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백 쉰 세 번째 이야기 | |
서민의 삶이 퍅퍅한 시대, 잠곡 김육을 그리다 | 흔히 조선조의 인물 중 존경하는 인물을 손꼽으라고 하면, 대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퇴계 이황이 이룬 학문의 경지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대단하였고,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여러 서책은 우리 사회의 각 방면에 걸쳐 갖가지 개혁방안을 말하고 있다. 조선조에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이 얼마나 한심했겠으며, 우리의 사상계는 그야말로 썰렁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참으로 대단한 분들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퇴계나 다산의 학문과 사상이 당대 백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인해 백성의 삶이 개선되었을까?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로 인해 백성의 생활이 나아졌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백성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어서는 이분들의 학문과 사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조선조의 인물들 가운데 백성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누구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란 인물이다. | 군자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경우, 어려서는 힘써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여서는 그것을 시행하고자 하는 법이다. 천작(天爵)인 도덕(道德)을 수양하여 인작(人爵)인 관직을 받는 것이 어찌 유독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명예만을 노려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장차 배운 바를 시행하여 백성에게 펴고자 해서인 것이다.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질 것 없이 진실로 그 뜻을 시행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면, 성현들이 한 말을 법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한 고을에 시행하면 한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고, 한 나라에 시행하면 한 나라의 백성이 편안하며, 온 천하에 시행하면 온 천하의 백성이 편안해져야 한다. 마음을 바루고, 자신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도는, 바로 성현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법으로, 백성에게 은택이 돌아가게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대해 떠들어대는 이 세상의 학자들은 모두 여러 서책에 실려 있는 것들을 주워 모아서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루면, 천하와 국가가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이를 실제적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공리(功利)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비웃는다. 심한 경우에는 상어(商於 상앙(商鞅))나 반산(半山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자라고 헐뜯기까지 한다. 이것이 어찌 서로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이겠는가! 나는 흐리멍덩하고 천박하여 학문이란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실제적인 일을 하는 것이며, 쓰임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요역을 줄여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이다. 나는 헛되이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형식적인 것을 숭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략)
君子之生斯世也。幼而力學之。學而欲行之。修其天爵。以受人爵者。豈獨爲利祿要名譽哉。將欲行其志。而施於民也。官無尊卑。苟有志於行其志。則固當以聖賢之言爲法。行乎一邑。則一邑之民安。行乎一國。則一國之民安。行乎天下。則天下之民安。正心修身治國平天下之道。乃聖賢敎人之法。而歸澤斯民而已。世之言誠意正心之學者。皆掇拾方冊之所載。以爲意誠心正。則天下國家可幾而理。只談之於口。乃笑急務者之爲功利。甚者。至以商於半山詆之。此豈協心爲國之道哉。不佞懵然膚淺。雖未知學問之如何。而乃所願則存心以正。做事以實。節用而愛民。寬徭而薄賦。不欲馳虛騖遠而尙浮文也。(하략) - 김육, 「호서대동절목의 서문[湖西大同節目序]」, 『잠곡유고(潛谷遺稿)』 | ▶잠곡 김육의 초상화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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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잠곡이 효종 2년(1651)에 반대파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호서(湖西) 지방까지 확대시켜 시행한 다음, 그에 대한 세부 절목(節目)을 반포하면서 지은 서문(序文)의 일부이다.
잠곡은 이 서문의 첫 대목에서 군자가 학문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백성에게 은택을 내려주어, 백성의 삶이 편안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자신은 '형식적인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실제적인 일을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 몇 마디의 말에 잠곡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잠곡은 당시의 유학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성리학(性理學)이나 예학(禮學) 등에 대해서 조그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철저하게 실제(實際)와 실용(實用)을 위주로 하는 학문을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려는 경세관(經世觀)을 가지고 있었다.
잠곡은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시 호서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송시열, 김집, 송준길 등 소위 산림(山林)들의 격렬한 반대에 맞닥뜨렸다. 이 반대파는 심지어 잠곡에 대해 상앙이나 왕안석과 같은 자라고 하면서 비난하였다. 상앙과 왕안석은 제도의 개혁과 엄격한 법집행을 통하여 오로지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을 추구하였던 자들이다. 이들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이어서 후대의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잠곡은 반대파의 이와 같은 격렬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대동법을 호서 지방까지 확대해 시행하였다.
잠곡은 대동법의 시행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해 백성에게 실제적인 혜택을 주었다. 물품화폐가 가지는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화폐(貨幣)를 만들어 유통시켰고, 틀린 역법(曆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헌력(時憲曆)을 도입해 시행하였으며, 민생의 편의와 생산력의 증대를 위하여 수차(水車)와 수레를 제작해 보급하였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하여 활자(活字)를 제작해 서책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잠곡이 행한 이러한 제도의 개혁은 우리나라의 역사발전을 한 단계 끌어올릴 만큼의 진보적인 것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체 국력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커져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갖가지의 불합리한 제도가 얽히고설켜 민생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는 잠곡과 같이 꿋꿋한 인물이 나와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의 모순점을 해결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주어야 한다.
지난해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대선(大選)이 끝나서 이미 인수위가 활동하고 있다. 얼마 뒤에는 박근혜 정권이 정식으로 출범하여, 선거과정에서 공약(公約)하였던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할 것이다.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하는 과정 중에는 반드시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이 있을 것이다. 과연 반대를 무릅쓰고 제도를 제대로 개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출범하게 될 새 정부에 들어가 국정(國政)을 담당하게 될 분들이 반드시 앞에서 말한 잠곡을 귀감(龜鑑)으로 삼았으면 싶다. 그리하여 기득권층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온 국민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서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싶다. 소시민인 나는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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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 일빛, 2011 - 『해동역사』, 『잠곡유고』, 『학봉집』, 『청음집』, 『동명집』 등 17종 70여 책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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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역사게시판. 보다가 역사게시판으로 퍼옵니다.
마지막에 뭐 정치적색이 보이기도하는 것 처럼보이나, 소망정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정권에 바라는 내용이니.. 뭐..
한국고전번역원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 않는것같기도 하고. 그래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