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日日記를 남긴 게이넨이 창건 한 안양사(安養寺).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에 잠든 萬人의 義士들이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한지 올해로 412주년을 맞는다. 당시 우리 義士들은 침입해 온 5만의 왜군을 상대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한 순국을 한 것이다. 그 날이 우리가 꿈에도 잊지 못할 1597년 8월 15일(양력·9월 26일)이다. 그리하여 해마다 9월 26일이면 남원 만인의총에서는 만인의사 순의 제향을 거행한다.
당시 이 만인의사의 싸움은 우리 나라 호국사상 길이 빛날 싸움이었으며, 이는 오늘날에 말하는 ‘민방위’ 또는 ‘시민전쟁’ ‘향토방위’의 효시이었다. 또한 ‘만인의총’은 오늘날에 말하는 ‘무명용사의 묘’이다.
그 때 왜군이 경상도 방면에서 남원으로 침입해 온 상황을 경념(慶念)이라는 왜군의 종군승(從軍僧)이 남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기록이 오늘에 전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그 때 남원성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알 수 있다.
“들판도 산도 전부 불태웠으며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였다. 나는 부모를 찾는 아이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비참함은 꼭 지옥의 거리와도 같았다.(1597. 8. 6)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당시 정유재란 때 왜병들의 최후 발악적인 만행에 짓밟힌 남원의 모습을 우리측의 기록이 아니고 왜인의 기록이고 보면 살육·약탈 등의 처참한 광경을 보다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일본 큐슈(九州)의 중동부에 위치한 오오이타(大分)현 우스키(臼杵)시에 있는 안양사(安養寺)의 주지였던 경념(慶念)이란 승려이다. 그는 왜군의 연합부대에 소속했던 우스키 성주 오오타(太田 飛?守一吉)를 따라 온 종군승이었다.
당시 경상도 남부에서 전라도 방면에 침공해 온 왜군은 모오리(毛利秀元)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그 밑에 카도오(加藤淸正), 구로타(黑田長政), 아사노(淺野幸長) 등이 거느린 5만 대군이었다.
종군승(從軍僧) 경념(慶念)은 1597년(丁酉) 6월 24일 일본 큐슈를 출발하여 조선에 왔다가 이듬해 1598년 2월 2일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9개월동안 격렬했던 전쟁의 체험을 ‘조선일일기’라 하여 일기로 남겼다. ‘종군일기’(從軍日記)라 할 이 기록의 문장은 일본 문학 고유의 장르인 단가(短歌)로 되어 있다. 이 단가란 이른바 화가(和歌)라고도 하여 5·7·5·7·7의 31자로 된 정형시가이다. 또 이 ‘일일기’는 해독하기가 어려운 일본 특유의 초서체로 쓰여져 있다. 이 원본은 현재 그가 주지로 있었던 일본 우스키에 있는 안양사(安養寺)에 보존되어 있다.
처음 부산항에 상륙했을 때의 광경을 읊은 것을 비롯하여 그 수는 모두 3백30수에 달한다. 이 중, 전라도 관계 부분 등 몇가지만 발췌해서 알기 쉬운 우리 말로 다음과 같이 옮겨 본다. 그는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부산의 거리는 일본 각지에서 건너온 노예의 상인들로 법석이었고, 조선인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라고 했다. 이어서
“수만명을 헤아리는 大부대가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그들의 만행은 살육, 강제 연행, 약탈, 방화로 나타났고 또 이것은 철저했다.”
는 참경을 직접 목격하고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
이렇듯 경념이 그의 종군일기인 ‘조선日日記’에 수록된 단가 330수를 내용별로 분류해 보면, 승려로서의 신앙관계를 읊은 것이 약 5분의 1, 다음은 멀리 이국 땅 조선에서 향수를 달래는 망향가(望鄕歌)가 약 70여수, 나머지는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탄식하며 읊은 것들이다.
| ▲ 정유재란때 왜군을 따라온 종군승(從軍僧) 게이넨이 남긴 '조선日日記'의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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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전라도 지방 관계만 뽑은 것이다.
◇ 1597년 8월 3일 (음력·정유)
아름다운 여러 섬을 지나 전라도의 하구에 들어 서니 그것은 매우 큰 강이었다.
로 나타난다(※ 이 강은 섬진강이다.)
◇ 8월 8일
조선인의 아이를 왜군이 잡아가자 놓아 달라고 애원하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니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 8월 12일
왜군이 마침내 전라도 남원에 도착했다.
그는 남원 주변 산하의 상황에 대해,
남원으로 넘어오는 길목에는 높은 산이 구름 위에 솟아 있다. 뾰족한 큰 바위는 흡사 큰 칼날 같이 날카로왔다. 이같은 산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다. 또 큰 폭포도 있었다.
라고 기록했다. 이 큰 산이란 지리산이다. 그리고,
◇ 8월 13일
남원성 50리밖에 진을 쳤다. …성안에는 5~6만에 달하는 명나라 군사가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 8월 14일
간밤부터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폭포수와도 같다. 일시 변통으로 우지(雨紙)로 진막(陣幕)을 쳤다. 그러나 무섭게 내리는 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음· ·8월 15일 남원성이 중과부적으로 함락 했다.
◇ 8월 16일
성안의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버려 살아있는 동물이란 하나도 없다. 비참할 뿐이다. 인간이란 모두 죽어 엎드려 있을 뿐이다.
◇ 8월 18일
새벽에 성 밖을 내다보니 길가에는 시체가 모래산처럼 쌓여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참경이다.
이날의 남원성 안팎은 잔학한 왜병들이 살육한 조선인의 시체로 그야말로 시산혈하(屍山血河)를 만든 것이다. 게이넨의 ‘조선일일기’에는 자세한 전투상황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함락된 당시의 남원성 주변의 정경은 국방부에서 편찬한 이형석 지음 ‘정유재란사’내용과 거의 같다.
특히 8월 16일의 일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는 비록 왜僧이지만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잔학한 전쟁에 따르는 왜군의 야수성을 호되게 고발했고, 나아가서는 평화스런 세계를 기원하는 한 종교인의 신앙심을 다소나마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
이밖에도 경념은 1597년 10월에 있었던 울산성의 상황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일본의 남쪽지방 큐슈의 우스키 출신인 그에게 당시 10월(음력)의 조선 울산 날씨는 지독하게 추웠던 모양이었다.
“추위와 음료수 및 식량부족으로 전투원들의 사기는 몹시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낮에는 조선군의 감시로 물을 기를 수 없어 밤이 되어서야 겨우 핏물이 섞인 물로 목을 추겼다. 식사는 식량이 없어 벽토(壁土)를 끓여 먹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전황은 몹시 다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군에 포위되어 낮에는 물을 기를 수 조차 없었고 식량이 없어 벽토를 끓여 먹었다니 말이다.
옛날에는 흉년이나 난리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하는 한 방법으로 벽 속에 식량을 얼마씩 넣어 두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벽토란 울산성 벽에는 비상용 식량이 넣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 11월 19일
일본으로부터 많은 나라의 상인들이 왔는데 그 중에는 인신매매(人身賣買) 상인들로 끼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 부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가지고 줄로 목을 묶고 뒤에서 지팡이로 두들기며 걸음을 재촉한다. 이것을 보면 마치 지옥에서 죄인을 못살게 하는 나찰(羅刹)과도 같다.
라고 운운하는 대목이 나온다. 실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전율을 느끼고 통분을 금할 수 없다.
왜인이 이같이 기록할 정도이니 사실은 더 심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탈리의 어느 곳엔가에는 임진왜란 때 팔려간 조선인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몇해전에 ‘안토니오 이’라는 사람이 조선인의 후예라면서 조상의 나라 한국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또 이 기록은 당시 왜놈들이 포로로 잡아간 조선인을 서양 특히 네덜란드(和蘭), 이탈리아 등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매매한 사실도 폭로했다. 뿐만 아니라 일반 왜인들은 조선에의 출병을 반대했으며 또 출전한 왜병들은 치열한 전쟁과 전장의 장비와 보급물자의 부족과 빈약한 장비로 추위에 고생한 나머지 조속한 전쟁 종결을 고대하고 있다는 등 염전사상이 팽배했던 그들의 이명상도 폭로하고 있다.
이 남원성 싸움 때 사쓰마(薩摩)의 다이묘오(大名·성주) 시마즈(島津義弘)는 많은 도공(陶工) 들을 납치해 갔다. 당시 피납된 도공의 후예 중에는 태평양 전쟁의 개·종전 당시의 외무대신 토오고오(東鄕茂德) 즉 박무덕(朴茂德)과 오늘날 사쓰마 자기(瓷器)의 명인으로 유명한 심수관(沈壽官) 등이 있다.
그리고 경념의 이 ‘일일기’에는 전라도를 적국(赤國), 경상도는 백국(白國), 충청도는 청국(靑國)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각 지역을 구별하기 위해서 왜군들이 지은 것이다.
62세 때 종군했던 왜승 경념은 16년 후인 78세에 죽었다.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는 이 ‘조선일일기’를 평화사상에 바탕을 둔 ‘인간기록’이라고 미화하여 말하고 있다. 또 이 ‘일일기’는 일본의 지방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 안양시를 방문한 이치백(오른쪽) 전북 향토문화 연구 원장 과 안도오 아키히사 안양사 11대 주지 | ||
<일본 안양사 주지 안도오씨>
기자는 1995년 6월 10일, 倭僧 게이넨(慶念)이 남긴 정유재란 때 종군일기 ‘조선일일기’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 오오이타(大分)현 우스키(臼杵)시에 있는 안양사(安養寺)를 찾았다.
당시 11대 주지 안도오 아키히사(安藤昭壽 63)씨는 매우 친절하게 맞아주면서 기자의 취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경념(慶念) 스님은 약 410여년전에 창건한 우리 안양사(安養寺)의 初代 주지 스님입니다. 당시 조선 출병으로 온 나라안이 전쟁에 들끓고 있을 때 경념스님은 누구보다도 평화를 주장했던 큰 스님이셨습니다. 그같은 시대에 이 ‘조선일일기’ 같은 귀중한 내용을 담은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日日記’는 오늘날 오오이타현에서 지정한 지방문화재입니다.
이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한 안양사(安養寺)의 안도오 주지는 이어 “경념 스님은 아주 신앙심이 강했으며 자애심이 넘치고 인간성이 풍부한 불교인”이었다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안양사의 15대 주지인 그는 이날 4백10여년전에 경념이 쓴 ‘조선日日記’의 원본을 보여 주었다. 책의 표지는 다소 낡았지만 내용은 조금도 흠집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 종이는 우리 ‘한지’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그는 또한 “경념스님의 기록에 나타난 남원지역 전투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을 마구 잡아다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먹는 광경을 기록한 대목이 내 머리 속에서 영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크게 한 숨을 쉬고는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또다시 이러한 전쟁을 해서는 안되며 오직 평화적인 시대를 계속 이어 나가야할 것이며 특히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는 또다시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나직히 말했다.
이날 기자는 가지고 간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진을 내보이면서 “이는 당시 왜병에게 무참히 목숨을 빼앗긴 수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무덤 즉 ‘무명용사의 묘”와도 같은 ‘만인의총’이라고 했더니 그는 금시에 옷깃을 여미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讀誦하고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우리 일본은 다시 이웃 나라를 괴롭히는 전쟁은 절대로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회가 있으면 한번 남원의 만인의총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안양사(安養寺)는 우스키시의 도심에 있으며 유치원도 경영하고 있다.
남원성(南原城, 사적 제298호)
만인의총(萬人義塚 사적 제1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