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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중국대륙의 군사관계-국가 발전과 주변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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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wp별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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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3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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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3/01/18 21:57:52

역사게시판

고조선과 중국대륙의 군사관계

[ 2. 국가 발전과 주변국과의 관계 ]

목차
  1. 1. 고조선의 국가 성장
  2. 2. 연과의 군사적 대립

1. 고조선의 국가 성장


 고조선은 웅녀(熊女)로 대표되는 신석기문화 집단과 환웅(桓雄)으로 상징되는 청동기문화 집단이 형성한 국가로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이른바 제정일치시대로서 군장인 단군왕검이 통치하는 성읍국가였다. 따라서 그 영역은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산재해 있는 여러 개의 성읍국가들이었다.


단군릉 (1930)

 그 후로 정치적 대군장이 다스리는 광범위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 연맹왕국을 통치하던 대군장은 ‘조선후(朝鮮侯)’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조선인들은 비교적 풍요로운 농경문화를 향유함으로써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왕을 비롯하여 정치 지도층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강력한 권력으로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여 사후에는 규모가 큰 지석묘(支石墓)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력의 축적과 인력의 동원 능력은 곧 고조선의 국력과 군사력으로 표출되었다.

 한편 이 무렵 고조선의 주위에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예맥(濊貊)·부여(夫餘)·진번(眞番)·임둔(臨屯)·진국(辰國)·숙신(肅愼) 등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출현하여 경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고조선은 제사와 정치를 주관하는 세습적인 통치자를 초기에는 ‘후’로 호칭하다가 중국대륙의 전국시대 열국들이 군장의 호칭을 ‘왕’으로 고쳐 부르자 이에 영향을 받아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즉 중국 전국시대 7웅의 연나라 역왕(易王) 10년(기원전 323)부터 칭왕하는 시대조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 후기로서, 진(晉)나라의 대부였던 한(韓)·위(魏)·조(趙) 3씨가 주(周)왕실에 의해 제후로 인정받은 기원전 403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렵 중국대륙 동북지역의 연(燕)나라가 점차 신흥강국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왕(昭王:기원전 311~279)은 중원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명사들을 중용하면서부터 국력을 급속도로 신장시켰다. 그 경과 연나라는 기원전 284년 진(秦)·초(楚)·한·위·조나라와 합종하여 중심세력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진·조·한·위나라와 연합하여 제(齊)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를 초토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으로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자 연나라는 한·위·조·진·초·제나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 동북지역의 군사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이들 6국은 보병부대를 주력으로 하는 전술로 전환하였는데, 이때 연나라도 보병전술을 도입함에 따라 국민 개병제를 채택하여 한·위나라와 함께 각각 60여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공성 및 수성무기들을 개발하고 강력한 청제무기로 무장하여 군사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기반 위에 철기문화를 받아들인 이래 기원전 4세기 말부터 기원전 3세기 초에 걸쳐 제철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철의 생산량이 증대되자 청동제 무기를 철제로 교체하여 철기시대 국가 형태로 발전하면서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생산도구를 철제로 개량하자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여 국가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대하였다. 이와 같이 고조선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경제력이 향상되어 국력도 크게 신장되었다. 즉 기원전 4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이미 요하(遼河)와 대동강 일대에 산재해 있던 크고 작은 다른 성읍국가들을 정복하거나 그들과 연합하여 광대한 영역을 확보한 집권적 영역국가로 발전하였다.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중국 정세

 한편 연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기존의 보병 전술에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도입하여 접목함으로써 군사력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즉,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북방민족의 기병전술을 도입하여 기병부대를 편성하고 이를 보병과 혼용하여 전황에 따라 적절히 운용한 결과 성과를 거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주변국들도 기병전술을 경쟁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전술의 획기적인 변화와 함께 한족 전체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중국대륙의 열국은 북방민족의 기병전술을 도입하여 전력을 강화하는 이외에도 각종 공성 및 수성무기들을 개발하여 무장하고, 열국간의 다양하고 풍부한 전쟁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주변 이민족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특히, 연나라는 중국대륙 동북지역에 위치하여 이민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으므로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높았다. 연나라가 동북쪽으로 국경을 접한 북방 유목민족의 일파인 산융(山戎)과 동호(東胡)를 압박하여 영토확장을 시도하자 고조선과도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졌고, 동북아시아의 긴장도 고조될 수 밖에 없었다.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중국 춘추시대의 제나라와 경제·문화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전국시대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연나라와도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조선은 주로 활·과하마·모피류 등과 같은 특산품과 기타 수공업제품, 해산물 등을 수출하고 장신구와 같은 사치품들을 수입하였다.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도 고조선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그리고 중국대륙의 제후국과 남방의 여러 나라와도 무역을 전개하였으므로 고조선이 중요한 교역국으로서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은 중국대륙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무역활동과 국내생산량의 증가로 국력이 향상되자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대외관계에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간 교류의 변화에 따라 중국 전국시대 중기 이후로는 전쟁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소규모의 단기전 양상에서 수개월 또는 수년이 소요되는 대규모 장기전으로 변화되자 동원 병력 역시 수십만 명 넘는 경우도 있었다.


2. 연과의 군사적 대립


 연나라 소왕(昭王)이 팽창정책을 추진하자 주변지역 국가들도 요서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소왕이 기원전 284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어러 성을 점령하고 중국대륙의 전국 7웅 중에서 패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동북지역 이민족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동호(東胡)가 연나라의 강압적 요구에 불응하면서 긴장관계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연나라 소왕은 진개(秦開)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동호를 공격하였다. 당시 연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호를 압박하여 1천여 리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 같은 영토확장 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요서지역의 지배권을 선점하기 위해 새로운 침공 계획을 세웠다. 이때 고조선은 연나라의 영토확장 야심을 간파하고 선제공격으로 요서지역을 쟁취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양국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고조선과 연의 전쟁 (기원전 300년 경)

 고조선과 연나라 변경지역에서 무력충돌의 위기가 고조되자 고조선의 상신(相臣)인 대부(大夫) 예(禮)가 양국의 대립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이로 인해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그 후로 고조선이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다시 확장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자 양국의 국경지역에는 긴장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고조선은 연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천연 장애물인 대릉하(大凌河)와 그 동쪽 의무려산(醫無閭山)을 이용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고조선군은 연군의 공세에 밀려 후방지역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조선은 연군의 침공을 격퇴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물러나자 대릉하 유역에서 동쪽으로 요하 유역에 이르는 1천여 리 영역을 상실한 채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천연 경계선인 천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연나라와 대치하게 된 것이다.

 연나라는 동호 및 고조선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각각 1천여 리 씩 2천여 리의 광범위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그 후로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기까지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遼東) 등 5개 군(郡)을 설치하고 각 군의 요지에 군대를 주둔시켜 군사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상곡군에 소속된 조양(造陽 : 현 요녕성 조양시)에서 동쪽으로 요하(遼河)에 이르는 동북지역을 동서로 횡단하여 장성을 축조하고 동호족의 남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고조선은 연나라와 천산산맥을 경계로 대치하게 되자 요하 중류지역에 있던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기고 이를 왕검성(王儉城)이라 명명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 내륙지역으로 천도하여 안전지대에 정착한 고조선은 중국대륙의 침략세력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공격을 완화시킬수 있었다.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

 그 후 연나라는 혜왕(惠王 : 기원전 278~272) 시대에 이르자 내부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어 광범위한 영토를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이 크게 약화되었다. 인구가 희소하고 생산성도 저조한 여러 군사거점에 군대를 주둔시킨 결과 막대한 군사비가 소요되었고, 그에 따라 국민 경제도 악화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과거 연나라의 공격을 받고 영토를 빼앗겼던 제나라에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제나라가 연나라에 보복 침공을 감행한 결과, 연나라는 전성기 시절에 점력했던 제나라 영토를 내어주고 판도가 축소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연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주변 6국들은 근 반세기 동안 연나라를 부단히 공격하였다. 국력이 극도록 약화된 연나라는 기원전 226년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도 앞서 연나라에 빼앗겼던 요하유역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 고조선은 진나라가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침공하여 희왕(僖王)을 생포하고 요동지역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자 요하 일대를 접경으로 하여 대립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회과학

한중군사관계사 : 고조선~조선

저자명
서인한
문서유형
동향/연구보고서
발행정보
국방부 |2007년 |한국 |한국어
서지링크
국회도서관 (청구기호 355.03109510952 ㅅ222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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