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한미관계를돌아본다⑦] 모스크바 3상회의와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게시물ID : history_135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리사회연구
추천 : 3
조회수 : 42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1/16 11:59:23

이동훈 상임연구원


미국과 소련은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담을 통해 조선을 적절한 과정을 거쳐 독립 시켜준다는 것에 합의했고 38선을 기준으로 분할점령했다. 그러나 미소 사이에는 “적절한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없었다. 1945년 12월에 열린 미, 소, 영 3개국 외무장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적절한 과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


1945년 12월 16일 미국과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이 참석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다. 미국은 미소 양군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고 교통·통신·체신·교역·산업 등 일체의 현안을 취급할 단일행정부의 조속한 수립과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신탁통치는 자체 통치능력이 없는 지역에 국제연합의 신탁을 받은 국가가 국제연합 총회 및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독을 받아 자체 통치 능력을 갖출 때까지 대신 통치해 주는 제도이다. 미국의 제안에 따르면 한국인은 어떠한 결정권도 없이 의견을 제시하는 고문정도의 자격만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제안에는 신탁통치의 기한을 5년으로 하고 5년을 더 연장할 수도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들고 나온 것은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해방운동 세력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식민지 지역에서 구 제국주의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민족운동이 고양되자 미국은 분출하는 민족운동을 제어하고 식민지 지역을 향후 친미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신탁통치를 고안한 것이다. 이런 구상은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제안에 대해 소련은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소련은 강대국에 의한 대리 통치 계획에 반대하고 한국인 스스로에 의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미·소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남과 북의 민주적 정당들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해 〈임시적인 민주적 코리아 정부〉를 만들어 내자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안이 미소 양군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한 행정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소련의 안은 미소가 위원회를 만들고 위원회에서 조선인 조직과 논의하여 조선인 임시정부를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한국인 임시정부의 유무가 미국 제안과 소련 제안의 가장 큰 차이였다. 여기에다가 소련은 신탁통치라는 표현보다 후견이라는 뜻이 강한 〈아뻬까〉라는 표현을 쓰고 그 기간도 〈5년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이 제시한 후견 수준의 〈아뻬까〉는 한국인이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임시정부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개념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 소련 측 안이 거의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소련이 강대국에 의한 대리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미국이 주장한 직접통치식의 신탁통치는 합의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회담 전부터 신탁통치 방안을 밀어붙일 경우에 있을 38선 이남의 민중들의 엄청난 반발과 한국에서 진보적인 세력의 영향력이 친미 보수세력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도 고려했을 것이다. 심지어 미군정조차 당시의 격동적 상황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가시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1) 미군정의 자치기구 탄압과 정책실패로 인한 민생고로 38선 이남의 민중들이 미군정에 대해 가진 불만이 계속 커져가고 있었다2)는 점도 미군정의 보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때까지 직접통치하는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진했으나 위의 요인들 때문에 소련이 제안한 후견형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핵심적인 내용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만들고, ▲미소공위가 남북의 민주적 정당들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세우고, ▲미소영중 4개국은 임시정부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신탁통치-사실상 후견-하는 위치에 머무르며, ▲그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 여부도 미소양국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임시정부가 먼저 세워진 후 임시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한 다음에 검토한다고 결정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론을 따를 경우 미소의 의견보다 조선인들의 결정이 신탁통치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요인이 된 것이다. 


'신탁통치안'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영,소,중 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시간에 걸친 일본 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쾌속히 청산한 제 조건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창건되는데 임시정부는 조선의 산업, 운수, 농촌경제 및 조선 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조직에 협력하며 이에 적응할 제 방책을 예비 작성하기 위한 남조선 미군 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 대표들로써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서의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위원회에 대표로 되어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 영, 중, 소 제국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3. 공동위원회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 민주주의 제 단체를 인입하여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조선 독립의 확립을 위한 원조 협력(후견)하는 제 방책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 후 5 년 이내의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 개국 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중, 소 제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4. 남북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그리고 남조선 미군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의 행정 및 경제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 방책을 작성하기 위하여 2 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국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3) 


모스크바 3상회의는 미국의 의도했던 직접 통치형식의 신탁통치가 아니라 남북한을 포괄하는 민주적인 임시정부 수립과 임시정부와의 협의 후 후견 수준의 신탁통치로, 한국인의 권한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되자 자주적인 조선인들을 제압하고 친미정부를 세워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아래 두겠다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또한 해방 후 혁명적인 상황에 숨죽이면서 신탁통치를 통한 미국의 통치를 통해 재기를 노리고 있던 친일-친미 보수세력에게도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된다면 그만큼 그들이 설 땅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민족의 자주독립 열망에 의해 미국의 친미정부 수립기도는 무너질 수도 있었다. 위기에 빠진 친미세력은 "동아일보의 기사 왜곡사건"에 이은 이른바 "반탁"으로 활개칠 수 있었고 친일 민족반역세력도 그 틈바구니에서 재생하게 되었다.


3moscova

▲ 동아일보 1면 사진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27일 1면 머리기사로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을 실었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공식 발표되기 하루 전, 주한 미군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나온 관측보도로서 3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도 전혀 다른 왜곡보도였다.4)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전하는 기사에서도 동아일보는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내용은 축소하고 임시정부 수립 후에야 논의하기로 되어 있는 “신탁통치 실시”의 내용을 대서특필 하는 등 왜곡보도를 계속했다.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를 등에 업고 한민당과 이승만 등의 세력은 이른바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미명 하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자주독립을 간절히 원하던 민중들도 회의의 진상을 모른 채 동아일보의 왜곡보도에 격분하여 반탁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친일세력과 지주세력들은 반탁을 주장하면서 자신을 애국자로 자처하는 한편,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왜곡보도를 퍼트리며 반탁투쟁을 반소, 반공투쟁으로 만들어가려 했다.5)


한편 왜곡보도로 가려졌던 모스크바 3상회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점차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월 2일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미·영·중·소 4개국에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전문을 보내고 1월 4일에 결정서를 발표하였으며 38선 이북에서는 1월 2일 김일성과 김두봉의 이름으로 낸 공동성명서를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38선 이남의 조선공산당 역시 1월 2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1월 3일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운형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이후 중도파라고 할 수 있는 김규식과 안재홍 등과 함께 “선 임정 수립, 후 탁치 반대”의 내용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일부 지지를 표명했다. 심지어 친일우파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송진우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주장했다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를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의 유일한 국제적 합의로 인식했다. 그래서 이 합의가 반드시 실현되도록 노력하되 하루빨리 임시정부를 구성해서 민족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신탁통치 가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왜곡보도를 주도했나


미군정의 의해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지고, 언론이 정간과 폐간 등의 조치를 받았던 시기에 동아일보의 왜곡보도가 신속하게 38선 이남지역에 확산된 것은 미군정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서울대학교 정용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는 합동통신사를 출처로 하고 있으나 정확한 출처는 태평양방면 미국 군인들을 위해 일간으로 발행하던 〈태평양성조기〉(Pacific Stars and Stripes)지 12월 27일자 기사라고 한다. 그러나 〈태평양성조기〉와 동아일보 모두 12월 27일자 기사라는 점에 주목하면 동아일보 기사의 출처가 〈태평양성조기〉기사라는 것도 성립되기 어렵다. 당시 통신 수준을 감안할 때 동아일보가 〈태평양성조기〉의 기사를 출처로 삼기 위해서는 최소 하루의 차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아일보 왜곡기사와 〈태평양성조기〉 기사는 같은 출처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정용욱 교수는 동아일보의 출처로 알려진 합동통신사와 일본의 〈태평양성조기〉에 정보를 제공하여 기사를 퍼트릴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는 미군정이나 맥아더 사령부정도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6)


미군정과 맥아더 사령부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왜곡할 만한 이유도 있었다. 맥아더는 38선 이남의 민중들의 신탁통치 반대 분위기에 대해 주시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1945년 12월 16일 합동참모부로 보내는 전문을 통해 “남한에서 미국은 분할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 남한에는 일체의 미국적인 것에 대한 분노가 증대되고” 있고,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부일협력자에 친미라는 용어가 추가되고 있다고 주시하면서 “신탁통치가 부과되는 경우, 한국인은 실제적으로 물리적인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7) 맥아더와 미군정이 38선 이남 민중들의 신탁통치에 대한 반감을 이용한 여론조작에 나섰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미국이 이른바 신탁통치 문제를 정략적으로 악용했다는 것은 다음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미군정이 박헌영의 언론 인터뷰를 왜곡하여 반공, 반소 분위기를 고조시키려 한 것이다. 1946년 1월 5일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뉴욕타임즈〉 통신원 리처드 죤스톤이 박헌영이 말한 내용을 왜곡하고, 미군정이 이를 의도적으로 확대했다. 박헌영은 인터뷰에서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가령 된다 해도 소비에트 조선은 언제나 독립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죤스톤은 이를 교묘히 짜깁기 하여 “박헌영은 조선이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다. 또 조선이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이 편입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내용의 왜곡기사를 작성했다. 정작 존스톤의 기사는 미국으로 송신허가가 나지 않아 〈뉴욕타임즈〉에 보도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하지와 미군정은 죤스톤이 작성한 기사 메모에 주목했다. 미군정은 자신들이 작성하는 〈G-2 주간정보요약〉에 죤스톤의 왜곡기사를 반영하였고 결국 이 내용은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방송 이후 국내우익 계열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조선공산당 등의 좌파 세력을 매국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사건이 커지자 박헌영 측은 죤스톤의 왜곡기사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박헌영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한국인 기자 12명도 왜곡을 해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1월 22일 작성된 〈G-2 주간정보요약〉 19호는 박헌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은 전파되고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쓰고, “1월 20일에 이르러서는 그 회견내용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헌영-죤스톤 사건 과정에서 미군정은 죤스톤의 기사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방조했고 왜곡된 내용이 38선 이남에 퍼질 때에도 침묵했다. 미군정은 박헌영-죤스톤 회견을 여론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좌파를 약화시키고 신탁통치와 소련을 연결시켜 반탁운동을 반소운동과 연결시키려 했다.8)


주한정치고문사무소 요원이던 에몬스(Arthur B. Emmons) 3세가 1945년 12월 30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선동의 화살은 최장 5년 기한의 신탁통치 전망의 주변에 집중”되어 “한국인들은 신탁통치안을 그 최장 기한(5년)을 포괄하는 것으로 된 하나의 ‘기정사실’로 해석함으로써 민중의 분노가 소련군과 한국인 정치지도자들에게 향해짐으로써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군사보호 혹은 독재의 형태로 해석하던 신탁통치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미국은 벗어나”있게 됐다고 보고한 내용이 있다.9) 동아일보 왜곡보도 사건을 통해 미국이 신탁통치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소련으로 돌렸다는 내용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에 대한 동아일보를 주축으로 하는 친미 보수언론의 왜곡과 이에 대한 미군정의 방조가 계속되자 소련은 1월 24일 타스통신을 통해 미소공위 과정과 미국 측과소련 측의 입장을 공개했다. 타스통신의 보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에 의해 38선 이남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말이 보도통제가 되어 내용이 알려지지 않자 미소공위 논의를 위해 서울에 와 있던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1946년 1월 26일,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와 전말을 공개하였다. 미국 측은 타스통신의 보도에 대해 대체로 침묵했으며 애치슨이 타스통신 보도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줌으로써 사실상 소련의 주장에 수긍했다. 간헐적으로 알려지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가 만천하에 공개되자 반탁운동의 근거가 사실상 사라졌으나 이미 반탁운동을 통해 “친일파”와 “분단세력”들은 일정정도 정치적 성과를 거둔 후였다.10)
 

----------


미국은 자기 주도의 한반도 신탁통치를 획책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직접통치 형태의 신탁통치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련이 직접통치 형태의 신탁통치를 반대해 나서고 신탁통치에 대한 한반도 민중들의 엄청난 반발 가능성과 38선 이남에서 커져가는 미군정에 대한 반발 가능성 등의 이유 때문에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미국은 신탁통치가 여의치 않자 왜곡보도를 조장하고 방조함으로써 신탁통치 주장에 대한 책임을 소련과 좌파에게 전가시키고 이른바 반탁운동을 통해 친미세력을 키우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는 한반도에 친미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주석


1) 맥아더는 12월 16일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문에 한국인의 즉시 독립 요구를 언급하면서 현재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으로 “신탁통치”를 포기한다는 성명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국태 편, 『해방3년과 미국 I』 돌베개, pp. 169-172. 『사료로 보는 한국사』에서 재인용


2) 한국여론협회가 1946년 8월 중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미군정이 잘한 점은 위생시설이라는 응답이 2%였고 나머지 98%는 잘한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1』, 돌베개, p71


3)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pp. 53


4)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의 결정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시는 12월 28일 정오, 서울 시간으로는 28일 오후 6시였다. 적어도 2일 전에 기사를 받아 인쇄를 한 셈이다. 또한 ‘관측이 농후’, ‘받았다고 하는데’, ‘불명하나’ 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추측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번즈 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 등 사실과 다른 허위 보도를 하고 있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김동민,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에서 재인용


5) 한민당과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투쟁을 임시정부 추대운동의 일환으로 진행했다. 임시정부 세력은 1945년 12월 30일 포고령을 내려 전국민 총파업을 지시하고 미군정 소속의 경찰기구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선인 직원은 전부 임정의 지휘하에 예속케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국자 1호를 발표하는 등 미군정에게 정권이양을 요구하고 정부를 접수하려 했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심지어 임시정부 요인들을 검거하고 추방하려고까지 하였으나 김구를 불러 경고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김구는 하지와의 면담 이후 “신탁통치 반대가 목적이지 군정을 반대하거나 동포들의 일상생활을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 복귀하기를 바란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군정의 요구에 굴복했고 임시정부의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6)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pp. 155~171


7) 김국태 옮김/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1984). 해방3년과 미국, 돌베개. pp. 169~171. 김동민,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에서 재인용


8) 박헌영·죤스톤 기자회견 사건과 관련해서는 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에 있는 「사료로 보는 한국사」 「NO.4 한반도 신탁통치안」의 내용을 참조


9) 김국태 옮김/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1984). 해방3년과 미국, 돌베개, p178~179. 김동민,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에서 재인용


10) 미국의 하지는 “흥미있는 것은 반탁소동으로 빨갱이와 백파가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양쪽이 다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사관기장」 1946. 1. 2(『해방직후 정치ᐧ사회자 자료집』 1권, 1994, 다락방, 174쪽)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