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실은 전에 이야기한 '일상사'로 일제강점기를 다시 돌아보자고 이야기하려고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어서, 전에 읽은 책을 토대로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박정희 정권의 '민족문화' 창달과 관련 있다는 것은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면 다들 아시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시지 않으셨나요? 왜 '다카키 마사오'는 이순신 장군을 숭모하였을까? 왜?
그야말로 반일의 기수였던 이순신 장군은 왜 '친일'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에 의해 숭모되었을까요?
대한제국기로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이순신 장군은 당시 애국계몽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합니다.
당시 '위인전'이 새로운 근대적 텍스트로 읽히기 시작하였는데,
아무래도 독립, 자주 등이 이야기될 때이기 때문에 위인전으로 주로 읽혔던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국인은 워싱턴, 알렉산더, 비스마르크, 마치니, 표트르 대제, 나폴레옹, 제갈량
국내는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강감찬, 양만춘, 김유신, 윤관, 최영, 이순신, 권율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인전'이 독해되는 방식입니다.
'위인전'은 근대 민족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 '민족', '국가'를 학습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읽히는 과정은 두 가지로 이어질 수 있죠.
1) 한국 민족, 한국 국가의 '고유성', '주체성'을 발현시키는 자립적 민족국가 건설 지향으로 나아가는 것.
2) 문명화에 압도되어 근대주의의 보편성에 치중하는 것.
2)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조선 시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균과 같은 썩은 자와, 선조와 같은 권력욕에 가득찬 임금이 있는 조선은 결과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순신 장군이라는 먼치킨 캐릭터가 나타나서 조선을 지켜줬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이런 결론이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료 하나를 보겠습니다.
"이순신은 그 섬김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한 명장이였다. 그 심사(心事)는 만고(萬古)에 비쳐 름렬(凜烈:살을 에는 듯이 추운모양), 진실로 높이 우러러야 한다! 김옥균은 극독의 대국, 조선이 나아갈 길을 달견하여 행동하고, 당시의 정권자가 역도로 취급하여도 그 심사는 고금을 빛나지 않는가?(昭乎?) 진실로 존경해야한다. 나는 그 의미에서 온양에 목욕하러 갔던 때 누차 두 사람의 사당과 묘를 찾아서 경의를 표하였다."
이건 누가 쓴 글일까요?
바로 1931~36년에 조선 총독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의 일기입니다.
1934년 11월 7일자 일기에 우가키는 바로 저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것은 단지 우가키 총독의 일만은 아니었고, 당시 <<목포부사>>라는 일제강점기 목포부라는 지방단체의 지방사 서술에도 등장합니다.
이것은 맥락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1920년대 일제는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에 물드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조선의 '구관(舊慣)', '고례(古例)', 역사는 조선인의 민중의식을 식민지 국민의식으로 개량화시키는 사회교화의 소재로 변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총독부 내에서 비서과장, 서무부장을 하던 모리야(守屋榮夫)는 그 과정에서 "무장으로서 이순신, 정치가로서 정몽주, 황희, 지방개량가로서 퇴계, 율곡, 정약용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조선인의 문명적, 정신적 귀감으로 선전하였습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민족통일전선 운동이었던 신간회 운동이 깨지면서 점점 '체제내적' 운동을 하던 <<동아일보>> 계열은 이순신, 권율, 단군, 을지문덕 등의 인물들에 대한 유적보존운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이순신유적보존운동은 볼만 합니다. 1931년 5월 충남 아산군 옥봉면 사정리의 이순신 묘소가 동일은행에 2천 원에 저당잡혀 경매에 붙여지자, 언론은 이 사건을 크게 다룹니다. 특히 동아일보는 성금운동을 하여 이순신 묘소를 대신 사들이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대중의 참여도 많았지만......
이 성금운동에는 소위 '친일파'들도 많이 참여합니다. 동일은행의 사장(두취)이었던 민대식이 심지어 100원을 성금으로 내었고(ㅡㅡ;), 일제가 그 아버지인 현기봉과 함께 '국사(國士)'로 칭송한 호남은행의 현준호, 그 외에도 장길상, 김경중 등의 조선인 자본가들이 많이 참여합니다.
이미 1920년대에 <민족개조론>으로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을 부정한 이광수, 평론가 고영환 등은 이 성금모금에 앞장섰고, 이광수는 1931년 충무공유적을 답사하며 기행문을 14차례 연재하였고, 소설 <이순신>을 썼습니다. 이것은 당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유도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5월 23일 서울에서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위원장 윤치호, 위원 남궁훈, 송진우, 안재홍, 박승빈, 유억겸, 최규동, 조만식, 조광조, 김정우, 김병로, 정인보, 한용운, 윤현태, 유진태 등으로 독립운동가인 사람도 있었지만 친일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러한 운동은 '충군애국'적이며 '반일'적으로 보였지만, '민족의 고유성', '민족의 특수성' 강조는 독립을 위한 정치투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점점 전체주의화되어 가던 일본의 민족주의 고양 속에서, '제2민족'으로서의 조선 민족 이데올로기가 전시체제기에 '내선일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가던 상황 속에서, 이광수, 윤치호 등의 인물이 이러한 논리로 그대로 친일로 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적어도 1930년대에는 대놓고 이순신 이야기를 조선인이 한다고 해서 잡혀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만이 오로지 조선 시대의 유일한 '위인'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일제의 '조선 정체성론'과 하나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로 돌아옵시다. 저는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새로이 근대인 대한제국기에 재발견되고,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여전히 '위인'으로 숭배받았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 사람이 추모되는가?' 이 점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숭모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죠. 훌륭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해야죠.
그러나 왜 일제는 이순신 장군을 여전히 '위인'으로 섬겼을까요?
그리고 왜 다카키 마사오는 이순신 장군을 '민족문화'의 중심축에 놓기 시작하였을까요?
제 생각에는,
영웅사관 - 개인의 위대함에 의해서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관 - 이라는 점에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일맥상통하고
일제강점기를 정체성론적 측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와, 일제강점의 책임을 조선에 돌리고 싶었던 민족사학의 공모,
더 나아가서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동화주의적 교육 속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던 박정희의 머릿속에 있던 역사관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술-전략적으로 다른 나라의 장군들에 비해서 뛰어났는지 여부는 제가 군사사, 조선사를 잘 몰라서 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민족은 대단해!' 혹은 '한민족은 쓰레기야! 미친 민족주의자 새X들'이라고 하는 양쪽 근거로 다 쓰일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더 발전적인 논의는, 이순신 장군 개인의 유능함 여부를 근대 민족국가와 연결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논하는 것일 겁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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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문헌
- 木浦府 編, <<木浦府史>>, 1930.
- 宇垣一成, <<宇垣一成日記>> 2(1931.06~1939.02), 東京 : みずず書房, 1970.
- 이지원, <<한국 근대 문화사상사 연구>>, 혜안,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