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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대화의 무거움
게시물ID : phil_80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니미니미
추천 : 2
조회수 : 44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1/25 03:43:18

참을 수 없는 대화의 무거움

  한국 사회에선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의 대화에 있어 (특히 술자리에서) 나름의 사회적 규칙이 존재한다. "정치, 종교 대화"의 금지가 그중 하나이다. 혹여 하더라도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할 것을 권유한다. 타인의 정치 종교적 성향을 대화가 아닌 다른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쉽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니, 사실상 금지와 같다. 술자리의 윤리, 정치 종교테마의 금지는 기본적으로 공동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함이다. 역시나 주변에서 종종 보는 정치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나 조롱, 격한 감정이 섞인 고성으로 귀결되고는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불문율이 소통에 있어서의 갈등의 문제들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1. 신성한 '흥'깨지 않기 : 즐거움에의 강박

  소비의 시간에서 인간관계는 즐거움에대한 강박으로 가득하다. 관계에서 생성되는 다양성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는 즐거움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대화를 즐기는 사람과 즐거운 대화에의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 후자의 대화에서는 즐겁지 않은, 혹은 불쾌하거나 피곤한 대화가 용납될 여지가 없다. 그 강박이 더욱 심할수록 그렇다. 이러한 관계의 즐거움에의 강박은 처절함에서 온다. 노동하는 시간과 소비하는 시간이 양분되어있는 상황에서 소비하는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기 위한 갈망. 자신의 삶에대한 불만족이나, 노동하는 시간의 고통이 강할수록 즐거움에의 강박은 강화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여유가 없다. 한 시간이라도 즉각적으로 즐겁게 소비해내야만하고, 노동의 시간에는 소비의 시간이 그러해야만 할것이라는 강박이 존재방식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신성한 소비의 시간에 '흥'을 깨는 것은 꽤나 심각한 자신의 (즐거울)자유에의 침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의사표현을 자유의 침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부응하여, 인간관계에도 자유시장의 매커니즘을 도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2. 거세된 사회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써의 존재방식이 거세된 것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층위가 개별적, 혹은 무(無)의 차원으로 침전되는 것에 기인한다. 문화는 더이상 집단적, 공동체적이지 않으며, 정치경제사회적 담론들은 '앉을 자리가 없다'. 게오르그 짐멜이 지적했던 도시화된 (한국) 사회에서의 삶의 조건으로써의 상호무관심과 속내감추기는 타자, 더 나아가서 사회(담론)에 대한 무관심의 원인이기도 하며, 또 1980년대 이후로 저항적 문화라고 불리울것들이 사라졌고(2000년대이후 최근의 현상들은 잠시 논외로 한다.), 정치는 특히 경제를 그 준거 조건으로 삼는 동시에 '정치적인 것'을 '애국적인 것' 혹은 다른 관점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밥그릇 싸움' 정도로 위장시켰다. 사회적 존재로 존재하기가 척박한 환경임에 틀림은 없다.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이슈들은 개별적인 층위에서 개인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질 경우에나 관심있게 회자되는 정도이다. 


3. 취향과 중립주의

  흔히 정치나 종교는 취향의 차이이므로, 서로 존중하며, 더 나아가 혹자는 중립을 지키는 것을 표방한다고 까지 한다. '틀림'이 아니라'다름'이라는 슬로건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진정한 '틀림'조차 '다름'으로 치환되는 상황에 대한 담론조차 취향의 문제이므로 구태여 얘기할 필요 없는 것일까? 정치는 취향의 문제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의도에는 틀림을 다름으로 은닉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틀림'이 원칙과 가치에 따라 다를 순 있지만, 원칙과 가치를 초월하여 다를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이 틀린것 혹은 다른것이라고 말할때, 이미 하나의 원칙이나 가치가 내재되어있는 것이다. 판단기준이 없는 틀림은 없고, 비교기준이 없는 다름은 없다. "나의 정치성향과 너의 정치성향은 그냥 다른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의 가치(이를테면 극단적 상대주의)에 따라 비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치나 원칙에 대해서도 문제삼는것이 가능하다. '취향'은 선호이고, 선호는 다른것과의 비교를 통해 가능하다. 사실 이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미감적 판단에서도 동일하다. 어떠한 작품이 완성도있는 작품인가, 혹은 내가 선호하는 작품인가는 유사할수도 상이할수도 있다. 선호의 문제는 개인에게 맡겨두고서라도,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즉 '좋은'작품에 대한 논의는 유의미한 것이다. 이쯤되면 정치의 문제에서는 공리주의와 칸트의 정언명령에대한 '좋음'의 우위가 그저 개인의 취향에 좌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공리주의와 정언명령은 미루어 두고라도, '다름'에 기생하는 중립주의는 그 문제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중립은 '되어지는'것일수는 있으나, 중립을 행할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이나 가치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저절로 중립이 되지만, 중립 그 자체인 지점을 선택/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립은 판단을 유예하고있음에 다름아니다.  간혹 '중립편향주의'에서는 이른바 지구가 네모낳다는 사람들이 등장하자, 지구가 둥글다는 기존 학설과 신규 학설 사이에서 "지구는 둥그면서도 네모낳다"거나 "지구는 둥글기도하고 네모낳다"는 결론을 내리거나,  자명한 사실에서 뒷전으로 물러나 판단을 유예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4. 삶의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까지 - 주체화의 존재미학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말은 너무나 식상하리만치 많이 쓰인 말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한 측면을 잘 규정하고 있는 말도 없다. 물론 사회적 존재로써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는 모두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풀어나가야할 문제이다. 인간이 개인적 삶의 주체로써 자신의 삶을 함양해나가고, 더불어서 사회적으로 타인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임을 인식하여 사회적 주체로써도 활발히 참여할때, 공동체의 번영과 개인의 삶의 풍요를 기대할 수 있다. 삶의 존재로,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주체화가 필요하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있다. 선종의 최고봉으로 불리우는 임제가 남긴 말로,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이고 자유자재하다는 뜻이다. 이말을 현대의 우리가 음미해본다면, 실행에 옮기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금방 느낄 수 있다. 현대의 인간은 너무나 많은 것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돈이나 관념, 사람에대한 집착에서부터 우리가 자유롭지 않은 노동의 시간 등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목표가 불가능해보인다고 폐기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주인은 자기 삶의 원칙을 자신이 세운다. 자율이더라도 타율이 개입된 자율은 배제되며, 철저하게 온전히 자신의 원칙을 필요와 목적에 따라 끊임없이 세우고 폐기한다. 임제의 표현을 빌면 남들이 웃는다고 따라 웃지 않고, 남들이 짖는다고 따라 짖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주체화를 '지금 여기에서'실현하려 노력한다면, 사회적 존재로써의 주체화-사회적으로 합의된 상식과 가치들에 대한 이해와 개인의 경험적 편견을 넘어서서 사유하기, 그리고 바리케이드 너머의 타자와도 공존해야 한다는 자세-도 가능해질지 모른다. 그것이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도 이에 끝내 저항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 했던 오이디푸스처럼, 진정한 '인간정신'은 꿈이 가능성 혹은 실현불가능한것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 도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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