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주인장(朱印狀)을 발급하여 주인선(朱印船)의 해외무역을 장려하였습니다.
경제규모로 따지자면, 이들의 은 거래 규모는 당시 전세계 은 거래량의 1/3을 차지했습니다.
이들 해외 무역에 종사하는 일본인 상인집단들은 동남아시아에 눌러 살며 일본인집단거주촌을 형성하기도 했어요.
심지어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라는 상인은 아유타야 왕국(현 태국)의 군사 고문으로 재직함으로써
태국의 남쪽 반도 지역을 다스리는 태수로까지 임명됐죠.
밑의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했던 일본 북부 센다이의 다이묘 중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인 "하세쿠라 츠네나가"입니다.
(동양인을 그린 최초의 유화)
근데 왜 일본인이 서양 풍의 옷차림을 하고 있느냐고요???
에스파냐의 모험가이자 외교 사절단인 "세바스찬 비스카이노"의 도움으로
에도 막부는 서양식 배를 건조하여 하세쿠라 츠네나가를 해외로 파견보냅니다.
두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4천명 가량의 노동력이 6개월간 투입돼 건조된 500톤급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San Juan Bautista)"
(임진왜란 당시 서양식 갈레온 선박 건조 기술이 일본에 없었던것이 천만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대서양, 태평양을 종횡무진하던 갈레온 선들이
임진왜란 당시 존재했다면, 일본은 해상 물자 보급이 짤려먹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1613년 10월, 약 180명에 달하는 시찰단은 미야기현에서 에스파냐와 로마로 출항합니다. 장거리 항해에 우수한 서양식 갈레온 선박에 힘입어 3개월 후,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도착했습니다. 견구시찰단은 1614년 6월, 에스파냐 선박에 편승해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서양인들의 깊은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2월즈음 마드리드에 도착합니다. 이 즈음해서, 일본 본토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막부의 기리시탄 박해(천주교 박해)가 한창이었습니다. 이들 시찰단 대부분은 독실한 천주교신자였기에 본토로 귀국하지 않고 세비야 남쪽에 코리아 델 리오 (Coria del Rio)라는 곳에 정착했다고 하네요. 일본의 갑작스런 쇄국정책으로 인해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시찰단은 기대했던 것 보다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서양에 일본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죠.)
정말 만약에, 그 당시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고 서양과의 교류를 이어갔다면, 메이지유신 보다 약 200년 앞서 아시아의 유럽국가로 재탄생하여 동아시아 패권을 움켜잡고 서양열강과 식민지 경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 다행히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야욕은 생각보다 역사가 깊은 것 같습니다, 하긴 허구헌날 "왜구"라고 멸시받던 일본으로서는 서양의 실용적인 문물에 관심을 보였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확실한 건, 중화사상과 입신양명이라는 유교 이념에 입각한 조선의 외교정책은 급변하는 세계사 흐름에 반했던 것 같습니다. 파이어니어(pioneer), 개척정신이야 말로 17C 이후 세계사에 있어 생존하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당시 조선의 기조에 어울리지 않았던 "광해군"과 "소현세자"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조선도 정말 강해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