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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대안요식업입문 팩션소설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 1화
게시물ID : readers_115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의족과독사
추천 : 2
조회수 : 3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1/26 14:39:51


때는 바야흐로 이명박 정권말기였던 이천씹일년의 가을.

서울 홍대 앞. 그 중에서도 중심가의 번화함으로부터 살짝 빗겨난 뒷골목의 지하에 자리한 조그마한 술집이 있었다.

상호는 이름하여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

정상적인 상호네이밍 상식으로는 도저히 술집이라고 쉽게 그려지지 않는 이름이다.

다수의 일반시민들이라면 충분히 가게 문 앞에서 주저해야 싶을 만큼 가게의 입구 역시 손님들에게 썩 친절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락날락 거리고 있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

가게의 사장은 본격적으로 20대 후반테크를 타고 있던 청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부럽지 않게 삐딱했고 남들이 지시하는 것에 불응하길 밥 먹듯이 한 죄로 일찍이 홍대 앞을 주름잡으며 갖가지 비주류 문화예술에 기웃거렸던, 전형적인 베짱이. 그런 그가 갑자기 술집을 차리게 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먹고 살고 싶다는 바람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 가게에는 그의 바람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늘 가게를 찾았고, 비슷하게 딱히 할 일이 없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식객이라고 불렀다. 가게는 그러한 부전승 같은 삶을 누리는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이 이야기는 팩트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고 싶어도 정작 현실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다른점을 찾기 힘든 노예의 삶뿐이다.


나라는 인간이 나라는 호흡에 맞추어 나답게 살기 위한 그 해답으로써의 제시하는 느슨한 자영업의 삶.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만든 이상일 뿐 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실제로 그러한 삶을 구현했던 사람으로써.


좀체 답이 보이지 않는 이 사회에서 정답은 생각보다 여러가지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자 한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냥 요따구로 살아도 죽지 않음을 보여내고자 한다.




삶을 전전(轉轉)하다

 

 

나의 어린 20대는 늘 무언가에 전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 한 곳에 깊숙이 빠져들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었다. 쉽게 ‘혹’ 했지만 또 쉽게 ‘헉’ 하며 빠져나오기 십상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참지 않고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즉시 하고, 하기 싫은 것이 생기면 즉시 관둔다. 그것은 12년에 걸쳐 학교라 불리 우는 국민국가의 구성원을 양성하는 수용소에서 강제주입 당한 것을 정화하기 위한 자체 치료법이었다. 그간에 억지로 참느라 잊어먹을 뻔 했던 것들을 다시 깨우고자 했고, 혹여 경직되었을지 모를 정신을 풀어줘야만 했다. ‘한우물만 팔 것’을 주문했던 그 들의 속셈은 나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 보다 쉽게 다스리겠다는 것이었음을 나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진(前進)대신 전전(轉轉)을 택했다. 가만히 정체하진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았다. 정답은 오로지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옆에도 있고 뒤에도 있다. 시선을 앞에만 두느라 어디로 얼마나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살아왔다 자위하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경쟁에 신물이 났고, 실전은 너무 지겨웠다. 이제는 좀 팔짱낀 채로 훈수나 두고 싶었다. 나는 빙빙빙 또 뱅뱅뱅 하면서 세상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당연하게도, 또 자연스럽게, 다시 습관적으로 거리로 나와 그 옛날 북극성을 찾아가면서 사막을 횡단하던 아라비아의 상인들을 흉내 내어, 화려한 불빛을 찾아가면서 유흥가를 전전하였다. 이 도시에서 북극성은 더 이상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좌우 양옆에서 친절하게 빛을 발하며 길잡이가 되어준다. 어서 이쪽으로. 아니 이쪽으로. 그것이 오늘밤 네가 가야할 길이라고 일러주는 듯 했다. 밤하늘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셔야 할 별님과 달님도 이 도시 속에서는 원래의 직장에서 쫓겨나 어둑한 지하에서 밤무대 공연을 전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빛났던 그들이 구토더미 위에서 아침 식사중인 비둘기 떼를 헤치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정말로 쓸쓸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거리가 딱히 싫지 않았다. 낮 동안 이성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술 몇 잔에 이성을 감성으로 갈아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이 재밌었다. 더 정확히는 안됐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저들은 참고 또 참아왔을 것이다. 근데 여기서 또 참으라고 하면…….

 

‘그러니까 아가씨! 부디 가여운 저들을 위로해주세요.’

 

낮에는 돈을 벌기위해서, 밤에는 여자랑 자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저 수컷들의 분투에 건투를 빈다. 어차피 저들의 엔딩은 40대 과로사나 암 선고 아니겠는가. 그때까지 만이라도 파이팅이다.

 

 

어찌됐든 그곳은 무려 이런 도시씩에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려는, 아니 버텨보려는 인간들의 환희와 슬픔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관찰자로 바라보는 그 곳의 정경은 나 같은 인간에게 제법 흥미로운 것이었다. 거기엔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저 사람이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 일 때는 나와 마찬가지로 앞선 세대를 관찰했을까 라는 호기심이 있었다. 사실 그들은 내 입장에서 보면 ‘부정형 북극성’ 이었을지 모른다. 빛이 잘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저런 빛만큼은 피해야겠다는.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근데 세계가 진보하더니 빛들이 너무 많아져서 갈 길을 고민되게 만든다. 한 1000년 전 태어났을 내 조상이란 사람들은 그런 고민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주어진 분수대로 살면 되었으니까. 나는 내 분수를 잘 몰랐던 대가로 전전을 하고 있었다. 내 안에 어떤 삐딱한 것들이 제법 숨어 있다고 짐작은 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조차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한 관찰에 흥미가 떨어지게 될 무렵부터는 나도 이 사회의 평범한 수컷으로 돌아가 내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워줄 여인의 품을 전전하였다. 나 또한 술집에 입장해서 테이블을 선정할 때 제일 먼저 고려했던 것은 옆 테이블에 앉은 여성과의 호감도 및 운명적인 접선이 일어날 가능성이었다. 나는 운명은 믿지 않았으나 여전히 운명 같은걸 믿고 앉아있는 여인이 가진 외로움은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외로움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제법 중대한 성격의 에너지였다.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정치·경제·사회·과학·예술·산업 등을 이끌어가는 근원의 힘은 이성의 마음을 끌어내고자 했던 구애의 몸짓에서 촉발되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고대 선조들이 그린 벽화와 현대에 우리가 휴대폰으로 속삭이는 메시지의 의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던 것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상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더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만들 수 있던 것은 그 차에 태우고 싶은 상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남성이 여성에게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덜 잘 보여도 생식과 번식에 문제가 없게끔 진화가 되었더라면, 그만큼 문명의 발전은 후퇴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더 이상 그러한 에너지를 멈추는 순간 그 사람은 그걸로 끝이라고 봐야하며, 그가 속한 사회는 거침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술집에서 소란 비스무리 한 정경을 펼쳐내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회라면 나는 그 사회의 건강미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말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만났던 여자들은 제법 다양했다.

머릿속은 고요해보이나 소란스러운 겉모습으로 나를 유혹했던 여자 - 그 여자는 지금 외관은 고요하지만 은행계좌의 잔고는 꽤나 시끌벅적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시종일관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삶의 부질없음을 성토하던 여자 - 그 여자는 지금 유기농 생식운동을 실천하는 녹색의 여인이 되었고, 지난주에는 내게 직접 길렀다던 상추를 보내주었다. 물론 난 버렸지만.

피곤하다며 빨리 본 게임으로 들어갈 것을 채근 하는 여자 - 그 여자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피곤하고 있을까?

그 외 차이점을 찾기도 힘든 그냥 그런 여자들까지......

그녀들에게 나는 늘 어느 한쪽에 쉬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김삿갓 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전전했으니까. 전전하고 싶었으니까.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여자가 전부였을지언정 돌아서고 나면 그녀 역시 내가 스쳐갔던 하나의 부분이 되고 만다. 가끔은 내 쉼표이자, 느낌이자, 물음표 이던 그녀들이 생각난다.

아주 가끔.

 

 

여자들은 곧잘 내 정체에 관해서 묻곤 했는데, 내 대답은 그때마다 달라졌다.

 

그저 단순히 산책하러 나오지만은 않을 것 같은 공원에서 캔맥주를 마실 핑계로 기타를 치고 싶을 때는 인디밴드 베이시스트가 된다. 좋아하는 베이시스트를 물을 때는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밴드였던 섹스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 시드라고 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키지 않는다.

 

그러다 사람들이 정말, 아주, 많이 지겨울 때가 오면 칩거모드에 들어가고 작가 지망생이 된다. 바깥으로 나갈 때는 수염을 깎지 않은 채로 뿔테 안경을 착용하고 머플러는 가능한 ‘칭칭’이라는 부사를 쓰고 싶을 정도로 감아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너무 사람들이 많은 술집 보다는 작은 규모의 일본식 선술집에 가서 조용히 사케를 시켜놓고 뭔가를 끼적이고 있으면 완성이다.

 

그리고 나면 돈이 떨어진다. 전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남들보다 조금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말 뿐인 내 입장에서 만만한 것은 장사다. 작가 지망생동안 야위어 버린 몸뚱이를 슬림핏으로 포장해서 동대문시장의 옷장수가 된다. 옷을 쇼핑하는 대게의 인간들은 ‘저걸 입으면 나도 누구처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내 역할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것을 먼저 말해주는 것뿐이다. 장사를 잘한다는 것은 구매자가 원하는 환영을 잘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어쩌면 그 때 내가 한 것은 옷을 판 게 아니라 마술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갑이 두둑해졌다 싶으면 나눔과 복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못사는 것이 단순히 내 능력만은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 나를 옥죄는 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고조에 이를 때 나는 사회변혁을 꿈꾸는 활동가가 된다. 붉은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고 비싼 양주를 마셔도 어떤 불편함에 취하지 않게 된다. 이토록 험난한 시국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하호호 떠들고 있는 저들을 각성하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그렇게 친구를 모으고 규합을 하여 제법 규모가 커지다 보면 지류가 생긴다. 줄기가 흩어진다는 말이다. 분열한다. 세포만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직도 분열한다. 전향이니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에라이, 개혁은 무슨, 그냥 게이 형들이랑 놀란다. 형은 년이 되고, 느낌은 촉이 되고, 탑과 바텀이 그러니까. 그렇게 그들만의 용어를 학습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입한다. 이거야 원. 정신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따라가 주질 못하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가 아니라 당신이든 여보든 그 누구의 얘기일 수 있음을 눈뜰 무렵, 다시 날이 따뜻해져오고, 그러면 기타가 치고 싶고,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반복.

 

마찬가지로 나는 직업적으로도 전전하고 있었다. 멋대로 밀고 들어왔다가 얼마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바다로 나가고야 마는 파도처럼 말이다. 특별히 아쉬울 게 없던 때였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포기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이런 나에 대해 사람들은 'cool' 한 삶의 자세라고들 포장해주었다. 여름에 반짝하고 나와 유원지의 BGM을 장악하는 팥빙수 같은 가수 쿨(cool)이 오버랩 되었지만 그래도 시원한 건 좋다고 생각했다. 가령 ‘너 좀 시원한데’가 아니라 ‘너 좀 더운 부분이 있어’라고 한다면 뭔가 땀이 삐질삐질 하고픈 그런 이상한 느낌이고 말 것이다.

 

 

이 외에도 나는 거주지도 전전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출소하는 것과 동시에 부모님은 집을 신도시라는 레고 동산으로 옮기셨다. 누가 봐도 모눈종이에 자를 대고 만든 것처럼 마을은 빈틈없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놀라운 효율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파트단지와 지하철역과 쇼핑센터가 마치 하나의 세트메뉴처럼 앙증맞게 배치되어 있었고 그러한 형태의 군집이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형태가 바로 신혼부부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신도시라는 세상 이었다. 뭔가 그곳에 있으면 위에서 누군가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곤 한다. 혹시나 내 옆머리에서 앞머리가 반듯한 라인이 되고, 내 눈이 그저 작고 동그란 검은 점이 된 것은 아닌가 하고. 그 때문에 나는 내가 사는 도시에 반해 훨씬 울퉁불퉁하고 예측하기 힘든 형태로 조성된 공간을 찾게 되었고 그곳들은 대게 강북의 한풀 위세가 꺾인 유흥가였다. 너무 불같은 사랑도,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도, 너무 쉽게 끓어오르는 군중의 심리도, 모두 내겐 부담스러웠다. 한 김 식히고 난 후의 여유가 좋아서 나는 그런 곳들을 전전했다.

 

 

심지어는 한국군에 징집되어 까지도 나는 전전했다. 그곳이 가진 정체성은 거짓말처럼 단 한 가지도 나와 통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의사와 반하는 이상한 습관들을 강제로 주입받아야 했다. 새벽에 잠들던 나는 거기서 새벽에 이상한 곡조의 멜로디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잠에서 깨어야 하는 이상한 기상습관을 익혀야 했다. 알록달록한 무지개 빛깔 패턴의 의상을 좋아했던 나는 퀘퀘하고 얼룩덜룩한 빛깔의 거적을 걸치는 이상한 복식습관을 익혀야 했다. 비틀비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하염없이 걷곤 하던 나는 꼿꼿이 날선 자세로 노래보다는 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며 손아귀에 가공의 계란을 쥔 채 나의 발을 근처에 모인 발들과의 순서쌍을 고려해야 하는 이상한 도보습관을 익혀야 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위아래가 존재한다는 것에 늘 못마땅하던 나는 누가 먼저 입대했는가의 날짜 순위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를 분류해야 하는 이상한 인간 규정습관을 익혀야 했다.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던 나는 강제적으로 사료를 입안에 구겨 넣어야 하는 이상한 식습관을 익혀야 했다.

 

처음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한 간부가 물었다.

 

“자넨 밖에서 뭐하다 왔나?”

“예술 하다 왔습니다.”

“아, 어, 음, 그래 ”

 

 

그 때부터 내 보직은 관심 사병이 되었다. 보병, 전차병, 통신병, 취사병 등의 보직들이 어떤 특정화된 액션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내 경우는 어떤 행동을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관심 받는 것이 일이라니.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군대에서 말이다. 선후임 사이에 너무 자연스러운 인사처럼 존재하는 욕설과 갈굼 이라는 횡포에서도 나는 치외법권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이른바 높으신 분들은 으레 내게 힘든 게 없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이미 군대에 대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지라 그 때 그 때마다 내가 겪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 소상히 전달하여 그들의 배려에 응하고자 했다. 알 수 없는 것은 내 불편함에 대해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표정을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근접한 곳에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 상황이 초래되기에 이르렀다. 이거야 원. 불만이 무슨 바이러스도 아니고. 이 공간에서의 불편함이란 입 밖에 내는 순간 주변으로 퍼져나가 더 큰 불편함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묵묵히 참는 것이 불편함을 다스리는 것이라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직속상관이라는 죄로 나의 안위에 자신의 생계와 진급이 달린 높으신 분들은 나의 불편함을 달래고자 시기 때마다 갖가지 파견 업무를 부여했다. 어느 정도 무렵부터는 나도 내 신분에 대한 자각이 생겼으므로 콧대를 유지하고자 했고, 그럴수록 나는 더 많은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이건 대체 이 도처에 널린 널널함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하며 시간을 좀먹고 있을 무렵, 곧 이 집단에서 풀려날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이제 다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곰도 100일이면 사람이 되었는데 나는 대체 얼마나 더 사람이고 싶어 700일을 넘도록 그런 쑥마늘 같은 삶을 보내야 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은 과연 2년간 내가 행해온 이러한 짓들이 과연 이 나라 이 조국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조국이라는 것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과 아울러 집단적인 환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괴상한 피학적 고통의 과정이 왜 이 사회의 수컷으로 살기 위한 통과의례가 되어 있는가의 고민이 겹쳐졌다. 이것은 마치 이 집단과 이 집단의 구성원들끼리 거대한 농담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끝끝내 나는 한국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출소와 동시에 어여쁜 소녀들이 고이고이 만든 꽃목걸이를 목에 걸며 한동안 지나치게 조여졌던 나를 다시 방치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과 달리 나를 에워싸는 공기는 냉랭했다. 그리고는 ‘이제 너도 어엿해져야’ 라고 말하는 듯한 창끝을 내게 드밀고 있었다. 간혹 심한 경우 나를 인민재판에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친척모임을 빙자한 자리에서 나는 곧잘 앞으로 끌려 나가 취조를 받고, 진술과 항변을 하여야 했다.

 

 

“피고는 이제 국방의 의무를 마친 대한민국의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 이를 인정하는가?”

“예, 뭐, 예전부터 필요 이상으로 남자구실 한다고 자부해왔었기 때문에......”

“그런 잠자리 문제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본인의 자리를 닦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거다.”

“정 그러면 이제 부터는 식사 후 테이블은 제가 직접 닦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이런, 이런, 이런, 정말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는 아둔한 자로구만. 피고는 정녕코 이 피 튀기는 경쟁사회가 보이지 않는가? 과연 싸워 이길 수 있느냐 말이다.”

“아....... 그럼 저는 그냥 심판 보면 안 될까요?”

 

 

그 때마다 이른바 나를 위한다는 그 나이든 원고 측 검사들은 은퇴를 앞둔 축구선수가 공을 다루는 느낌으로 애꿎은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군대에서 총 내려놓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내게 전사가 되라 하나. 왜 다들 죽이지 못해 안달이고, 싸우지 못해 안달인가. 나만은 중립국으로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스위스는 예비군 기간이 꽤 길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아...... 예비군 벌써 가기 싫다.’

 

실로 그랬다. 뭔가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네트워크 도처에서 ‘너도이제’ ‘언제까지’ ‘이제그만’ 으로 시작되는 공격으로 나를 벼랑으로 몰고 있었다.

 

‘저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될까요? 네? 어, 어, 어~’

 

 

멀지 않아 나는 곧장 저 냉엄하고 팍팍한 사회 속으로 입수 당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억지로 끌려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나름의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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