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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틀릴 수 있어요^^ (포퍼의 반증주의를 중심으로)
게시물ID : science_301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후유후유
추천 : 8/10
조회수 : 2790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01/26 02:39:13
안녕하세요..... 건축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과학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언급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으셔서
제가 아는 배경지식 조금~ 풀고 갈게요
제가 전공이 건축디자인이라
자연과학 쪽에 지식이 크지 않아 핀트가 어긋날 수도 있지만 참고만 해주세요!!
조금 더 이해가 쉽기를 바라면서 많은 예들과 함께 작성 해봐요ㅠㅠ
 
 
여러분~ 살면서 여러 논문들을 읽어보셨을 텐데,
그것의 결론에서, ‘가설이 참이다’라는 결론을 보지 못하셨을 거에요!!
논문의 결론은 한시 ‘가설이 지지되었다’ 혹은 ‘가설이 지지되지 않았다’로 나온답니다.
 
 
‘참이다’와 ‘지지되었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참이다’는 그 가설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지지되었다’는 그 가설을 잠정적인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에요.
즉, 우리는 비판적 시험과 논의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진리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어요.
 
 
따라서 과학은 틀릴 수 있답니다. 잠정적인 진리일뿐,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죠 ^^
이것이 현대 과학연구의 주를 이루는 과학철학인 반증주의라고 해요.
아직 이해가 안가시죠~ 간단하게 과학철학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초기 과학연구에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개별적인 사실의 관찰의 축적을 통해서 진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귀납법이죠^^).
가령,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떴으니 해가 동쪽에서 뜨는 건 진리이다.’ 라구요!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답니다.
 
 
첫 번째 문제는 러셀의 칠면조와 추수감사절 이야기를 통해 알려드릴게요.
 
한 농장에 칠면조 주인이랑 칠면조가 있었는데, 주인이 1년 동안 꾸준히 같은 시간에 같은 모이를 주었데요.
그래서 칠면조는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매시간 같은 양의 모이를 먹던 칠면조는 어느 날, 어김없이 모이를 먹으러 갔다가 목이 잘려 치킨이 되었답니다(치느님ㅠㅠ).
그 날이 추수감사절이었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칠면조의 잘못된 인식과 같이 개별적인 관찰의 축적으로는
진리로 갈 수 없답니다. 진리는 항상 개별적인 사실의 축적보다 큰 것을 말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납법은 확률론으로 후퇴하기도 한답니다.
 
“만일 다양한 조건의 변화 속에서 많은 a가 관찰되었고 이 관찰된 a가 예외 없이 모두 b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모든 a는 b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즉 ‘개연적인 참이다. 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같이요.
하지만 진리는 개별적인 사례보다 항상 크기에 어떠한 확률도 0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인간의 오류가능성이랍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우리의 감각과 이성은 명석하고 판명하기 때문에 사실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과 이성의 명석함과 판명함은 객관적이기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하나의 꽃을 여러 사람이 카메라로 찍었을 때,
그 사진의 나온 꽃의 모습들은 다 다르답니다.
 
즉 우리의 이성과 감각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죠. 이것을 인간의 이론 의존성이라고 해요.
우리들의 주장의 대부분은 관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다른 근원에 기초하고 있답니다.
 
가령 ‘기다란 나무판자에 나무 다리가 4개인 것은?’ 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책상이라 하면서 책상처럼 쓸 것이고, 어떤 사람은 식탁이라하면서 식탁처럼 쓸 거에요.
이것은 이 두 종류의 사람의 머리 속에 책상이나 식탁이라는 각각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같은 기다란 나무 판자에 나무 다리가 4개인 것을 어떤 사람들은 책상이라 정의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식탁이라 정의한 거죠.
 
위와 같은 예와 같이 우리는 머릿속에 개념, 즉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답니다.^^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모순을 해결하기위해 실증주의에서 나온 다른 과학철학이 포퍼의 반증주의랍니다.
 
 
베오베에 언급된 상대주의와 같이 비교해서 보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우리의 앎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이야기 하였고,
상대주의자들을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며, 우리의 앎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포퍼의 반증주의는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와 상대주의의 양극단을 모두 거부하고,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류를 제거함으로써, 우리가 점차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가 중요해요!!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 즉 과학은 틀릴 수 있어요^^
오류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절대적인 진리엔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과학연구를 통해 얻는 것은 잠정적인 진리랍니다.
 
 
혹시 연구가설과 영가설을 들어보셨나요?
 
우리의 많은 과학 논문들이 자신이 주장하는 가설을 논증해내는 방식에 영가설과 연구가설이 포함된답니다.
연구가설은 자신이 주장하는(변수 간에 관계가 있다는) 가설이며,
영가설은 연구가설과 대립하는 즉, 변수간에 관계가 없다는 가설을 말합니다.
 
가령 아이슈타인이 ‘E=MC^2’(이렇게 쓰는거 맞나요? 디자인 전공 ㅠㅠ)이라는 연구가설을 논증하고 싶다고 했을 때,
이 연구가설에 E와 M,C에 개별적인 관찰사례들을 무수히 넣어보면서 증명하는 것(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방법)이 아니라
 
‘E≠MC^2’이라는 영가설을 만들어서 ‘E≠MC^2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개별 사례를 찾아보고,
‘E≠MC^2’이라는 변수 간의 관계를 만족시키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면,
원래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했던 연구가설 ‘E=MC^2’을 기각하지만,
 
찾을 수 없다면 연구가설 ‘E=MC^2’을 잠!정!적!으로 수용하고
‘우리의 연구는 연구가설 ‘E=MC^2’을 지지한다‘라고 말한답니다. 이러한 방식을 우리는 ‘반증한다’라고 하며,
E=MC^2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잠정적인 진리로서 틀릴 수 있답니다!
 
이야기되는 열역학 법칙도 마찬가지일꺼에요. 열역학 법칙은 잠정적인 진리일 뿐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틀릴 수 있답니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방식은 ‘백조가 희다’를 증명하기위해 세상의 수많은 백조들을 관찰하는거에요.
근데 그것이 불가능 할뿐더러 관찰하는 와중에도 많은 백조가 죽고, 태어나기 때문에 말이 안되죠.
 
반면 포퍼의 반증주의는 백조가 희다를 증명하기 위해 희지 않은 백조를 찾고, 만약 찾지 못했다면,
‘백조가 희다’라는 것을 잠정적인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포퍼의 반증주의를 짧게 요약하자면
우리의 이성은 항상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앎(진리)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단계도 앎의 최종단계로 간주하지 않는 답니다.
 
하지만 반증주의는 우리의 앎이 논리실증주의자와 같이 우리의 감각과 이성의 독단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반증이라는 비판적 시험과 논의에 의해서 증진되고 개선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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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 기나긴 이야기 지루하셨나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 법칙들은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라 잠정적으로 인정된 진리일뿐
여전히 틀릴 수 있답니다^^
 
그런데 어떻하죠~ 저는 조금 더하고 싶어요...!!
 
 
 
 
 
 
사실 맞춤법이 약하고, 멘탈이 약해서 막 혼내시면 상처를 많이 받기 때문에
무서워서 눈팅만 하고 있었는데,
용기내서 써본 첫글! 아주 짧게 조금 더 가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포퍼의 반증주의 모순점과 쿤의 상대주의를 이야기해드리고 싶어요.
(어떤 분이 과게의^^ 쿤의 과학혁명이야기를 하셨던데 심심해서 읽었었는데 많이 재미없어요 ㅋㅋㅋㅋ)
 
 
먼저 포퍼의 반증주의 모순점입니다.
 
우선 포퍼의 반증주의는 사실 논리실증주의자와 같은 모순을 갖고 있답니다.
무엇일까요~? 예리하신 분들은 바로 눈치 채셨을 거예요.
 
 
바로 인간의 오류가능성이지요.
앞서 이야기한 백조이야기를 다시 꺼내볼까요? 반증주의에 방식에서 희지 않은 백조를 찾는다고 했을 때,
희지 않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도 인간의 오류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답니다.
 
즉 반증주의는 어쩌면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관찰 사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잠정적인 진리를 반증하게 되는 거예요. 
잘못된 걸로 잘못된 걸 까는거죠 ㅎㅎ
 
 
물론 이러한 논리를 보완하기 위해 포퍼는 베오베에서 언급하셨던 상호주관적 객관성,
간주관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결하려 합니다.
 
간주관성은
‘어떠한 것이 이성을 소유한 그 누구에나 타당하면 그것의 근거는 객관적이고, 충분하다.’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전개는 앞서 이야기해드렸던 논리실증주의자들과 같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요.
‘그 누구에게나 타당하다’와 같은 검증 불가능한 명제와 ‘타당하다’는 판단의 오류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포퍼의 반증주의의 모순은 반증주의가 제시하는 지식의 성장방식이 실제의 과학사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퍼의 반증주의나 논리실증주의는 경험주의로서 어찌됐든 관찰이라는 경험을 통해
검증 혹은 반증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축척되면서 과학적 지식이 누적적으로 차근차근 성장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천동설이 지동설로 변하고, 만유인력이 발견되는 것과 기존의 이론들이 배격되고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는,
마치 혁명과도 같은 급격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퍼의 반증주의의 또 다른 모순점이며, ‘쿤의 과학혁명이야기’라는 책에서 언급된 쿤의 상대주의에 시발점이 됩니다.
 
 
 
쿤의 상대주의는 논리실증주의나 반증주의와 같이 참임을 입증 내지는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
어떤 공식화된 논리나 방법, 절차가 존재함을 부인합니다.
 
 
대신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데,
패러다임은 연구수행에 활용하는 모든 지적 자원으로서,
이론이나 법칙, 개념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과학 연구의 자원체계로 작용하며,
이러한 패러다임은 입증되거나 허위화 시킨다는 것. 그리고 상호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천동설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는 여러 많은 과학 연구들이 천동설이라는 자원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변화되면서, 천동설이라는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론들이 폐기되고 혁명적으로 지동설과 지동설을 자원체계로 한 연구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쿤의 상대주의에서의 과학적 연구활동이란 이미 알려진 것의 테두리 속에서,
그것을 자원으로 활용하여 지식을 확장하고 개발하는 것입니다.
 
쿤은 이것을 문화권의 ‘생활양식’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어떤 문화권이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각의 생활양식이 있기 마련이며,
이러한 생활양식은 그 문화만의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타문화권에서 비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상대주의적 관점이 쿤의 패러다임을 입증하거나 허위화할 수 없게 만들고
패러다임간 상호 비교할 수 업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쿤의 상대주의에서 패러다임의 전환, 즉 과학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쿤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누적됨에 따라 그 패러다임의 문제 해결 능력이 과학자들 사이에 파급되면서,
급격하게 패러다임의 전면교체가 온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가 발견한 배가 멀리가면서 점차 사라지는 현상들,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금성의 발견,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하지만 목성을 중심으로 도는 4개의 위성과 같은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누적되면서,
기존 천동설의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지동설 패러다임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전에 쿤이 언급한 패러다임 간의 상호 비교 불가능성과 대치되면서 쿤의 상대주의는 모순점을 갖기도 합니다.
쿤의 처음 말대로라면, 문화 간의 생활양식을 서로 비교하여 우열을 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천동설과 지동설의 비교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쿤도 이러한 점이 상대주의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패러다임간의 불연속성,
즉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되는 것보다 혁명을 통해 급격히 변화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쿤의 상대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라카토쉬의 도구적 합리주의와 연구프로그램이 나오게 되며,
사회과학의 등장에 따라 베버의 해석학적 이해의 방법, 가치중립성이라는 것을 비판하며 나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리고 귀납과 연역의 방법뿐만 아니라 가추와 역행추론을 통한 ‘추상’의 방법을 제시하는 비판적 실재론까지,
과학철학 또한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금은 이해되셨나요 ㅠㅠ??
 
 
 
 
원래 주전공이 이런 과학철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건축디자인쪽이라
평소 취미로 읽은 책정도의 배경지식 밖에 이야기해드리질 못하겠네요 ㅠㅠ....
정확히 전달한건지는 잘모르겠구요.... 죄송합니다~ㅎㅎ 너그럽게!!
 
*내용은 지식의 성장이라는 책과 사회과학 방법론, 쿤의 과학혁명에서 참고한거라구
할 수 있겠네요!! 출처 있어요~ ㅠㅠ 상처주지 마셈 ㅠ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현 과학연구,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포퍼의 반증주의가 대부분의 과학연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여러 법칙들은 잠정적으로 수용된 진리일 뿐이지 틀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베오베에 글은 상대주의인식론의 회의주의적인 방식,
즉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논리는 큰 모순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과학이 틀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 상대주의에 논리를 비판하시려고 하셨던 것도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상대주의가 아닌 지금의 우리의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잠정적인 진리이며,
여러 모순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면 좋을거 같아서 이렇게 긴글을 씁니다 헤헤....
 
(그리고 종교 이야기도 있고 막 그런걸 보니, 혹시 종교를 중심으로 과학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었나요?? )
(배경지식이라 생각해주세요ㅎㅎ 비판을 위해 올린 글이 아니에요 ㅎㅎ)
 
혹시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신다면.... 감사합니다 ㅠㅠ 복받으실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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