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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비잔티움 제국사 (3) - 로마의 박남정, 현진영들
게시물ID : history_72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6
조회수 : 5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15 20:39:11

http://cafe.daum.net/shogun의 마법의활 님이 쓰신 글입니다.

 

앞서 글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치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 적시에 등장한 체제 개혁자인양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체제 개혁을 단행할 시간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고, 그 역시 전임

자들이 수행했던 과업을 여전히 수행해야 했습니다.

진압과 외세의 침공 에 대한 대응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그것에 대응해나갈 만한 “수단”이 있었습니다.

저 멀리 세베루스 왕조 때부터 단행된 군사 개혁의 단초는 갈리에누스,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어느 정도 완성을 보았고, 제국은 새로이 맞이한 위기 상황을 타개할 도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손에 쥐어진 그 도구는, 제국의 수술을 단행하는 데 있어 실로 효율적인 메스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맞이한 위기 상황이란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해결할 도구란 무엇이었을까?

예전의 제국은 전 국경선에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었습니다. 경제력이 왕성할 때의 제국은 군단병 - 보조병 - 파트 타임 병사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황제들의 카드 돌려막기가 슬슬 빵꾸가 나기 시작하면서, 취약성을 띄는 국경 지역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방 한 군데에 물이 새면 다른 부분도 무너지는 것처럼 제국의 국경선 방어 전략의 취약성은 날로 심해져 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 한무제의 흉노 토벌로 시작된 야만족 서진의 도미노는 뒤늦게 하드리아누스 때부터 로마 제국에 밀어닥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패턴이 나중에 또 벌어지는 데, 꽤 나중이 되면 우리는 이들과 다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국경 방어 능력의 약화 & 국경 지대에서 가해지는 압력의 강화. 댐이 노후화되가는 시점에 하필이면 홍수가 덮쳐 담수량이 마구 불어난 것 같은 절묘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제 더 이상 원수정 시대의 국경선 방어 전략을 고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국은 기병 급습, 장거리 무기 투척 전술을 구사하는 적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본격적인 종심 방어 전략의 채용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 여담. 어떤 분께서는 국경선 방어 전략을 포기한 이 것이 “파밀리아” 개념을 포기한 것이라며 그것이 “로마다운 점”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로마가 로마다우려면 누군가가 좋아하는 장점을 유지한 채 망해버려야 한다는 애긴데, 그런 애기 당대의 로마인들이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지 저는 그것이 심히 의문입니다.)

우선 종심 방어를 위해서는 종래의 보병보다는 기병 중시가, 그리고 국경선 방어를 전담하지 않는 기동 타격대의 아이디어가 필요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 때에 본격적으로 저 페르시아 방식의 중무장 기병대, 클리바나리의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차용되기 시작했고, 카라칼라 황제 때는 드디어 기동 타격대 개념이 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종심 방어 전략의 아이디어는, 갈리에누스 황제에 의해 획기적인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사족이지만 중장 기병대에 대한 외인 부대 활용은 이미 트라야누스 황제가 단행한 바 있으며, 위급시 기동 타격대 역할을 위한 종심 방어 군단의 창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시행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확대라는 점에 있어서는 썩 큰 의의가 없으므로 -그때는 제국이 그런 거 안해도 잘해나갈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 생략하도록 합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 기지를 둔 예비대를 창설했고,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거기에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가 새로이 “로마군”에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갈리에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글에서 언급한 죽음의 사이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죽었으나, 그가 로마군에 남긴 유산은 그보다 군사적인 능력이 더욱 뛰어났던 후임자들에 의해 실전에서 본격적으로 실험을 거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 중장 기병대, ‘클리바나리‘ 의 확대라는 과제는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됩니다.

( 게이볼그 님이 쓰신 [중세 전쟁사 정리]-2)비잔티움(초기~니네베 전투) - 게시판 5121번 글에 나타나는 비잔티움 제국 군이 대략의 윤곽을 드러내는 모습이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합니다. )

원수정 시대의 황제들이 설계도를 그렸고, 갈리에누스가 조립했으며,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실증과 보완을 거친 ‘후기 로마군’.

디오클레티아누스 손에 쥐어진 도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여기까지만 했다면 그 역시 그 앞의 군인 황제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로마의 황제 판에 업무 분담과 상호 보조를 필요로 하는 그룹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황제였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이 로마판 서태지와 아이들, 즉 디오클과 아이들이 무슨 활약을 하였으며, 또 무슨 과제를 남겼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면 디오클과 아이들은 듀엣이었다가, 나중에 4인조 그룹으로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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