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결국 감독 자신이 세상을 마주하는 태도일 수밖에 없고,
그 결론에 대한 긍정과 부정 역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종 한없이 동의하고 얘기를 나누고픈 영화를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는 듯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외국 영화감독 중 한 명입니다.
가장 평범한 드라마의 줄거리도 그의 영화에서는 새로운 순간들로 들어찬
이야기가 돼서 생각지도 못한 감동을 안겨주고는 합니다.
90년대 초반부터 일찍이 몇 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 다뤄왔던
삶, 죽음, 기억, 부재 등의 테마는 줄곧 그의 작품을 지탱해온 키워드이고,
여기에 가족으로서의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 경향이 점차 짙어져왔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을 갖고 있지만,
또한 세상에 대한 서늘하면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혹시 고레에다 감독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분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뛰어난 몇몇 작품만이 아니라 전체 필모그래피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졌습니다.
다만, 2001년 작인 <디스턴스>는 현실적으로 감상할 루트를 찾을 수 없어서 제외되었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이제는 부부로서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유미코와 이쿠오.
어느 날 밤, 남편 이쿠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홀로 기찻길 위를 걷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어떤 이유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죽음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유미코는 다시 삶을 시작하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을 택하고 마치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듯 이어지는 삶,
정말 묻고 싶은 것마저도 마음에 눌러 담은 채 그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주인공을
영화는 여백 가득한 대사와 화면 사이로 조용히 관찰하듯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다만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인물의 내면에서 번져오는 감정의 파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원더풀 라이프>, 1998년 작
"당신이 가지고 갈 단 하나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세상을 떠난 이들이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하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장소.
기억을 재현한 세트 위에서 그때의 감정이 찾아오면 비로소 영원히 눈을 감게 된다.
이곳에서 면접관으로 일하고 있던 모치즈키는 와타나베라는 노인을 담당하게 되면서
가슴 깊이 묻어둔 오래 전 연인을 다시 떠올린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로,
기억이란 주제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짧은 순간이었다 해도, 지나온 시간의 한 구석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만듭니다.
나중에 더 많은 나이가 들었을 때 문득 꺼내 보고픈 영화 목록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도 모른다>, 2004년 작
"크리스마스엔 집에 돌아올게. 그때까지 동생들 잘 부탁한다."
엄마는 일 때문에 당분간 집에 못 올 것 같다면서 짐을 싸 훌쩍 떠나버렸고,
맏아들 아키라는 엄마가 남겨놓고 간 돈으로 3명의 동생들과 하루하루를 꾸려나간다.
하지만 어느덧 생활비는 바닥을 드러내고, 돌아온다던 엄마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실제 일본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로,
부모에게서 버려지고 사회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다큐멘터리에 맥이 닿은 듯한 건조하고 차가운 뉘앙스가 돋보이는 영화 속에서
눈 부신 태양빛이 아이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장면은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시려오다가, 엔딩에 이르러 끝내 한없이 먹먹한 감정에 휩싸이는 작품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에도의 어느 뒷골목. 무사 가문의 소자에몬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원수를 찾기 위해 이곳에 들어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긴 세월 끝에 드디어 원수를 찾아내고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킬 기회가 오지만,
평범하게 가정을 만들어 생활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소자에몬은 복수를 망설이게 된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중에선 드물게 코믹한 터치가 많이 들어가있는,
유쾌하면서도 귀엽고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느낌의 시대극입니다.
공동체 속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대체가족의 가능성까지 담아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15년 전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큰아들 준페이의 기일에
동생 치나미와 료타가 가족을 데리고 부모님이 있는 고향집에 온다.
하지만 어째선지 료타와 아버지 사이엔 불편한 감정이 엿보이며
집 안에 좀처럼 화목한 분위기가 감돌지 못하고,
어머니는 지금까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내내 간직하고 있던 얘기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장남의 기일에 한 곳에 모이게 된 가족들이 보내는 하루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 여전히 마음 곳곳에 얼룩처럼 남아있는 인물들의 모습과,
늘 제시간에 상대에게 가 닿지 못했던 진심을 품은 채 인생에 놓여진 길 위를 다시
한 걸음씩 내딛으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나는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가져버렸습니다."
주인 히데오가 아침이 되어 일하러 가면
공기인형 노조미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구경하고 돌아온다.
우연히 들른 DVD 대여점의 점원 준이치에게 사랑을 느끼고
정체를 숨긴 채 그와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준이치의 앞에서 몸 속의 공기가 빠져나가는 사고를 당한다.
판타지 로맨스물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공기인형이란 소재를 통해서
고독감과 고립감에 몸서리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화 같은 작품입니다.
공기인형 역을 맡은 배두나의 섬세한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2011년 작
"집 근처 화산이 얼른 폭발해서 가족이 예전처럼 모여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형 코이치는 엄마랑, 동생 류노스케는 아빠랑 지내고 있다.
형과 동생은 저녁반 수영 교실이 끝나면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묻곤 한다.
곧 새로 생길 두 고속열차가 처음 스쳐 지나는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해
기적이 이뤄진다는 얘기에 형제는 서로 만나 그곳을 찾아가기로 한다.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저마다의 소원을 간직한 주인공 형제와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고속열차 홍보를 위해 기획된 영화였지만 고레에다 감독이 연출을 맡으면서
일상의 기적을 바라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작은 동화 같은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어쩌면 기적이란 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마당에 놓인 화분의 싹이 트길 기다리듯
가장 가까운 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변함없는 일상이 이어지던 날, 부부 료타와 미도리는
아들 케이타를 낳았던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병원의 실수로 다른 집과 서로 아기가 바뀌었으며
6년 동안 키운 케이타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접한 부부는 혼란에 빠지고,
지금껏 전혀 다른 생활방식 속에서 자라온 친아들 류세이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함께 쌓아온 오랜 시간과 추억에 의해 연결돼 있는 관계란
그리 간단하게 놓아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실화가 바탕이 되어,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다는 그 숭고함을
결코 쉽게 잊히지 않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오래 전 바람을 피우고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함께 살고 있는 사치, 요시노, 치카 셋은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제법 어른스러운 이복 동생 스즈를 만난다.
맏언니 사치는 혼자 남겨진 스즈에게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와 살 것을 권유하고,
그렇게 네 자매가 모여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된다.
극장 개봉 이후 다시 한번 봤을 때 훨씬 좋은 느낌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맑은 수채화를 그려나가듯, 네 자매가 서로 보듬고 추억을 나누며 살아가는 일상에
켜켜이 놓여있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탁월하게 영상화해내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한때 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재능이지만
지금은 흥신소에서 일하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 료타.
한 달에 한 번, 헤어진 전 아내와 지내는 아들을 만나
하루를 보내는 것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아빠로서의 역할도, 작가로서의 일도 모두 잘 해내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진 않는다.
오랜만에 아들과 만나는 날, 태풍이 상륙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고레에다 감독이 실제 유년기부터 젊은 시절까지 살았던 곳을
배경으로 했을 만큼 그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담겨 있는 영화로,
오래도록 바라 왔던 어른의 모습은 어느덧 시간에 풍화돼버린 현실에서
그저 제자리걸음의 연속인 듯한 매일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료타 역의 아베 히로시와 어머니 역의 키키 키린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연기 앙상블이 제법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