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고정시킨다?
내가 만약에 어떤 여자에 대해서 '정의'를 내렸다고 해보자.
이게 무슨 말일까?
정의를 내린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정의의 정의는 어떻게 되는가?
정의 (definition)
어떤 사물이나 단어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개소리 지랄하고 있다.
그러면 사물이나 단어의 뜻을 명백히 밝힌다는 것은 뭐 어떤 것을 시도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며,
'규정'이라는 것은 어떻게 했기에 가능하다는 것인가?
구체적인 조작법 없는 막연한 설명은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다.
나는 단 한번도, 어떻게 무엇을 조작하고 동작으로 하여 정의를 해야되는지, 배워본 적이 없다.
그냥 저런 단어만 봤을 뿐이다. 명백히 밝히려는 주체는 누구인가? 사전의 치명적인 단점은 서술자를 생략하고 있다는 것이며, 분류기준을 명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눈가리고 아웅 해서 내 말이 맞다고 제시해둔다.
그러나 이에 한해서 분명한 문제가 있다.
심리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하는 뜻은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저 사전 이전에 '인식절차'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정의하는 것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타인이 정의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걔는 뭘로 정의했는가?
걔는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정의'라는 게 가능했냔 말이다.
원점으로 돌려보자
결국 끝까지 쫓아가면, 누군가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일파만파 퍼지는 것이다.
그러면 뭘 했냔 말이다.
좀 알아먹게 말해보란 말이다.
3가지만 말해보려고 한다.
1. 정의가 있다는 얘기는,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계기나 입력이 있었던 얘기이고,
2. 그 입력에 의해서 저장된 것이 있었다는 것이며,
3. 그 입력되어 저장된 것이 튀어나왔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의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심리의 문제다. 기억이 되냐 안되냐에 따라서, 당신이 정의할 수 있냐 없냐가 결정된다
물론 당신이 기억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정의할 수 있으려면, 당신은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어떤 것에 대해서 정의를 할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만약 당신이 찰나에 기억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라면 "정의하자!"라고 해놓고, 갑자기 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옆 사람이 잡고 흔든다. "야 정의하자며!" 그러면 당신이 말한다. "뭐야 임마. 왜 흔들고 난리야."
예를 들기 위해,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
그냥 초 단순하게, 사과란 먹는 것이고 껍질이 있고 빨간것이다, 라고 정의했다고 해보자.
여기서 내가 묻고싶은 것은, 사과가 뭐냐는 정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의가 어떻게 되었느냐를 묻고 싶은 것이다.
정의를 내리는 '절차'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게 당연히 물어져야 할 질문 아닌가?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이걸 물어보는 인간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래놓고 안다고 깝친다. 그래놓고 지적하면 왜 지적하냐고 정색을 한다. 미치고 뛸 노릇이다.
누군가가 말한다
사과란 먹는 것이고, 껍질이 있고 빨간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면
물어보라.
너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정의할 수 있게 되었느냐고
그러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내가 사과를 보았을 때, 껍질이 있어서 깎았었고, 껍질 색이 빨간색이었고, 먹었었는데, 뭐 더 필요한 거 있나?"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보자.
당신은 유식무경이 뭔지 아는가? 안다면 아는 것이고, 모른다면 왜 모르는지 생각해보라.
모른다고 가정해서 말해본다.
내가 왜 당신이 모르는지 추측해보면 이런 절차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사과 하면 찰나에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기호로 번역하면 이름으로는' 사과'가 되고, 술어로는 빨간색, 먹는 것'이 번역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알고 모르고를 결정짓는건, 찰나에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는가? 이 문제다.
떠오르면 번역만 하면 된다. 테두리를 지칭하면 이름이 되고, 미세한 자질들을 지칭하면 성질들이 된다. 종종 움직이는 바를 지칭하면 동작이나 작용이 된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테두리를 촉했어야 하고, 미세한 자질들을 각각 촉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은 촉한 게 있으니, 그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고,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말로 번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가?
당신이 본적도 없고, 그래서 떠올려지지도 않는데, 당신이 말로 번역할 거리라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이 절차가 맞다면, 당신은 떠올리지 못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게 맞다.
당신은 지금 남극을 떠올린 적 없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남극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떠올리지 못하는 수많은 것을 생각해보라. 말은 떠올라야 번역되어 나온다. 말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말은 이미지가 전제된 것이다.
말은 이미지와 역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토대'를 거치면서 인식절차/작용을 거쳐서 얻게 되는 것이며, (찰나에) 그리고 이를 말로 번역시켜서 역전적 고리를 두어 지속적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유식무경 하면 떠오르는 게 있는가? 없을 거다.
만약 떠올랐다면, 당신은 불교서적을 하나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이 그 불교서적과 연관된 경험들이 떠올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생소한 단어를 언급해보자.
당신은 '클루지'란 말이 뭔지 아는가? 아마 안다면 그걸 떠올렸을 것이고, 모른다면 뭔지 떠올릴 것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사띠가 뭔지 아는가? 안다면 당신은 익숙하단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모른다면 이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다면 찰나에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당신이 그 이미지를 떠올렸을 수 있었다면, 그것을 번역하는 순간 이름과 술어가 튀어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가 없다면 당신은 번역할 것도 없다.
얼마 된건 아니지만
전에 '생각한다 함은 생각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여러 댓글들이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대답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답정너로 쓴 글은 아니다만, 나는 최소한 이렇게 의문을 걸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의문을 표해본다.
1. 생각한다'라는 단어는 동사다. 동사는 동작이다. 그렇다 하면 구체적인 동작이 지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각한다 라는 단어에는 구체적인 동작이 무엇인지 알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한다 란 표현으로는 생각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2. 생각한다'라는 단어는 총칭된 표현이다. 부분/절차 표현이 아니란 얘기다. 그리하여 생각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것으로 이뤄지는지 알 수가 없다. 표현되는 바는 분명치 않다.
종종 사전에, 헤아린다, 인식한다, 판단한다, 등을 생각한다 라고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생각한다 란 표현을 보면 '생각'이 되는가? 나는 안되는 것 같다. 당신은 된다고 생각된다면, 그 생각이 어떻게 되는지 좀 써보라.
나는 명확하지 않다고 본다.
나는 자문해본다.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내가 배워본 적 있는가? 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최근에 연구된 서적들이 이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코니코바가 쓴 책도 그렇고, 셸리카슨이 쓴 책도 이를 보여준다.
생각하다 라는 동작에 대해서, 어떤 동작인지, 어떤 순서로 되어있는지, 어떤 구체적인 부분으로 되어있는지,
그래서 마치 조이스틱처럼, 어떻게 어떤식으로 조작해야 생각이 일어나서 생각이 결과를 내는지, 아는 이를 이렇게 배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다'라는 표현으로는 '생각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본다.'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생각한다 함은 생각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다. 생각함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마무리지으면
언어의 유희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유희하자고 하는 게 아니다. 생각한다 함은 생각이 아니라고 할 때,
그럼 어떻게 해야되겠는가?
생각에 대해서 써야되지 않겠는가?
정말로, 구체적인 동작, 절차에 대해서 써야되지 않겠냔 말이다.
나는 이런 걸 필요로 한다.
그냥 생각쓰는 건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쓰지 않는다면,
매번 사적인 견해만 짓껄이고 말 것이다.
당신에게 좀 충격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일x충은 애국주의자다.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했다.
당신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물어보려고 한다.
'일x'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당신은 무슨 대답을 할 것이다. 한번 대답을 해보자.
그리고 다음 질문을 다시 보라.
왜 그게 떠올랐는가?
그리고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력된 것인가?
나는 당신에게 주의를 요한다.
정의라는 것은 정의내림이 아니다.
정의내리는 작용을 절차로 분석하면,
당신이 입력시켰던 그 순간의 그것을, 당신이 다시 꺼내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의한다는 것은 규명하는 게 아니라, 그것은 탐구작업이고,
정의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입력되었던 것을 당신이 다시 꺼내어서 복제해놓는다는 것이다.
왜?
당신은 분명 입력시킨 것만을 꺼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력했는가?
물론 이 토대와 작용을 따지면 눈코귀입몸-마음 이렇게 잡고, 색성향미촉법- 이런식으로 다시 연결시켜서 연산을 일으키면 된다.
그 중에 하나하나 스파크가 터지는 것이, 당신이 입력한 것들이다.
가령 어떤 어떤 여자가 치마를 입고 있는데 넘어졌다. 그래서 허벅지 속살이 보였다.
내가 방금 이렇게 쓴 것은, 방금 내가 주의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도 마찬가지다. 이 언어라는 것은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을 옮겨넣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이미지는 말로 번역된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일x'하면 떠오르는 그것은, 언제 어디서 입력했던 것인가? 누가 입력했는가? 당신이 했는가? 타인이 했는가? 정밀하게 따져본 적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일x에 대해서 '안좋다'라고 느끼고 있었다면,
분명 당신은 그것을 본 적이 있고, 들은 적이 있고, 그에 대해서 '느낀' 적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일x'하는 순간 바로 특정 이미지가 떠올랐을 것이고 (연상되는 것이다. 일x->당신이 입력했던 이미지)
그 순간 발언을 할 때 주변을 살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발언하는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이 순간에 떠올렸던 이미지를 번역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묻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잘난척하거나, 자부심 가지거나,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인식절차를 묻는 것이다.
당신의 토대와 당신에게 닥친 대상의 연산에 대해서 말해보라.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무엇이 감촉되었는가?
뭐가 있었기에 당신에게 입력되었던 것이고, 당신 입력시킬 때 특정방식으로 제어했기 때문에, 그 형태로서 보존되어있다가
지금 이 순간에 튀어나온 거 아니겠는가?
아무 이유없이 정착된 것은 없다. 당신만 모를 뿐, 당신의 몸은 인식절차를 거치게 되어있다.
왜 어떤 선생은 기원에서부터 원리, 다른 것과의 비교, 하나하나 기호의 분석, 을 보여줄 수 있는데,
왜 대개의 학생은 기원도 없고 원리도 없고 비교도 없고 기호분석도 없이, 그냥 단순하게 "그거요"라고 말하는가?
입력된 방식이 다르다는 것 알겠는가?
정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의가 된다면, 왜 되는지 아는지를 중요하다.
입력했던 게 있을 거 아닌가.
입력했던 방식이 있을 거 아닌가.
입력해서 보존했던 이미지가 있을 거 아닌가.
그것이 지금 찰나에 떠올려져서 기호로 번역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정의가 이렇게 변환되어서 나타난다는 걸 알면,
더 중요한 건
당신의 머리속에,
무엇이 입력되었는지, 그 계기- 더 넓게는 절차를 알아야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당신이 정의내릴 때 쓰는 표현들은 이미지의 번역이다.
그러면 그 이미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력되었는지, 어떤 토대와 대상의 작용을 거쳐서 입력된 것인지, 알아야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이게 먼저고, 그 다음 언어가 부여되는 거 아니겠는가? 아무리 말을 많이해서 말이 압도적으로 보일지라도, 순서는 저렇게 되야되는 거 아니겠냔 말이다.
당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도, 이 입력에서 비롯된다는 거 모르겠는가?
당신의 정의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왜 그게 정의인가?
왜 타인은 그렇게 정의하는가?
당신을 보면 그게 떠올랐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면 왜 그게 떠올라진 것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력했기에 그렇게 복제하게 되었는지, 따져봐야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이 글은 이것만 기억하자.
1. 정의가 있다는 것은, 그 정의에 해당하는 내용이 입력된 적이 있음을 말한다.
2. 어떤 단어를 듣자마자 찰나에 이미지가 떠올려졌다면, 그 이미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토대와 대상의 작용으로 입력된 것인지 살펴보라.
반드시 이것을 당신이 의도적으로 해야한다. 그 순간 하지 못하면, 당신은 자각없이, 자각없이 박혔던 것을 옮기고 복제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3. 이 말은 이미지와 언어가 지각적 역전을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이론적 부분이니 이런 게 있다 하고 넘어가라.)
4. 정의내리는 작용에 대해서 고민해보라.
그리고 이에 대해서 고민하고, 말하게 되는 순간과 연결해보라.
그래서 이 입력의 절차를 머리속에 박아버려라. 그리고 당신의 말이 이 입력절차에 의해서 이미지가 번역됨으로써 나온다는 걸 의식하라.
설령 당신이 아닌 타인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은 이렇게 해야한다. 왜? 그래야 당신은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자각하기 때문에 이 절차를 타인에게 덧씌워서 타인이 어떤 절차로 말하는지를 살필 수 있다. 개념의 창이다. (왜? 속성을 잡아둔 게 개념아닌가? 환기하면 그게 보이지 않겠는가?)
5. 찰나에 이미지가 없다면 번역할 수 없다. 번역할 수 없으면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잠깐 다시 짚는다.
당신이 '클루지'란 말을 보았는데, 떠올려지는 게 없었다고 해보자.
이 말은 당신이 찰나에 떠올린 이미지가 없으니 토대에 놓인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것은 클루지란 단어와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되지 않으니 뭐라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당신은 '모르겠다'라고 얘기하게 된다.
모르겠다 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은 찰나에 토대에 놓이는 이미지가 없단 얘기다.
사과'란 말을 보았는데 떠올려지는 게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그거 있잖아 그거. 마트에 있고, 칼로 깎아 먹는거. 잡스!" 이렇게 말하게 된다.
즉 당신은 찰나에 이미지가 떠올려졌기 때문에, 방금 마트/칼/먹다/잡스'라는 이미지를 번역해서 각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미지가 있으므로 연결이 된다. 연결이 되므로 저것(사과란 단어)을 이것(떠올려진 이미지-마트의 이미지/칼의 이미지/먹다의 이미지/잡스의 이미지)로 연결시킬 수 있고, 번역하면 그게 술어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경험표상을 경험서술로 바꾸는 것이라고 해두자. (종종 대상서술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던데, 경험서술로 해도 된다고 본다.)
고민하라.
당신의 머리속에 어떤 이미지를 어떻게 입력시킬지 고민하라.
당신이 입력시킨 방식대로 꽂혀서, 보존되고, 찰나 이미지가 되어 토대에 떠오르게 되고, 그 토대에 떠오른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입력했는가.
이것이 당신이 생각하게 되는 방식이고, 말하게 되는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생각하는대로 살게 된다.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 이전에,
'입력한대로 생각하게 되고, 입력한 대로 생각하여 말하게 되고, 그 말이 다시 입력되어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엇을 입력시킬 것인가?
정의내림을 생각할 때, 당신이 가장 먼저 떠올려야할 물음이다.
그리고 이 입력시키는 스킬에 차이가 있다는 걸 항상 열린 마음으로 의식하라.
왜 어떤 선생은 기호의 하나하나 제작방식과, 기원과, 원리와, 비교와, 유비를 설명할 수 있는데
왜 대개 학생은 그런 걸 못할까?
입력이 다르다는데 주목하라.
그리고 어떤 강사가 영어단어를 설명하면서 "이건 제가 나중에 가르쳐드릴게요."라고 할 때
이 영어강사는 뭘 어떻게 하길래 이걸 가르쳐드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가르쳐드리는 술어들은 어떻게 어떤 곳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에 '주의'를 걸고, 기준을 세우고, 의문을 던져보라.
이게 상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