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극에는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사극이 주로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던 과거와 비교하면, 최근 분위기는 분명히 바람직하고 진일보하고 있다.
그런데 사극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에 비해 역사 고증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탓에, 옛날 사람들이 보면 아주 황당해 할 만한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극 속의 물가다.
기존의 사극 역시 옛날 물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은 고증 작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사극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사극에 비해 훨씬 더 엉터리 같은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노비 평균 몸값이 5냥인데, 1냥으로 떡을 먹어?예를 들어, 중종시대(1506~1544년)를 다루는 KBS <전우치>에서는 쌀 1섬이 5냥에 거래되고, 드라마 초반부에서는 전우치를 잡기 위한 현상금으로 5천 냥이 책정됐다가 지난 9일 제15부에서는 10만 냥이 책정됐다. 이 드라마 제8부에서는 "5천 냥이면 노비 몇 명을 면천시킬 수 있다"라는 대사가 나왔고, 제13부에서는 소송서류 1장을 대필해준 뒤에 "1냥만 줘요"라고 하는 대사가 나왔다.
참고로, 중종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의 거래에서는 포목이나 쌀이 화폐의 기능을 수행했다. 부유층이나 대상인들의 고액 거래에서는 은전이 사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 점은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하자. 이 시대에도 17세기 후반 이후처럼 동전이 사용됐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리고 현종시대(1659~1674년)를 다루는 MBC 드라마 <마의>에서는 비단신 1켤레가 1냥에 거래됐고, 의생시험(의과대 입시) 접수비로 5냥이 책정됐다. 또 이 드라마 제29부에서는 뱃삯이 10냥으로 나왔다.
위와 같이 최근의 사극들에서는 1냥의 가치가 상당히 낮게 평가돼 있다. 최근 한 사극에서는 1냥으로 떡을 사먹는 장면도 있었다. 극히 황당한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1냥이 몇 만 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
하지만, 상평통보 1냥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었다. 100푼(100닢)에 해당하는 1냥이 어느 정도의 가치였는가는 노비의 평균 몸값을 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 조선시대 시장의 풍경.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
ⓒ 김종성 | 관련사진보기 |
경제사학자인 김용만은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란 책에서 상평통보가 통용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거래된 노비 151명의 몸값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노비의 몸값은 일반적으로 5~20냥이었다. 5냥만 있으면 노비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 때는 40~50%였고 적어도 30% 이상은 됐다는 점, 노비들이 농업생산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5냥으로 노비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으로 치면 '5냥으로 노동자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다'는 말에 해당한다.
드라마 <전우치>에서는 '5천 냥이면 노비 몇 명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5천 냥이면 최고 1천 명의 노비를 평생 고용할 수 있었다. 대기업을 꾸릴 만한 거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1냥 즉 100푼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보수파가 정조 임금을 죽이기 위해 자객에게 지급한 수고비가 얼마였는지 살펴보면, 1냥의 가치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을 죽이는 대가로 받은 돈은 15냥사도세자를 죽인 보수파는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되자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그들은 지금의 동 직원에 해당하는 전흥문이란 사람을 자객으로 고용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전흥문은 정조 즉위 이듬해인 1777년에 서울 광화문광장의 왼쪽에 있는 경희궁에 침투했다.
신분증을 위조해서 궁궐 정문을 통과한 전흥문은 건물 지붕을 타고 정조의 침소까지 접근했다. 때마침 밤 늦게 책을 보고 있었던 정조는 이상한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옷을 벗지 않고 잠드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이상한 발자국 소리를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상한 발자국 소리의 진원지가 근처 건물의 지붕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자기 머리 위에서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정조는 고함을 쳤고, 전흥문은 급히 도주했다.
전흥문은 얼마 뒤에 제2차 시도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궁궐 담을 넘다가 경호원에게 발각되어 체포됐다. 그를 붙잡아 놓고 심문하는 과정에서 수고비의 액수도 밝혀졌다. 정조 1년 8월 11일자(1777년 9월 12일) <정조실록>에 의하면, 전흥문이 받은 수고비는 상평통보 15냥 즉 1500푼이었다.
왕을 죽여주는 대가로 15냥이 수수됐으니, 1냥이 얼마나 큰돈인지 명확히 드러난다. 수많은 사극에서 자객이 몇 천 냥의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확연히 대조적이다.
영조와 정조가 왕위에 있었던 18세기 중후반에 조선의 통화량은 300만 냥 정도였다. 사극에서처럼 자객에게 수천 냥을 지급하고 현상금으로 5천 냥을 지급하면, 얼마 안 가서 조선의 모든 돈은 자객 같은 사람들에게 죄다 집중되었을 것이다.
|
▲ 상평통보 1푼(1문). |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 관련사진보기 |
18세기 후반에 전흥문이 정조 암살의 사례비로 15냥을 받은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후기까지도 1냥은 상당히 높은 가치를 지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폐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는 1냥이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냥으로 떡을 사먹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옛날 거지들이 "한 푼만 줍쇼!"라고 했지 "한 냥만 줍쇼!"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까지도 동전 1푼이 적지 않은 가치를 지녔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사극에서 거래행위를 묘사할 때는 1냥보다는 1푼을 단위로 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평범한 서민이 시장에서 돈 몇 냥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버리는 장면은 조선시대의 경제 상황과는 너무나도 딴판이다. 1냥보다는 1푼을 단위로 하는 '통화개혁'을 단행한다면, 거래 행위와 관련된 사극의 오류는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사극 고증 좀 더 현실적으로 이뤄져야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드라마라고 해서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를 아무렇게나 묘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이나 스토리는 작가의 상상에 맡길 수 있지만,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만큼은 가급적 실제의 모습을 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자장면 값이 4500원으로 나오고 노동자 월급이 200만 원으로 나온다면, 이것이 얼마나 황당할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드라마가 나오면, 시청자들은 제작진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명한 소설가나 만화가들은 작품 하나를 쓰기 전에 고증 작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다. 카메라나 수첩을 들고 다니며 지형이나 지리를 세밀히 파악하는 작가도 있고, 식당 주방이나 법원 등을 찾아다니며 해당 업종의 상황을 철저히 조사하는 작가도 많다. 그러므로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고증작업을 게을리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많은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접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제작진 역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심정으로 사극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작진부터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야만, 좀 더 현실적이고 그럴싸한 사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