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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그리고 붕당정치의 역사
게시물ID : history_71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쉬킨
추천 : 17
조회수 : 3296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3/01/10 13:19:25

역게에 붕당정치를 쉽게 설명해 달라고 글이 올라서 한번 써봅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하두 잘 정리된게 많아서 어느정도가 쉬운 수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역사 과목은 수학의 공식이랑도 비슷해서 인과관계를 연결하는 뼈대만 잡으면

이후에 연도 인물을 집어 넣으며 정리하기가 수월하더군요. 그 하나의 흐름을 잡는데

성리학 통채와 조선의 붕당을 연결해서 서술해 보고자 합니다.

성리학과 붕당은 기본적으로 철학과 정치사를 함께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영역입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서술해 보고자 합니다만 장문이 되는것은 어쩔수 없는것 같네요

 


우선 성리학의 탄생부터 시작해 봅니다.

 

유교가 춘추시대 탄생한 이래 한나라를 거치며 효경을 통한 정치이념과 예법으로

중앙집권적 정치 수단으로 유교가 활용되기는 했지만 형이상학적 철학의 부재로

불교에 종교적 영향력을 내주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말 불교가 전래된 후 유교는 정치예법으로 불교는 종교철학으로 활용되었으나

도교사상을 흡수한 불교가 당나라 시기를 거치며 선불교로 거듭나며 영향력을 확대하자

유학자들 역시 유교의 철학과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때가 송나라시대죠

 

당시 불교의 형이상학은 촌부조차도 금강경의 구절을 암송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초등학생도 예수의 탄생인 성탄절을 알고 아담과 이브의 천지창조를 알듯 말이죠.)

 

간단히 말해 정치예법에 불과했던 유교의 이념을 불교식의 형이상학으로 설명을 시도한게

바로 성리학을 말합니다. 송나라때 발생한 유교의 형이상학화 경향운동이죠

이것을 완성한게 남송시기 주자의 주자학입니다.

 

예전 유교에 대한 정치관 서술을 하며 정치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제도화한 시스템이니 그 정치의 기본은 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서술한바 있습니다. 이것이 춘추시대 성선설과 성악설 논쟁의 본면이고

유교는 이런 논쟁에서 성선설을 통해 정치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 학문입니다.

대표적인 맹자의 4단이 그것이죠.

 

그렇담 이런 성선설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며 나타난게 

즉 그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유교이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한게

이와 기의 상호작용을 논하며 장황한 썰을 풀었던 주자식의 본성론이고

이=성, 기=정 즉 성리학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고담준론으로 어렵게 철학적으로 말한 학문이라 간단히 정리하심되요

 

고려시대 이런 성리학이 조선에 전파되었고

유학을 수용한 지식인 층에게 영향을 주며 고려말 사대부계급을 양성하게 됩니다.

 

정치의 철학화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 새로운 정치관을 종교적 신념의 수준으로 국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경향을 내포합니다.

(맑시즘이 철학화를 거치며 공산주의 혁명으로 어찌 적용되었는지 생각해 보심되죠

학문이 철학화되 이념이 된 이후의 힘은 냉전시절을 겪은 우리가 잘 알죠. )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은 이런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유교식의 본성론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이것에 맞는 정치시스템을 구축하고자

강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죠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지는데

온건파는 정몽주로 대표되는 사림으로 고려왕조를 기본으로

고려의 개혁을 통해 적용해고 바꾸어 나가자는 입장이고

 

강경파는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관료층으로 불교국가인 고려왕조에서

이런 이상을 펼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으니

고려를 무너뜨리고 신왕조를 개창해 뿌리부터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입니다.

 

유교의 이념과도 연계하는데 맹자의 역성혁명사상을 보듯 기본적으로

신왕조의 개창이란 이론이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려의 군왕이 맹자의 지적처럼 혼군과 폭군이 아닌이상

이를 거부하는 것은 또한 충효와도 연계한 신하의 도리를 넘어선 과한 행위거든요

국가의 개혁을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기도 하죠

 

성리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두고

사대부들이 갈려져

 

강경파의 경우 조선을 개창하며 공신이 되어 훈구파가 되어고

온건파의 경우 고려를 옹호하며 은거하여 정계진출을 거부하였기에 사림이 됩니다.

 

조선 건국 초기 훈구파와 사림은 그 뿌리는 같으나

사림은 여전히 조선의 건국을 반역으로 보는 입장이 강하여 문제가 안되었으나

 

조선 건국 100년이 지나며 고려의 재건이란게 이미 불가능한 시점이 되고

조선의 통치가 자리잡으며 사실상 신국가가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자

사대부 온건파 즉 사림도 100여년의 은거를 풀고 조선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이미 연산군조에 들어서게 되면 한정된 공신들이 권력을 독식하는 것에 대한

견제가 나타나게 되고 지방에서 오랜기간 학문을 연구하며 명분과 이론에 충실한

인재들이 다수가 양성되는 가운데 단지 그 정계 진출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형국에서

훈구파들이 자신들의 권력의 위협을 미연에 제거하고자 극단적으로 반응한게

바로 조선 초 사화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조 연간부터 정계에 사림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며

연산-중종 연간에 이르러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탄압을 하여 억제하고자 한것이

무오사화, 갑자사화,기묘사회로 일컬어지는 사림숙청의 사화들입니다.


이유는 다양한 사연이 있지만 기본 골격은

조선 건국 100년을 거치며 단순히 공신이라는 이유로

오랜기간 정계를 독식해온 훈구파가


그 기간 지방의 연고와 학문을 통한 제자의 배출이란 학연

그리고 이론적, 학문적으로 오랜기간 무장한 사림에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기본적으로 학문과 이념을 골격으로

건국한 조선의 정치시스템상에서 이를과의 학문적 역량 투쟁에서

경쟁력을 상실하며 사실상 도태되어 가고 있었단 이야기죠.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건국한 국가인 이상

심도있는 유교 학문과 이론으로 명분으로 무장한 사림의 진출은

더이상 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게 되고


조선 명종 연간을 거치며 구체적으로 마지막으로 훈구파가

영향을 끼치던 문정왕후 섭정 기간이 끝나며

사실상 조선 정치의 대세는 사림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더불어 15세기~16세기가 세계적으로 천재가 가장 많이 등장한 시대라고도 하는데

조선에서 퇴계이왕, 율곡 이이같은 천재적인 유학자의 등장은

성리학을 보다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영남학파로 상징되는(영남좌도 학파) 이황의 경우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기본 골격으로 그 역시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며

주리론으로 발전시킨 사상가입니다.


사실 성리학의 내용은 복잡한 형이상학 수사가 많아서

이해하기 힘들죠


때문에 이황도 성학십도라는 그림 책을 지어

청년시절 선조를 위해 좀 보고 배우라고 그림 10개로 설명한바 있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사실 일상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본성은 착한데 기질이 나빠서 문제야"

"저사람의 기질이 저러하니 ㅉㅉ " 이런 무심코 쓰는 용어가


성리학의 본성론이 일상화된 흔적입니다.

 

이는 즉 성으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기는 즉 정으로 본성을 감싸고 있는 기질을 의미합니다.


이가 인간의 본성으로 불변의 성질이라 한다면

기는 이것을 감싸고 외부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성향이란 말이죠.


맹자의 4단

측인지심(아기가 우물가에 가면 일단 구하고자 하는 인의 마음)
시비지심(틀린것과 옳음을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
수오지심(악한것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 것들은 어떤 교육과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의 영역입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상인인 이상 따로 교육하지 않아도
인간이기에 가지는 품성이고

반대로 맹자는 이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라 주장했습니다.

이 4단이 바로 의미하는게 "이"라는 즉 본성 "성"
불변하는 인간의 중심입니다.


7정이라 하여 喜怒哀懼愛惡欲

기뻐하는 마음
화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욕심이 드는 마음


이런 감정은 외부로 표출되는 인간의 성향으로
사람을 교육하고 다스리는 정도에 따라서

기쁘나 내색하지 않을 수 있고
화가 나나 자제할수 있으며
슬프나 억제할수 있고
두려워하나 견딜수 있으며
사랑하나 감출수 있고
미워하고 참고
욕심이 드나 다스릴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 이며 "정"이라는 것입니다.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길


본성이 그 중심에 있고
이런 기질이 외부를 감싸 안으며 나타난다고 합니다

흔히 "본성은 착한데 기질이 탁하다" 라는 말이

그 사람의 본성은 바른데 기질이 탁하여 본성을 가려서
겉으로 안좋게 보여질 뿐이라고 완곡하여 누군가를 평가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배우는 것도 가려진 착한 본성이 드러나도록

기질을 다스리고 맑게 하여 본성을 드러내는게 바로 유교가 말하는

수신 즉 배움의 과정이 됩니다.


이황은 본성과 기질은 서로 다른 존재이며 서로작용하여 나타난다

이기호발설

 

이것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본성은 변하는 것이 아님으로 본성이 이끌고 나가며 기질이 뒤따른다

이발기수설

 

설령 기질이 앞선듯 보이지만 기나 표현하며 이가 이를 타며 나타난다

기발이승설이라


이런식을 인간의 본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이황과 기대승이 서신으로 논쟁을 하며

서로 나눴던 성리학의 논쟁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보니 기대승이 새파란 학자의 질의에 대유학자인 이황이 친절히 답문한 것을
학자의 기본 소양이자 이황의 품성을 보인다 칭찬하는 강사도 있더군요.)


즉 인간의 본성은 바로 본성 즉 이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리론의 입장을 요약하면


겉으로 표현되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성, 본질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으로 

서구식으로 따지만 현상 넘어에 있는 진리가 더욱 중요한 가치이니


철학에서 보면 연역적 사고와 관념적 추론을 중시한

대륙의 관념론적 철학 사조입장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대로 이이의 경우 이에 반박을 하며

이기일원론을 주장합니다.


이와 기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황이 말하는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주장했죠.

즉 이와 기의 구분이라 설명한 4단과 7정은 따지고 보면

7정의 선한 부분만 골라서 구분한게 4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모든 물체는 양면성을 가지며 존재함으로 선함과 악함 음과 양을 공유한다는 것이죠

때문에 이와 기는 구분되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된 양상에 불과하다 주장합니다.


어떤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기라는 것이고

그것이 나타나는 이유가 이라는 것임으로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은 가능하나

이를 발하고 기가 뒤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명합니다.


때문에 양자가 결국 같은 존재를 다르게 구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결국 궁극적으로 한 대상의 본질을 알기 위해 탐구해야 할 부분은

본성이나, 이의 영역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기의 영역을 지칭하게 됩니다.

즉 현실의 영역을 어찌 다스리는가가 곧 인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됩니다.


바로 주기론의 입장을 말합니다.


이는 서구식의 경험론의 입장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행태와 결과를 보다 면밀히 보며

귀납적인 방식으로 기를 통해 발현된 현실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보다 쉽게 정리하면

성리학이라는 정치에 적용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을

조선식 언어로 관념론-경험론의 관점에서 상호 논쟁을 한 내용인것이죠

 

조선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학자들이

인간의 심성이란 이런것이다. 이런 인간의 성향이 그러함으로

어떻게 교화를 시켜야 하며 이런 이론으로 다스리는게 곧 정치라는 마인드로 통치한 시대입니다

조선 특유의 학문기반의 정치사상 시대이기에 가능한 논쟁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이란게 사실 따지고 보면 철학과 교수들과 비슷한 존재들로

먹물먹은 이들 한 자리에 모여 이론이 어쩌네 서로 쌈박질 하며 정치하는것이죠 ㅡㅡ;
 

이런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의 주리론을 바탕으로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런 인맥들과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치사상으로 정계에 나간 이들이

바로 동인이란 사림집단이고


이런 율곡 이이, 성혼의 주기론을 바탕으로 학파를 만들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런 인맥들이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구축해 정계에 나간 이들이

바로 서인이란 사림집단입니다.


선조연간을 거치며 훈구파는 정계에서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논쟁을 봐도 알지만 100년간 저딴 이론으로 철저히 무장하며 먹물잔뜩 먹고

조정에 나온 사림들을 이론이니 학문으로 어찌 이길까요

그저 묵묵히 현실 정치만 하며 국가에 공을 세웠다며 자랑하는 훈구파가

사림들이 보기에 얼마나 무식해 보였을까 또 무시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실록보면 사림 인사들이 훈구파를 거의 대놓고 소인배, 무식한 놈 이런식으로 모욕해도

저런식으로 배운놈들한테는 말싸움 붙어도 이길수가 없죠, ㅡㅡ;

어찌보면 조선 초기 사화의 정체가 말로 안되니 너무 빡쳐서 폭력을 쓴것이 아닌가,,,

 

아무튼


조선 선조연간이 바로 조선의 붕당 정치가 개박된 시대입니다.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갈려진 계기는 표면적으로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를 놓고 나온 다툼 때문입니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후배 사림들이 동인이라 불리워 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선배 사림들이 서인이라 불리워 졌다고 하나


본질은 훈구파와 사림이 피를 보며 장장 150년을 투쟁한 이유가

한정된 조선의 관료직을 두고 경쟁한 것 때문이듯

이제 사람이 장악한 조선의 정계에서 다시 사림이 양분되는 것도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합니다.

관직과 언로와 연계한 청요직인 이조전랑 관직이 빌미가 된 것 뿐이죠.


동인의 경우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배운자들이 뭉쳤고

서인의 경우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배운자들이 뭉쳤죠


선조의 경우 양 붕당을 잘 조절하며 초창기 서로 예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나름의 수완도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에서 가장 안타까운 왕이 선조입니다. 

어려서 이황이 성학십도를 바치며 성군이 되기를 희망한 군주였고

그야말로 천재적인 성리학자들이 대거 나오더 이 시기의 군주로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던 성리학의 절정기였기에

선조는 가만히만 있어도

조선 최대전성기를 이끌었다 평가받을 왕이었느데

이때 터진게 그 임진왜란이고 본인 자체도 가만히 아닥하던 왕이 아녔죠.


일단 동인의 학풍을 이끈 두 명의 학자를 보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입니다.

 

동인 즉 영남학파의 경우

다시 영남 좌도학파와 영남우도 학파로 나눠지는데
(주의 : 한양에서 보았을 때 좌우 개념입니다. 영남 우도가 낙동강 서쪽이죠.)

인간의 본성성 심성론으로 이론체계를 새운 이황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주리론을 인정하며 진리의 추구를 학풍으로 중심을 삼지만

남명 조식은 심성론이 아닌 보다 현실적인

도덕과, 의리에 입각한 도덕론을 주장한 학자입니다.

때문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남명 조식의 휘하에서 공부한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들이 대부분 동인 남명학파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군왕에 대한 의리와 충절을 중시하며 대의를 위해 싸우자는거죠


선조 연간 동인 서인으로 학문적으로 경쟁하던 때

붕당정치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니

 
이른바 정여립의 모반 사건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인이자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총명하기 이를데 없던

서인의 장래희망 정여립은 율곡이이 조차 천재라 칭찬한 인재입니다.

워낙 기개도 있고 똑똑한 자라

이황이 그림 그려가며 성리학을 가르친 평범한 군왕 선조에게도 눈을 부라리며

간언하고 심지어 학풍을 초월해 서인에서 동인으로 넘어가기도 했죠.

선조는 이런 행위를 두고 똑똑한데 스승을 배신하는 소인배라 경멸했습니다.


그런 정여립이 모반을 했다고 황해도에서 고변이 있고

서인의 영수 정철을 중심으로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모반을 꾸몄다고

대대적인 역적청산이 진행되게 됩니다.

이른바 기축옥사입니다.


요점은 동인과 서인이 학문적으로 티걱 태걱하며 싸운정도나

이조전랑직을 두고 성품이 어쩌네 말다툼을 하던 시절을 지나

역모사건을 이유로 대거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입니다.


문학책에서 등장하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예쁜 문장을 쓴

송강 정철이 서인의 영수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추국했는데

정철은 이때 연루된 동인 인사 1천명을 죽였습니다

반역이라 함은 당사자는 참수되지만 반대로 그 일가 친척은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학문적으로 대립하던 시절에

동인 인사들 1천명을 죽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파장인지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만 이때 부터 붕당의 투쟁이란 것이

단순이 이론이니 학문적 이견을 말로 싸우는게 아닌

상대방을 실제 죽여버리고 나아가 가문의 멸족이 달린

생사의 투쟁으로 변질된 것이죠.


이유는 예법이니 문장의 내용이 학문적 사상이니 단순하게 시작하지만

그 종국의 목적과 결과는 역모 관련으로 엮어 가족 모두가 멸족당하는

무시무시한 붕당식의 정적 제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선조의 자작극설도 있고

정여립이 실제 모반을 했다는 설도 있죠


신권이 급부상하던 시기 컴플렉스 쩌는 선조가

동인 서인 신하들의 관직투쟁을 보다 자극적으로 지휘해서

왕권강화의 빌미로 이를 활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철의 옥사가 정철의 의도가 아닌 선조의 지시라는 것이죠
(조선 후기 숙종의 극단적인 탕평도 생각해 보심되죠.)


기축옥사로 서인의 집권이 단행되었지만

몇년 지나지 않아

기축옥사로 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한을 품었던

동인에서 반격을 한 사건이 건저의 사건 입니다


세자책봉과 같은 문제는 왕권과 직결된 사안으로

신하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역이지만

선조 자체가 방계 출신인데(컴플렉스의 근원이고)

세자도 없음에 대하여 동인으로 남아있는 이산해를 비롯

유성룡, 정철 3정승이 세자책봉을 건의하자 합의합니다


이때 동인측에서 작업을 하여 오히려 선조가 의중을 두고 있던

신성군을 정철이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낸다음

막상 경연자리에서 세자책봉을 건의할 때 이산해는 출석하지 않았죠

이미 뒤로 이런 내용을 들은 선조는

정철이 세자책봉을 언급하자 대노하며 정철을 축출하게 되고

서인의 집권도 막을 내리게 되었었습니다


다시 동인이 정권을 잡자 기축옥사에서

정철에게 한을 품었던 이들이 정철과 서인의 처우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또 나눠게 됩니다

이때 강경파가 특히 피해가 많아던

바로 남명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로

이들이 바로 북인이 되고

온건파가 이황의 제자들로

이들이 바로 남인이 됩니다


이들 북인은 학파 특유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바탕으로

임진왜란거치며 조선에서 주전론의 중심으로 정계에서 활동하며

학파의 제자들 역시 의병장으로 활약을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정국을 주도한 가운데

선조의 후사문제가 대두되자


다시 의리와 명분을 기본으로 삼는 북인이 또 갈라지며

임진왜란 기간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전란기간 조정을 2개 만드는것이죠)를

이끌고 항전하며 공을 세운 광해군을 지지하자는 이들이

대북이 되었고


선조도 방계로 혈통에서 취약한데 또 서자를 후사로 세우면 문제가 된다는 논리로

명분상 적통인 영창대군을 지지한 이들이

소북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며 영창대군을 언급한 소북은 자연히 축출되었고

쫓겨난 이들 소북을 두고 대북이 또 나눠서 칭하길

비록 쫓겨났지만 염치있고 강직한 기풍을 유지한 이들을 청북이라

나머지를 탁북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 연간 집권한 대북의 경우 또 다시 분파하게 되는데

앞서 언급했지만 같은 동인이라 하지만 남명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로 구성된

북인의 경우 그 학풍이 일관된 성리학 학문의 이론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도덕론, 의리론, 명분론이 대표적인 것을 보듯 어떤 일관된 이론을 견지하는게 아닌

뛰어난 학자의 스승에 따라 학풍이 난잡하게 갈려지는

다소 복잡한 학풍의 정치세력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대북 내부에서도 각각의 스승과 학파에 따라

또 걸려지며 육북, 골북, 중북 이란 이름으로 구분하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이후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서인이

대북의 난잡함을 성토하며 붕당을 이토록 많이 작당했다고

표명한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북인의 집권이 끝난게 무력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입니다.


연산군 이후 처음 사림의 집권 기간 왕이 아예 갈려진

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북인은 사실상 절멸하게 되었고


인조반정의 공을 세운 서인이 독점하는 형세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인 즉 기호학파라는 것이 율곡이이와 성혼의 사상을 계승한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사는 양반들 학풍을 말합니다

영남의 산지가 많은 분지지방에 서원을 만들고

조용히 형이상학적 학풍을 길러온 영남학파와 대조적으로

경기도 또는 과전법의 대상인 경기도의 한계는 넘은 인근의 토지

황해도 충청도 지방에서 지주로 경제적 기반을 만들며

주기론을 바탕으로 한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학풍을 기반으로 한

현실 정치세력이죠.


이들이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서도

인조반정에 가담한 부류를 공을 세운 공서

신하가 왕을 몰아내는데 가담하지 않았다 하여 청서

로 부르기도 했고

 

또 정계를 주도한 인조반정의 공신 인물을 중심으로

원평 부원군을 원두표를 중심을 모인 서인을 원당

낙평 부원군 김자점을 중심으로 모인 당을 낙당

송시열을 중심으로 모인당을 산당

김육 등을 중심으로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한강 이북에 주로 거주한다 하여 한당

 

원당,낙당,산당,한당이 4당이 구성되며

정국을 평정한 인조연간 서인천하에서 주요 정파를 결성했습니다.

 
이중에 다시 공신들인 공서의 김류가

쫓겨난 북인의 잔당 중에 소북의 영수였던

남이공이 광해군에 탄압받은 소북인사이고

학문적으로도 업적이 많음으로 대사헌이 임명하려 하자

서인의 소장파들이 반발을 하며

이를 인정한 이들이 노서 소장파 서인을 소서라 구분하기 도 했죠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독식한 상황에서

서인들이 정국을 나눠먹으며 나온 형세입니다


공신들이 이합집산하며 모인 4당의 분파는

효종 연간 송시열이 통합을 시도하며 서인으로 다시 뭉치게 됩니다.

조선 후기 송시열의 등장은 서인 계보에서 특히 중요한데

정계에서 서인의 통합을 이룬 것도 그러하거니와

조선 후기 서인의 입장에서 성리학 사상을 정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주요 논제였던 의리론이 그러하고

사회개혁의 방향과 한계를 이이의 변통론에서 찾아 선을 그은 것도 그러합니다


의리론은 대명의리론을 말하는 것으로 중화로 인정하고 임진왜란의 도움을 입은

명나라가 망했다 하나 조선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등장은 섬기는 사대의 대상이 아님으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만동묘를 만들어 명나라 2명의 황제

만력제(임진왜란 구원) 숭정제(마지막 황제)를 제사지내며 명백을 대신 이어가는 동시에

유일하게 남은 중화는 조선뿐이라는 논리로 소중화의식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보다 수호하며 중화의 명백을 조선이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죠

정치적으로 보면 송시열과 서인의 주도로 효종연간 북벌론이 대두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이는 사상적으로 보면 성리학은 더이상 단순한 사상이나

정치이론의 차원이 아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화국가라는 명분으로 반드시 지켜야하는

성리학 자체가 숭배의 대상으로 철학화된 절대적인 학문으로 변질함을 말합니다

지방 관료조차 감히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하는 만동묘의 존재를 보아도

사실상 국가권력 이상의 절대적 이념적으로 자리잡는 과정입니다
(그 만동묘를 철폐한게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이는 변통론과 또 연계하여 살펴보면

율곡 이이의 경우 일찍히 앞서 서술하였듯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며

이와 기는 하나일 분이고 양면의 발현이라 하였죠.

주기론의 사상하에서 기는 표현의 대상인 동시에 변화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주역의 말을 빌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지속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만 바꿀수 있다면 변화즉 변통을 지속하며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서 바꿀 수 없는 것은 본질이죠

왕도, 인정, 삼강 같은 유교의 기본 원리는 변화가 불가능하지만

이와 수반되어 나타난 현상은 개혁의 대상입니다.
(이는 두루 통하고 기는 국환된다의 이통기국론도 이와 같은 논리입니다.)


이는 정조의 개혁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사회개혁의 중요성을 논하고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수용하며 변화를 꾀하지만

정조 역시 도학군주로 성리학은 불변의 사상이라는 전제하에

서학(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 칭하며 성리학을 수호한 군주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필요로 인하여 개혁을 진행하지만

봉건질서는 결코 불편하는 대상으로 건드릴수 없다는 가치관입니다.

개혁의 방향과 그 한계를 이론화 한 것으로

성리학 체제가 왜 장기적으로 지속 될 수 있었는지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폐단이 존재하면 보통 개혁과정에서 그 체제가 갈려버리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인데


성리학의 뿌리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역이 되는것이죠

개혁으로 유지는 지속되지만 변화하지는 않는 체제가 완성됩니다

의리론과 연계하여 보면 그 이유도 소중화라는 조선의 국체와 또 직결되는

상당히 난해한 영역이 됩니다.


이는 정조의 개혁이 왜 국왕중심의 보수개혁인지

흥선대원군이 개혁도 당장 만동묘를 파해쳤음에도

위정척사와 연계한 보수개혁이 되었는지

이후의 이른바 개혁운동의 방향성도 가늠하게 합니다


서인의 주기론의 입장 이기일원론은

이미 명나라 시기 중국에서 기의 중요성

즉 현실의 발현 실사구시의 중요성을 논한

기의 총체로 사물을 본 양명학의 대두와 함께

성리학의 본고장 중국에서 이미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비슷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며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장수의 참전과 함께 조선에도

명나라의 양명학이 전파되었지만


송시열의 대명의리론, 변통론으로 조선의 성리학 중심 소중화체제를

정비함에 따라 양명학 역시 사학일 뿐

이미 절대화된 성리학에 이단에 불과한 취급을 받게 됩니다

송시열 말년에 이르러 서인이 분파되며

노론과 소론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런 송시열의 이론을 반대한

이들이 소론으로 집결하게 되고

소론의 인사들 중에서 양명학을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에서 더이상 뿌리내릴 수 없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주전파 북인이 정국을 주도 하며

영남의 서원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살던 남인이 재등장 하던 시기가

인조연간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조반정을 옹호하며 정국을 주도한 서인들 틈세에서

공신들의 전횡을 견제하고 서인 소장파를 옹호하며 정국에 참여하던

남인들은 북인의 잔당을 흡수하며 정비를 하더니


효종 사후 현종 연간 이른바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예법에 맞는가? 라는

지극히 쓸데없는 논쟁 하지만 예법을 중시한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왕실의 정통성과도 연계한 중요한 논쟁 유명한 예송논쟁에서

서인을 누르는데 성공함에 따라
(예송논쟁도 상당히 복잡한데 서술하면 진짜 책이 될거 같네요 ㅡㅡ;)


인조반정이후 서인 주도 정국에서 처음 정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하며

서인과 대비되는 남은 세력으로 정국의 주요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사실 초기 남인 서인의 논쟁은 붕당정치의 꽃이라 불리워 지는

상호 견제하며 정국을 이끄는 지극히 품위있는 논쟁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정국은 풍운아 숙종이 즉위하며 극단으로 또 치닷게 됩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신권과 왕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 국가입니다.

신권이 강해 질 때 마다 당시의 군왕은 좀 극단적인 방식으로

피를 보게 하여 반사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큰데


선조도 그러했고 숙종도 그러했던게 아닌가합니다

예송논쟁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왕과 사대부가 예법을 공유할 정도로

사실상 동급의 존재인가 아닌가의 이론적 싸움이도 합니다


그 뒤를 이어 숙종이 즉위했을 때

나름의 탕평책인지 모르겠지만

군왕의 주도로 한 정파를 아예 제거하는 수단

거의 극단적인 방식으로

남인 또는 서인에게 정국을 독식하게 하는

정치행태가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이른바 환국의 시대입니다


주요 이유는 인현왕후 장희민의 이야기처럼

군왕의 로멘스가 명분이지만


그 결과는 환국이 한번 실시되면

반대파는 죄다 역적으로 몰려 죽어버리는

마치 선조연간 기축옥사처럼 수천명이 도륙당하고

그 가문이 노비로 전락하는 비극이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오고가며 3번이나 발생하죠

예법이니 학풍이니 이론이니 철학이니 논쟁하는 것도

대화로 풀때 가능하지

당사자 혹은 스승, 친구, 동문, 일가친척, 지인들

한 다리 건너면 한번씩 상대방 정파의 보복으로

죽거나 도륙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거나 하면

더이상 정상적인 경쟁이란게 성립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환국을 통해 서인이 정권을 잡으며

남인의 씨가 말렸을 때

서인을 통합한 영수 송시열은 서인가문에서는 뛰어난 학자로 존경하며

"송자"라고 스승 자 자를 존호로 올리며 동양의 대유학자라 불렀지만

남인의 가문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개의

이름으로 붙이곤 했다죠.


장희빈 사건으로 남인이 축출 된 후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자


집권 세력인 서인이 또 갈려지며

이를 지지한 소론과 이를 거부한 노론으로 나뉘게 됩니다

경종을 지지한 소론

훗날의 영조인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인데


이미 서인에서 숙종 연간

남인이 정국을 잡았을 때

서인을 강경하게 다 죽여버리자는 탁남

서인을 온건하게 처리하자 청남으로 분파되었듯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잡았을 때

남인을 강경하게 다 죽여버리자 노론

남인을 온건하게 처리하자 소론으로

나뉘었던 분파이기도 합니다


남인에 온건하게 대한 정파로

다시 남인의 환국 또 마지막 장희빈의 사사와 남인의 축출로

서인이 집권하자

남인이 내세운 장희빈과 그 아들인 경종을

어찌하였건 군왕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노론은 그 존재 자체가 서인의 위협임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내세운 것이죠


사실상 아무리 신권이 강하다 한들

젊은 군왕이 살아있는데 후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다른 왕자를 왕세제로 임명하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역모의 성향이 매우 큰 대담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노론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이 이를 문제삼아 충역의 문제로 비화 시켰고

노론 4대신을 처형하며 신임옥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종이 2년만에 승하하자

노론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영조가 즉위하였고

노론이 반격을 하며 소론 4대신을 처형하며

사실상 소론은 절멸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즉위 기간도 매우 길었지만

탕평책으로 유명하죠


아버지 숙종이 워낙 다이나믹하고 극단적으로 정치를 하는 바람에

소론,남인이 씨가 말라있는 상태에서

양자를 균등하게 기용하여 한쪽에 쏠려 주지 않는게 탕평이라는

논리로 남인을 대거 기용하며 정국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런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경종이 간장 게장을 먹고 다음날 죽은 사건을 두고

경종 독살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데

이는 당시에도 소론과 남인은 간장게장을 먹지 않는다는 말로

영조가 경종을 시해하고 즉위했다 여기는 음모론이 유포될 정도였죠


이런 정국에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기용하며 탕평을 외친 것은 사실상 정국을 주도한 노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의도가 더욱 큼을 의미합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이른바 숙종 연간에 이미 나온 붕당론에 기초한 것으로


붕당의 대립이라는 것이 결국 한정 된 괸직을 바탕으로

학 학파의 인물들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 기용하여 정국을 이끌자

즉 탕평책을 이론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것입니다


영조의 즉위와 함께 서로 잘하고 잘못한 것을 주고 받았으니

문제삼지말고 다 기용하자 라는 논리인데

군왕이 정치에 적용한것은 노론 소론을 외척을 골고루 기용하며

이들로 하여금 이른바 탕평당을 만든 것이죠

영조연간 이른바 완론(온건파)탕평 정치를 말합니다.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군왕의 측근으로 끌어들여

탕평당이라는 군왕을 위한 정치세력화를 시키는 작업이죠

명목은 탕평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고

내용은 노론, 소론 온건파를 외척으로 기용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탕평책을 써가며 정국을 주도한 시도는

영조 역시 당쟁에 말려들며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죠

강력한 군왕이 주도해 양자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시도가

노론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에 막혀 왕권의 한계를 직시하게 하였고

균형이 어려움을 이유로 양자의 완전한 균형이 어렵다면

절충을 통해 그리고 주요인물들을 외척화 하여 이를 안정화 시키려 했지만

그 결과는 노론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귀결되었고

다시 탕평당이라는 이름으로 비대한 정치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이는 이런 탕평당을 이끄는 군왕이 당쟁에 휘말리며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시파와 이에 반대하는 벽파의 분쟁
(시파 벽파의 본격적 등장 문제는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나아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일로 비화되자

임오의리의 문제라 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을 놓고 양분하게 됩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연간 이런 임오의리의 문제를 두고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극명하게 되었음은 유명하죠

정조의 즉위는 그 역시 영조의 탕평정치를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비대해진 영조연간의 완론탕평당을 척결하고 (홍봉한 같은 인물이 그러하죠)

보다 강화된 탕평을 시도합니다 남인과 청류 노론까지 흡입하여

장용영이란 군사력까지 가미한 강력한 군주의 지원하에 탕평당을 만들죠

이른바 준론(강경파) 탕평정치의 시대입니다. 


영조 정조의 통치시대는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군주의 주도하에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회개혁도 함께 진행된 시기임으로

표면적으로 조선의 르네상스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실학이라는 것도 등장한게 그러하죠

주로 정계에서 쫓겨나길 반복하며 지방의 농지에서 살았던

남인들 계열에서 중농학파가 많이 나왔고

주로 정계에서 있으며 청나라도 다녀오고 도시에 살았던

노론들 계열에서 북학파와 같은 중상학파가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군주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세는 또한 내부적으로

상당한 문제점을 이미 간직한 위험한 정국이기도 했습니다


시파-벽파의 논쟁은 겉으로 보면 노론 벽파와 남인 시파의 문제지만

이미 양 군주를 거치며 비대해진 탕평당이라는 소수의 정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풍조가

일반화되게 됩니다. 명분도 붕당을 억제하고 탕평을 한다는 것으로

군주권의 강화를 위해 외척에 의지하는 형국에서

정조연간에는 보다 급진적으로 시행한다는 이유로 강경파를 대거기용함에 따라

붕당 특유의 정치 풍조 다른 당파는 물론 붕당 내부에서도 견제의 여유를 남기는 것이 위축되며 

이런 강력한 왕권에 의지한 거대한 정치세력의 정국 주도라는 속에서

사실상 붕당정치가 종말을 향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는 명나라, 청나라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합니다.

유교식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정치의 작용이 지나치게 사람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죠


지난 역사에서 신권이 강화되게 되면

남북조 시대처럼 문신 재상이 찬탈을 하거나 무신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이른바 신료들의 귀족정치 속에 허수아비 군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죠


때문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이런 신권의 강화를 우려하여

막강한 황제의 권한으로 황제가 6부를 총괄하며

심지어 재상직 자체를 없애는 조치를 통해

군주의 독재를 크게 강화하는 정치시스템을 만들었고

 

황제권을 강화하는 것이 군주의 의무라는 의식이

역사를 통해 배운군주가 종종 지향하는 정치체제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군주중심의 강화된 왕권의 정치는

현명하고 부지런한 군왕의 통치기간에는

신속하고 효율적이 정치가 될지 모르지만

반대로 평균이하의 군왕이 즉위한느 순간

시스템의 중심이 바로 무너지는 취약점이 있는 제도입니다


명나라가 죽을 때까지 밤새 공무를 보았던 주원장

카리스마가 넘친 군주 영락제 등이 사라진 이후

환관정치로 퇴보한 것이나


청나라가 강희, 옹정, 건륭 3황제의 현명한 황제가

사라지자 곧 황후가 국정의 중심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는

외척정치로 나아간것이 그런 사례죠


영조-정조 연간의 이른바 탕평책이 세도정치로 나아간 것이

바로 이런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흔히 세도정치를 두고 500년간 대립한 신권과 왕권의 다툼에서

신권 즉 노론이 승리하여 나라가 망한거라 평하는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500년간 신권과 왕권이 투쟁한 것이 아니라


애초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적 유교정치를 이상으로 한 국가로

신권과 신권이 대립하며 상호 견제를 통해 정당정치로 국정을 운영한 나라입니다

 
이런 정상적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정국에서

왕이 똑똑한 신하들 속에서 소외됨을 느끼는 경우나

때로는 자신이 더욱 현명하다 느끼는 군주가 종종 등장하며

인위적으로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추기는게 강요된 형세죠


연산군이 그러하고 중종이 그러하고 선조가 그러하고

광해군이 그러하고 인조와 숙종이 그러하고

영조와 정조가 그러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대립의 과정에서 종국에는

신권-신권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붕당자체의 기반이 무너짐에 따라

정치 경쟁 자체가 소멸한 케이스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정조의 강화된 개혁의 과정에서 지방 향약을 지방관이 통제하록

개혁함에 따라 당장은 강화된 왕권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사림의 기반이 무너지고 지방의 정치와 언론의 표출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되는 체제가 구축된게 그러하였고

 

중앙은 이런 지방 사림의 견제가 없는 상황에서 탕평당으로 시작한

강력한 거정치세력이 외척과 왕권을 등에 엎고 정국을 사실상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기반이 만들어진게 따리고 보면 정조의 통치기간 완성된 구조입니다.


정조의 탕평시대는 이런 탕평당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그 역시 또 다른 권력집중 세력을 양성하는데 그침으로써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이를 제어할 강력한 왕권조차 사라진 시점


즉 어린 군왕이 즉위한 순종 연간이 되자

남겨진 외척중심의 소수의 가문이 정국을 주도하며

붕당 자체가 사라지고 소수정파와 가문이 정국을 독점하는

조선의 암흑기인 세도 정치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조선의 성리학과 붕당이라는 거대한 내용을 한 게시물에 모두 연결해 담자니

너무 분량이 많아진 감이 있습니다


더불어 기본적으로 2분법 구분으로 단순하게 상호간 구조적인 연결점을 찾는 것은

사실 역사적 사실이란 이토록 일관되게 흐르는게 아님을 고려하면

오히려 나중에 자세히 파고들 때 선입견을 가지되어

입체적으로 역사를 조명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유념하셨음합니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고

생략되고 지나치게 단순화한 부분도 있습니다

대충 이런 흐름이더라 정도로 가볍게 읽어주셨음하는 소망입니다.


어제 쓰자고 맘먹고 서술하다 막상 내려쓰니 너무 많아서

쓰던 저도 하루 쉬고 마무리 지었네요

쓰고나니 상당한 장문인데 행여 완독하신 분이 계심 감사드립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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