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를 통틀어 보면 대부분의 왕조 말기에 공통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가뭄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 심한 흉년이 들고, 기근이 몰아닥치면서 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식량을 얻기 위해 무기를 들고 봉기하여 각지를 약탈하다가 그 중에 강한 무리들이 결속하면서 기존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멀리는 한나라부터 가깝게는 청나라까지 이런 현상들은 빈번히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극심했던 때는 바로 명나라 말기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명나라 말기의 자연재해는 그 지속기간이 매우 길고, 피해지역이 무척 넓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나라 말기 중국에서 기근이 제일 심했던 곳은 섬서성인데, 청나라 옹정제 때 출간된 저서인 섬서통지(陝西通志)에 의하면 만력제 초기부터 천계제 말년까지 약 50년 동안 섬서 지역은 한 해도 빠짐없이 가뭄과 홍수와 우박과 지진, 산사태와 전염병 등 크고 작은 재앙이 계속 일어났다고 합니다.
또한, 섬서성은 토지가 척박하고 농업생산력이 가장 뒤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치니 가뜩이나 힘든 섬서 주민들은 더욱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력 48년인 서기 1620년에는 “섬서성 일대에 큰 기근이 들어 10살 된 어린아이를 곡식 한 말과 바꿨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기근은 심각했습니다.
8년 후인 숭정제가 즉위한 1628년에 섬서 연안에 근무했던 마무재(馬懋才)라는 관리가 섬서성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지은 상소인 비진재변소(備陳災變疏)에 의하면 당시의 기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연안부는 숭정 원년에 또 대단한 가뭄이 들어 거의 1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초목이 말라 죽고 곡식 수확이 끊겼습니다. 8월과 9월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산간에서 쑥을 뜯어 양식으로 삼았으며, 떫고 씁쓰름한 그 씨를 먹고 연명했을 뿐입니다. 10월에는 그나마 쑥 종류도 없어서 나무껍질로 대체하여 허기를 채웠습니다.
듣기에 느릅나무 껍질은 다른 나무보다 맛이 조금 낫지만 구하기가 어려워 부득이하게 다른 나무껍질과 섞어서 먹는데, 나무껍질이라도 쟁여 놓으면 목숨을 조금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연말에는 나무껍질 또한 깨끗이 벗겨져 구할 수 없었습니다.
청엽(靑葉)이라는 이름의 돌멩이가 있는데, 기름기가 돌고 비린내가 나서 조금 먹으면 배부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반드시 배가 부어오르고 변의를 느끼며 죽습니다. 어른조차도 자기 몸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포대기 속의 아기의 운명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밖의 대변보는 곳은 어린 아기를 버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가슴이 찢어지듯 슬펐습니다.”
연안부의 각 현에는 죽은 사람들을 묻는 데 쓰는 큰 구덩이가 몇 개 있었는데, 마무재가 직접 눈으로 본 바에 따르면 안색성(安塞城) 밖의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구덩이 세 개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명경세문편(明經世文編)이라는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해집니다.
“수년 이래로 재해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진진(秦晉)이 먼저 그것을 당하여 백성이 흙을 먹었다. 뒤에 하낙(河洛)의 백성이 기러기 똥을 먹었다. 제노(齊魯)와 오월형초(吳越荊楚)가 그 뒤를 이었다.”
이렇게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은 급기야, 사람을 죽여서 먹는 끔찍한 만행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섬서 못지않게 기근이 심했던 산동성 청주부에서 근무했던 관리 황괴개(黃槐開)는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식인행위를 상소에 적어서 올렸습니다.
“옛날부터 기근이 든 해에는 하는 수 없이 길을 가다 서로 자식을 바꾸어 먹고, 뼈를 쪼개어 밥을 짓는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오늘날 산 사람을 잡아서 나누어 먹는 행위가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들을 막론하고 퍼져 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은 사람의 배를 가르고 해체하여 먹을 것으로 만드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심지어 한 번 맛본 사람은 어린아이가 더 맛있다고 합니다. 사람고기를 파는 사람도 있고, 사람고기를 절이는 사람도 있고, 또한 사람의 머리를 쪼개 그 뇌를 빨아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마침 굶어서 쓰러지면 주변의 사람들이 서로 칼날을 들이대어 시체를 모두 나눕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꾸짖으며 막으면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을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먹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섬서 지방의 기근을 상주한 마무재 역시, 섬서의 굶주린 백성들이 청엽이라는 돌멩이를 먹다가 줄지어 죽자 마침내는 행인을 죽이고 인육을 먹어 치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아이나 행인들이 혼자 성 밖으로 나가면 자취가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굶주림에 못 이겨 사람 고기를 먹어도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먹은 뒤에 며칠 후에는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안에서 열기가 아주 빠르게 일어나서 죽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들보다 재산과 식량을 많이 챙겨놓아 잘 먹고 잘 사는 왕족이나 부호 등을 약탈하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마무재의 상소에 의하면 굶주린 백성들은 서로 모여서 도적이 되기를 선언하고 “굶주림으로 죽는 것과 강도가 되어 죽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다. 앉아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도적이 되어 배부르게 죽는 편이 낫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 속에서 출현한 자들이 바로 농민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말았던 이자성과 장헌충이었습니다.
- 따뜻한손에서 번역된 <천추흥망: 명나라 편>에서 발췌했습니다.
옮긴 이의 덧붙임 : 해외의 어느 연구를 보자면 중국의 왕조의 흥망성쇠는 계절풍과 관련이 깊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왕조가 흥할때는 계절풍이 중국 북부 즉 화북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왕조가 쇠락할때는 중국 남부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화북지역은 오랜 옛날 부터 개발이 지속되어 토양의 유지에 필수적인 산림자원이 지속적으로 소모되어 왔으며 지력이 한계에 달한 곳도 많았기에 약간의 재해나 인재등의 사유로도 붕괴되는 경우를 쉽게 보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재해와 천지 사방에서 일어나는 반란군과 도당들의 봉기와 난립에도 불구하고 수십년을 더 버텨 냈다는것을 생각해 본다면 명나라의 국력이 어땠을까를 쉬이 짐작할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