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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중국대륙의 군사관계-개관
게시물ID : history_72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p별sp
추천 : 10
조회수 : 93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1/18 17:08:55

역사게시판

고조선과 중국대륙의 군사관계

[ 1. 개관 ]


*. 개관

한국사에서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조선을 국호로 사용한 한민족 최초의 국가다. 우리 역사의 시작 단계인 고조선은 한민족이 중국대륙의 여러 국가나 민족과 관계를 형성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역사학계는 고조선 연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관련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고조선의 건국시기, 영역 범위, 종족 구성, 국가 구조, 대외 전쟁, 문화 특성 등에 관한 연구 성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도 정확하지 않다. 문헌에 의해 확인되는 기간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기 약 500여 년이다. 당시 중국대륙은 춘추전국시대의 후기라 할 수 있는 전국시대를 거쳐 진, 한나라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403년경, 고조선이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국가는 연나라였다.



중국 대륙의 동북지역을 차지한 연나라는 제나라의 침공을 받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311년 즉위한 소왕(기원전 311~279)이 중원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등 국가부흥정책을 추진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급성장하였다. 연나라는 합종을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서 제나라에 보복 침공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연나라와 같은 전국시대 열국들은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군사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북방민족의 기변전술을 도입하여 보기(보기) 합동전술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시대 중기 이후 군사강국으로 성장한 연나라는 북쪽으로 팽창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 대상이 유목민족의 일파인 동호이었다. 동호가 조공을 거절하자 진개를 사령관으로 삼아 기원전 300년경 침공을 단행했다. 그는 동호에서 억류 생활을 하다가 탈출해 온 인물이었다. 이때 연나라가 승리한 후로 세력권을 확장하면서 고조선과 접촉하게 되었다. 고조선은 진개가 지휘하는 연군의 침공을 받았다. 역사 기록의 부족으로 전쟁 과정을 알 수는 없으나, 고조선은 패전하고, 동호와 마찬가지로 후퇴하여 광범위한 완층지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연나라가 혜왕(기원전 278~272) 시대에 국력이 약화되고 제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는 등 군사 환경이 변화하자 이 무렵 고조선이 일부 지역을 재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고조선이 중국대륙과 군사관계를 형성하는 때는 한나라가 출범한 기원전 202년 후로 10여 년이 경과하면서부터였다. 연왕에 책봉된 노관이 기원전 195년 흉노 지역으로 탈출한 후로 발생한 유이민집단의 우두머리인 위만이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을 축출하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면서 위만조선과 한나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것이다.

위만조선도 역시 중국대륙의 통일국가인 한나라와 유대를 강화하여 선진문물을 유입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한나라도 건국 후 10여년이 경과하여 대내외적으로 안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당시 위만은 한나라의 주변국들을 안정시키는 군사적 임무를 대행하는 조건으로 한나라의 정치,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 내었다. 즉 요동지역 주변의 이민족들이 한나라 외곽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맞아주며, 반대로 이민족 군장들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나라와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외곽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위만조선이 급성장하자 이를 우려하는 한나라 일부 세력이 문제(기원전 179~157)에게 고조선 침공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경제(기원전 156~142)를 거쳐 무제(기원전 141~88)가 즉위하여 흉노족 축출전쟁을 벌이는 10년 동안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침공할 수 없었다. 이때 위만조선은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면서 국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고조선은 한나라가 기원전 119년 흉노족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최대의 위협 세력인 흉노족을 무력으로 축출한 무제가 여세를 몰아 팽창정책을 추진하면서 고조선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한나라에서 넘어오는 유민들을 무제한 수용하자 더욱 더 한나라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한강 이남의 진국(진국) 등 주변국들과 한나라의 교역에 개입하여, 중개무역을 독정함으로써 경제력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민들의 이주 문제는 인적 자원의 유출이라는 차원에서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우거왕이 즉위한 이래로 한나라에 의례적으로 보내던 예물도 중단하는가 하면, 주변국 사절의 한나라 입조마저 중간에서 차단하자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라는 고조선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고조선의 내정을 살피기 위한 일종의 감시단이었다. 고조선은 강경정책으로 일관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철저히 제약하였고 아예 한 무제의 친서조차 수교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돌아가던 한나라 사절단은 한 무제의 문책이 두려워 자신들을 호위해 주던 고조선 장수를 귀국 도중에 살해하여 그 수급을 한 무제에게 받쳐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다. 이사건으로 인해 고조선은 한나라에 대한 적대감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그런데 사절단장 섭하가 요동군의 3부 중에서 고조선과 근접한 동부 무차현의 동부도위로 부임하자, 고조선군이 보복 침공을 단행하여 그를 상해하였다. 양국간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한나라는 동부도위 살해 사건을 빌미로 기원전 109년 가을, 수륙 양면으로 침공군을 편성하여 고조선 침공을 단행하였다.

육로군 5만 명을 주력으로 하면서 수로군 7천 명이 조공부대로 편성되었다. 앞서 흉노 축출 전쟁에 비해 병력이 소규모인 것은 고조선 군사력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예상과 달리 초기 전투에 기선을 제압하면서 유리한 입장에서 한나라 침공군을 압박하였다. 결국 한나라는 전력을 보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협상을 통해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려고 강화사절을 파견했다. 우거왕은 전쟁 상황에도 불구하고 강화 사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나라 협상 사절단과 육로군 사령관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면서 양국간 협상은 깨어지고 대립관계만 심화되었다. 결국 한나라가 협상을 포기하고 정면 돌파로 방침을 바꿈에 따라 수도 왕검성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침공군의 육로군과 수로군 사령관이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하자 고조선 수뇌부가 이 틈을 이용하여 침공부대에 내분을 조장함으로써 지휘체계를 혼란시켰다. 한나라 무제가 침공군의 지휘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으나, 그 역시 한무제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혼선만 초래한 죄로 처형되었다. 이 무렵 고조선 수뇌부는 이를 역전의 기회로 이용하지 못하고 자중지란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항복을 주장하는 강화파와 강경파의 대립으로 수뇌부의 내분이 발생하고, 그 일부가 도성을 탈출하여 적진에 투항하는 사태로 고조선 정권은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109년 멸망한 고조선은 위만조선 시대에 중국대륙의 한나라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이래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내부적 발전에 충실했다. 특히 한나라의 외번으로서 중국대륙 동북지역의 안정을 군사적으로 보장해주고, 그 대신 한나라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내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나라와 대립하지 않고 선린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위만조선의 실리적인 대외정책에 기인하기도 했으나, 당시 한나라가 숙적 흉노족과 대립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던 군사적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나라 무제가 건국이후 흉노족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자, 고조선의 대외적 군사환경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한 무제는 흉노족을 무력으로 축출한 여세를 몰아 통일왕조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우거왕은 이러한 군사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 한 채 한나라와 적대적 관계로 일관하였다. 고조선 우거왕과 수뇌부가 한나라의 새로운 관계 정립 요구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고, 결국 내분의 발생으로 인해 대응역량이 약화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된것이다.


사회과학

한중군사관계사 : 고조선~조선

저자명
서인한
문서유형
동향/연구보고서
발행정보
국방부 |2007년 |한국 |한국어
서지링크
국회도서관 (청구기호 355.03109510952 ㅅ222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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