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 발자국
저렇게 푹푹 파이는 발자국을 남기며
나를 지나간 사람이 있었지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10월 中, 기형도)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너의 표정은 차갑고
너의 음성은 싸늘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화상을 입는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돌아와 이제 中, 최승자)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꽃아다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中, 최승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그리운 부석사 中, 정호승)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묻은 물건들이 걸을 때
나의 날들이 매달려 있다
하지 못한 말을 커튼에게 한다
수요일의 햇빛을 잡은 두 손은 어디 있나
말린 내 손을 맞잡으며 커튼을 닫았다
듣지 못할 말을 침대에게 한다
왜 오늘 밤은 천장에 별이 뜨지 않을까
접어 두었던 책을 어제를 위해 읽었다
놓지 못할 말을 신발장에게 한다
우리가 걷던 시계 없는 길은 벽이 되었나
초인종이 없이도 외출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없는데 방 안 가득
나를 아는 내가 있다
닦아도 닦아지지않는 시계가 있는 방
잊어도 잊히지 않는 달력이 있는 방
꿈에서 깨어도 다시 꿈을 꾸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