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글은 제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실화이지만, 개인신상문제로 인물, 장소는 각색합니다.
6월.. 여름의 초입이 다가왔다. 방학도 곧이었다.
B는 주구장창 전화와 문자로 여러가지를 나에게 물어봤다. 대부분의 질문은 어떻게 해야할까 였고, 내 대답은 항상 나도 모른다였다.
어느 토요일날엔가 다시 사교활동모임이 열렸다.
"누나, 이L인가, 박L이 누구야?" 내가 옆의 친한 누나에게 물어봤다.
"어 걔 내 친구? 왜?"
"그냥 궁금해서"
"걔 군대갔잖아.."
"어. 그렇게 들었어"
"걔 되게 착하고 성실해, 진짜 웃겨ㅋㅋ 좋아하는 애들도 많았어."
"그렇구나... 누가 물어보더라고"
"혹시 B 말하는거야? 걔가 관심있는 것 같더라"
"그런가보지 뭐"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대꾸했다.
친구라고 나에게만 알려준다더니 그건 아니였구나. B는 여기저기 L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한 것 같았다.
얼마 후 B의 주도로 군대에간 교회 청년들에게 롤링페이퍼와 위문품을 보내는 모임이 열렸다.
물론 나는 그녀가 누구를 위해 그런 모임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그녀가 왜 그렇게 얄미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집이 같은 방향이던 J누나가 나와 동행했다.
사실 말이 누나지 누나가 중학생이던 시절 나를 업고다니며 돌봐줬다니, 이모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미혼인지라 항상 누나라고 불렀고, 그게 익숙해져 있었다.
"M! 너는 대학생인데 요즘 뭐하니?"
"그냥 있어요.."
"얘, 대학생이면 좀 데이트도하고 그래야지"
"제가 뭔 데이트에요.. 누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요?"
"참 우리 교회사람들은 멋대가리가 없어서, 어쩜 그렇게 여자를 모를까.. 이거 봐 이거봐" 누나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M아, 여자하고 길을 걸을때는 남자들이 매너 좋게 찻길쪽으로 걸어주는거야. 식사할때는 의자도 빼주고" 누나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누나 말을 듣고 곧장 찻길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ㅋㅋ 귀엽네. 나는 요즘 B가 참 괜찮은 것 같더라. 이쁘고 잘 웃고, 활동도 열심히 다니고"
"걔는 그냥 친구에요" 나는 땅을 보고 걸었다.
"야~ 내가 언제 결혼하래? 너 군대도 남았고 아직 20살 밖에 안됐잖아? 그냥 밥같이 먹자고 해. 선남선녀가 만나서 밥먹는게 이상한거야?"
"됐어요. 걔는 그런거 관심 없을거에요"
"얘가 뭘 모르네.."
"................ 저는 S형이 참 괜찮은 것 같아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 후에도 B는 나에게 꾸준히 연락해서, 이런건 어때 저런건 어때하며 남자의 심리같은 것을 물어보길 좋아했다.
나는 꾸준히 대답해줬고, B는 그것에 감사했다.
L에 국한되었던 우리의 대화는, 어느새 B의 직장이야기, 상사이야기, 동생이야기등 여러 화재로 넓혀갔다.
B와 나는 그 단기간에 B특유의 친화력과 사교성때문인지 더욱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B의 직장은 그녀의 집에서 꽤 떨어진 양주에 있었는데, 통근버스를 탈때나 집에 돌아가는 길이나,
회사 점심시간 쉬는시간, 지루한 시간은 어김없이 나에게 연락을 했다.
"M아.. 나 이번에 회사에서 단합회가는데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가면되지"
"그럴까? 근데 가서 뭐해, 거기서 보니까 그냥 술마시고 그럴 것 같던데..."
"아 맞다 너 술 안마시지.. 어쩌냐.. 가서 심심하겠네"
"그것도 그렇고, 요즘 옆팀 대리가 자꾸 나랑 자기랑 엮을라고 그래서 짜증나.."
"뭐? 그럼 가면 안되지" 나는 갑자기 흥분했다.
"왜 니가 정색하냐? 크크"
"그게 아니라 술자리에 그런사람 있고 그러다보면 좀 그렇잖아.."
"이건 내가 알아서 해야겠다. 그나저나 어쩌냐.. 나 이거 가면 이번 하계수련모임 참석 못하는데"
"어? 진짜?"
"응, 여기 일정 일박 이일이긴해서 그 모임이랑 사실 하루정도만 겹치는데,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차편도 없고.. 힘들지"
"그럼 가지 말고 여기로 와"
"그래도 회사인데 어떻게 안가.. 내가 알아서 할게"
"..."
아마 이 대화가 내가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놀랐던 대화인 것 같다. 왜 내가 얘 걱정을 이렇게 해야하지..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쟤에게 추근대는 사람을 신경쓰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계수련회날도 가까워 졌다.
"B!.너.진.짜.이.번.에.참.석.안.할.꺼.야.?" 딸각! 나는 B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띠링!
"응 이번에 참석 못해, 에프터모임에나 가야지"
수련회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조금 지루했던 것 같기도하다. 많은 생각을 했다.
왜 이번 수련회는 재미 없을까.. 항상 재밌었는데... 내가 정말 B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B와 만난다면 어떨까.. 나는 B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은 남녀간의 친구사이도 많다던데, 나는 그런 큰 그릇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임 일주일 후 에프터모임이 열렸다. 그 수련회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이 어땠는지 평가하는 자리였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몇명의 사람이 이미 도착해 있었고, 한명의 군인이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눴고, 나는 그가 L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휴가나와서 할 것도 없고해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치..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구만" 나는 속좁은 쫌팽이가 되어 있었다. 아니 원래 그랬을지도..
내가 저 사람보다 뭐가 그렇게 많이 모자를까..
모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때, B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B는 곧장 L에게 다가갔다.
B의 수줍은 듯이 웃는얼굴. 나는 일부러 B를 모른 척했다. 그녀가 미웠다. 모임이 끝날즈음 되서야 그녀는 내게 인사를 건냈다.
"여~! 너 왜 나 모른척해?"
"내가 언제 모른척했어"
"ㅋㅋ 됐다. 집에 가자!"
"나 거기 더이상 안사는데.."
"아 맞다 너 자취방 살지? 역까지만 같이 가자 그럼!"
역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막상 헤어지려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승강장으로 향했다.
"어? 너 자취방 간다며?" 그녀가 말했다.
"됐어, 그냥 오늘은 집에서 자지 뭐. 근데 너 저녁 밥 먹었냐? 벌써 8시야." J누나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아니, 배고프다."
"역 도착하면 밥먹을까?"
"그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비가 살짝 와서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빗물에 반사되는 거리의 네온사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어찌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고기집으로 들어갔다.
"2명이요" 테이블에 도착한 후 B가 앉기 좋게 의자를 빼줬다.
"뭐야~"
"원래 이렇게 하는거라더라.."
우리는 식사를 나눴다. 그리고 대화를 먹었다.
고기가 불판에 올려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향긋한 고기내음. 지글지글 탁탁거리는 그 소리, 그리고 뿌연 연기..
고기를 맛있게 보이게하기위해 설치된 주황빛 따뜻한 조명.
"너, L하고 대화는 많이 나눴어? 휴가 나왔다더라" 내가 고기를 구우며 이야기했다.
"어, 근데 거의 말은 못했어. 그냥 옆에서 있기만 했지.."
"B님, 왜 그러실까요, 그냥 만나보지 그래?"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야야야, 그건 진짜 아니다. 그냥 좋은 오빠야"
"너 관심있는거 아니였어?"
"아니, 그냥 생각해보니까 군인이기도하고, 지금 뭐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무신도 될려면 그동안 쌓은 뭐라도 있어야지, 지금 그러는건 오바야."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냥 그래서 속으로 혼자 정리했어. 그 오빠도 좋아하는 사람 있다더라고"
"그렇구나..."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알딸딸한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식사를 나눈 후 다시 역을 향해서 걸었다.
"야 내가 집에 데려다 줄까?" 내가 B에게 물었다.
"괜찮아. 역에서 30분은 걸어야되"
"그래도 벌써 밤 10시 다되가는데?"
"뭐야..갑자기 왜그래. 야 전에 내 남자친구 있을때도 안그랬어"
"그래.. 진짜 괜찮아?"
"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바보였다. B가 나에게 정말 마음이 없다는 걸 이때까지도 캐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결혼할 것도 아닌데 뭘, 그냥 남녀가 서로 만나는게 뭐 대수인가" 이 말은 정말 마법같은 말이었다.
찌질의 역사의 한획을 차지하던 내 인생에 탈찌질 선언서나 다름없었다.
며칠 뒤에 내가 보고싶어하던 영화가 개봉했다.
나는 매쾌쾌한 자취방 구석에 앉았다. 주변에 룸메이트들이 없는지 살폈다.
매쾌쾌한 남자 옷냄새, 좀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은 켜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B와 영화를 볼거니까.
그리고 B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B! 뭐해?"
"일하지"
"이번 주말에 뭐해?"
"그냥 집에 있어 왜?"
"나 이번에 영화표 두장 생겼는데 같이 보러갈래? 너희집 근처야" 아직 나는 영화표를 사지도 않았었다.
"............"
"............." 어색한 침묵
"M, 이거 맛들렸구만"
"어?"
"저번에 한번 밥 같이 먹었더니 맛들렸네.."
"..."
"내가 너랑 영화를 왜보냐?"
"그냥 친구끼리 볼 수 있잖아..?"
"안봐"
창피했다. 얼굴이 붉어져서 터질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걸리는게 느껴졌다. 당황스러웠다.
맛들렸구만, 이 말이 얼마나 내 가슴을 찢어놨는지, 가슴 속에서 뾰족한 침들이 이리저리 날뛰다가
공간이 좁아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 칼로 난도질당한 기분이었다.
"진짜 안봐?"
"응.."
"..."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안보지?"
"응 안봐."
"그래.."
뚝, 전화가 끊겼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이런 불편한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창피했을까, 왜 그렇게 수치스러웠을까.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반지하방구석에 내가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찌질해보였다. 내가 뭐가 그렇게 부족할까... 내가 왜 이렇게 매력이 없을까.
그리고 내 생각은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 살때문이야.. 이놈의 살 때문이야... 내가 뚱뚱하니까..."
뺀다. 이거 내가 뺀다. 내가 빼서 보란듯이 잘살거다. 보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