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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의 민간인 학살 - 국민방위군 사건
게시물ID : history_71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우젠장
추천 : 12
조회수 : 988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1/05 23:28:03





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최초에대동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육군 준장에 임명한 뒤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부사령관에는 중국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 대령으로 특별 임명된 뒤 보직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할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1951년 봄이 돼서야 이 사건이 국회(당시 부산)에서 폭로되어 드러남으로써,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또한 야당 내에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한민당과 민국당계 인사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에 관련된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군사재판(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사령관 김윤근(金潤根), 부사령관 윤익헌(尹益憲), 보급과장 박기환 등 5명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어, 1951년 8월 12일 야산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군입대 기피현상 증가 및 이승만 내각의 신뢰도는 급격히 실추하게 된다.


진실화해위 진상조사

2007년 3월 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국민방위군사건을 직권 조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또한 2007년 10월 30일에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 훈련 중 구타를 당해 상해를 입고 숨진 희생자에 대해 군 당국이 56년 만에 순직결정을 내렸다.


2010년 9월 8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희생된 이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예우를 갖추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권고했다.


평가


국민 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또 하나의 대형 인재참사이자, 군 고위 간부들의 총체적인 부패함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당시 방위군에 징집되어서도 약간의 뇌물을 바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죽음의 행렬에서 빠질 수 있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징집자들이 국가권력에 의해서 직접적인 학살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군 고위 간부들이 이들에 대한 처우와 관리의 실태를 보면 사실상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 다른 형태의 민간인 학살이라고 해도 될 만큼 국민방위군 참사는 그 규모가 크고 끔찍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통역장교로 있었던 리영희가 이때 참상을 목전에서 보고 겪었다고한다. 리영희에 따르면 '미군 고문단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어 리영희는 “6·25 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행위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사건 사령관 김윤근은 본래 씨름꾼 출신이며 군사 관련과는 상당히 무지했다. 이는 부사령관인 윤익헌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윤근은 단지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위라는 이유로 국민방위군 사령관직책을 맡게 된 것이었다.


당시 국민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을 수사했던 김태청(金泰淸, 뒤에 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냄)은 '윤익헌의 씀씀이에 기막혀 자신은 물이라도 윤익헌이 돈 쓰듯이 해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한편 재판부 구성에도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재판부 구성에서도 당시 현역장성 가운데 방위군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고 동시에 신성모 및 김윤근과 각별한 사이에 있던 이선근 국방부 정훈국장을 임명하였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단 한달여의 행군 끝에 9만 명이 목숨을 잃고도 아무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던 희대의 사건 국민 방위군 참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보도연맹 사건과 더불어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되고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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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생각만큼 많이 알려지진 않았더군요.

앞으로는 시민을 사지로 내몰고 자기 배를 채우는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나질 말아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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