그들이 제 몸보다 아끼던 애함 56함과 함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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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함교...56함의 투혼 1967. 1. 21 [동아일보]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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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감위조사 거부 1967. 1. 21 [동아일보]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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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의 입장은 단호했다. “56함은 아무런 적의와 도발행위 없이 한국어선단을 남쪽으로 인도하는 중이었는데 북이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이는 엄연한 휴전협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측은 이를 부인했다. “56함이 휴전선 북측 연안을 침범했고 격침은 자위행위”였다는 것이다. 또 56함이 먼저 함포사격을 해왔으며 침몰 전후해 유엔 측 비행기와 함선이 북한의 영해와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정전위에서의 양측 입씨름은 똑같은 방식으로 지루하게 지속됐다. 유엔군은 ‘공동조사’를 다그쳤고 북측은 56함의 월선과 자위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는 사이 정부는 공언했던 ‘모종의 응징책’의 1단계 조처 내용을 발표했다. 1)북의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고 2)우리 어선의 북상 어로를 금지하며 3)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만행을 응징하는 대책을 세우면서 4)대형 함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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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8도39분45초, 동경 128도26분48초
침몰 6일째인 25일 어로저지선 근해에서 포탄 파편으로 헤지고 얼룩진 25인승 구명보트를 어선들이 발견해 속초로 예인했다. 56함의 좌현에 실렸다 침몰 후 떠오른 것이었다. 바다 속 56함이 수면 위로 보낸 단 하나의 유품이었다. 유엔군과 한국 해군 공군들은 사고해역에서 몇 날 며칠을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승조원 시신은 물론, 56함으로부터 나온 어떤 부유물도 찾지 못했다. 북측은 이들이 휴전선을 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월27일 오후 2시 ‘당포’함 전몰장병 영결식이 진해 한국함대 사령부에서 열렸다. 박태만 이승무 중위에겐 충무무공훈장이, 김경수 상사 등 37명에겐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전사자들은 또 모두 1계급 특진 추서됐다. 이튿날인 28일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39위, 장병들의 국립묘지 안장식이 현충원 해군묘역에서 열렸다. 유해조차 못 찾은 28 장병들은 유품만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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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함 전몰 장병 국립묘지에 안장 1967. 1. 28 [동아일보]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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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9일, 국방부는 해상 어로보호임무를 내무부와 농림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경비함들이 민간어로 보호 임무를 하느라 본연의 군사임무에 소홀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날 주문진 양양 속초 고성의 어민들이 모여 동해 최북단 거진항 뒷동산에 56함 충혼탑을 세우기로 의결했다. 56함이 피처럼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침몰하는 모습을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봤던 바로 그 장소였다. 4월27일. 해군은 56함을 대체할 고속 경비정(PCE) 1척과 초계호위함(PGMI) 1척을 미국으로부터 인수했다. 그날은 또 56함 격침 현장 인근 해역 DD 91함 함상에서 전몰장병 진혼제가 열린 날이었다. 침몰 직후 정부가 호언했던 ‘응분의 대가’ ‘모종의 중대 조치’는 별도로 지면에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초 해군에 입대한 장병들은 훈련조교들로부터 “56함의 복수를 위해 UDT대원들이 북한 00항에 야간 침투, 쑥대밭을 만들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확인되지도 않고 보도되지도 않은 얘기였다. 56함 참사는 1월 말까지는 그래도 언론에 보도됐으나 2월 들어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67년 말 어로저지선에서 조업하던 어선 39척과 어부 340여명이 납북됐을 때, 또 이듬해 해군 방송선이 납북됐을 때 56함의 기억이 다시 국민에게 살아났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지금도 동해바다 북위 38도39분45초, 동경 128도26분48초 해저에는 56함이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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