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저희집 아해들과 약간의 거래를 해야 했습죠.
큰아해가 12살 작은 아해 이제 9살
먼저 자고 있으면 다녀 오겠노라고.
10시가 딱 되면 자야 한다는 약속을 받고
걱정이 많이 되긴 했지만. 노파심이었음이.. 흠.
다녀 오니 너무나 이쁘게 잘 자고 있더군요.
영화는 참 재미 있었습니다.
보면서 통쾌한 장면도 있었구요.
답답한 장면도 있었구요.
약간은 부족한 장면도 있어 보였습니다.
조금더 설명이나 더 자세한 장면이 있었으면 어떠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음.. 보고 나서 집에 온 후에
밤새 잠은 못 이룬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억울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하고.
깊은 빡침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보는 내내 노무현 대통령님을 떠올리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러 그런것도 있었지만 영화 그 자체로 보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은 작용한것 같습니다.
이제 조금씩 그분과 오버랩 하려 해보는 단계인것 같구요.
영화를 보면서 송광호씨와 곽도원씨의 디테일한 연기력에 칭찬을 금할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조금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현실은 더욱 치열하고 험악하고 전쟁 같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글도 쓰게 되는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청소년 분들도 많은것 같은데 그때 어떠했는지 잘 모르시는것 같아 그게 늘 안타까웠거든요.
전 1987년 6월 10일 26일 양일간에
광화문에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그장면이 약간 아쉽게 느껴 지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5년도 넘게 지난 과거이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악몽같았던 어제와 같이 생생한 기억들이거든요.
지금의 역사의 기록은 6월 항쟁이라고 되어있지만. 위의 언급처럼 가장 큰 시위가 있었던 날은 양일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대로가운데서 대치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현실은 약간 차이가 납니다.
불법 불법
그때 불법이 아닌 시위는 없었지요.
그들에게 시위란 모두 불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시위대가 선택한 것은 대로의 점령도
그 당시 가장 흔하던 화염병의 선택도 없었습니다.
그날들의 시위는 철저히 비 폭력이 었습니다.
그런이유로 시위는 철저히 인도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력 정치인 예로들자면 김대중 전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가택 연금 상태 였습니다.
그게 뭐냐고 물으신다면. 말 그대로 집에 가두어 놓고 문 바깥으로 못나오게 하는것이었지요.
그들이 나오면 일이 더 크게 생길거라 생각한 그때의 정부,
전두환 정부의 생각이었을겁니다.
시간은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애국가 였습니다.
청년들은 애국가를 제창 하였고 몸에는 태극기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국가가 끝나자 마자..
전경들은 대로를 막고 시위대 앞으로 최류탄을 발사 하며 저희들 군중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직결탄' 그것은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총같은 것 끝에 통 비슷한것이 달려 있고 그곳에 탄을 장착하여.
발사하는 방식의 최류탄을 직결탄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 직결탄이 사라진 계기는 고 이한열 열사의 이후로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결탄의 발사 수칙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것은 군중 사이의 발포가 아닌 것 공중을 향해 발포할것
뭐 대충 그런것이 었던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그러했을까요.
물론 그 수칙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직결탄은 그대로 군중들 사이로 헤집고 들어 왔습니다.
최류탄의 맵고 토할것 같고 숨막히는 그 고통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 고통보다는
직접 날라 오는 탄에 대한 공포가 오히려 더 컸던 그때였던것 같습니다.
군중은 빠르게 빠르게 도망 가야 했습니다.
직결탄은 그런 군중으로 따라 들어 오더군요.
그렇게 도망 가던 도중에 제 옆에 동료가 직결탄에 등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파편이 제 팔뚝에 녹아 들더군요.
마치 아이스크림이 제 팔에서 녹아 들듯이.
팔뚝으로 스며 들었습니다.
아픈것도 모르겠더군요. 아픔을 느낄 수 있던 순간들이 없었으니까요.
제 옆에서 직결탄을 직접 맞으신 그분...
저는 아직도 그 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 당시 시위를 하다가 다치면 병원에서도 안 받아 준다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비폭력이었지만.
철저히 비폭력의 시위대였지만.
진압은 진압을 위한 작전이 아닌 그저 폭력적인 억압이었습니다.
50센치가 넘은 쇠심이 박히 곤봉에 맞고도 아픔을 느낄새도 없이 도망을 치던 그날
그리고는 2주가 넘는 세월을 아프더군요. 부러지지 않은것이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전 아직도 1987년 초여름이 시작되던 6월의 그날들이 너무도 생생합니다
호헌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던
그 수많았던 학생과 시민들.
그리고 그것을
영화처럼 애국가가 끝나자 마자 진압하던 전경들..
어찌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저의 기억은 여기 까지 입니다.
그리고 일명 6.29 선언이라는 항복성명을 받아 내게 됩니다.
그것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 내었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대통령이 된것은 다시 군사정권의 노태우였습니다.
그 때의 허탈감 여러분들은 아실런지요.
제가 정말 무서웠던것은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건 제가 알고 저와 함께 밥먹고.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저에게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하는것이 었습니다.
시위대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칠때마다
주변으로 들리던 빨갱이 빨갱이
전 빨갱이가 아닙니다 빨갱이가 아닙니다.
전 그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것을 그르다 하며 옳지 않은것에 항거 하며.
독재 세력에 대한 외침을 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에게 빨갱이라 손가락질 했습니다.
전 정말 빨갱이었을까요.
하아~
사람들의 무지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것을 무지로 만들어 가고 싶어 했던
세력들에 대한 공포
무서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길어 지는것 같네요.
제가 알려 드리고 싶었던 것은.
영화의 짧은 장면 에서 느끼셨던것보다.
열배 천배는 더 현실은 극박했고 치열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겨 나가기에 너무나도 힘든 현실이었구요.
아 ~ 영화를 보고 나니 여러 감정이 교차 하는것 같습니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역사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 요즘은 더 공포 스러움을 느낌니다.
주위에는 여전히 불합리 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소리에
여전히 저에게는 빨갱이라는 꼬리 표가 따라오는것이 현실이니까요.
그래도 무던히도 애썼던것 같습니다.
5월의 그날들이 오면 그렇게 무참히도 군화발에 희생되고 도륙되어진 잔인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그날들의 진실을 알리고 또 알리려 했던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력한것이 어쩌면 지금
5월의 그날들이 사태가 아닌 민주화 운동으로 우리가 배울수 있는 역사가 되게해준 밑거름이 된것도 같습니다.
그때는 정말 치열하게 알려야 했습니다.
잔인했고 알면 치가 떨리는 그런 일들이었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사 이니까요.
지금은 5월이 되면 대학가 내에서는 어떤 행사들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제가 다니던 곳에 5월이 되면 가보고도 싶습니다.
아직도 생각나는 그날들.
그리고 닥장차 안.
한명씩 불려 가고 다녀와서는 말이 없던 동료들.
그것만으로도 공포감에 휩싸여
막상 제가 끌려 갔을땐
그저 다시는 시위에 참여 하지 않겠다는 각서 한장을 쓸수 밖에 없었던
나의 보잘것 없던 용기.
그것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후회없었던 날들..
물론 그 후에 제가 시위를 참여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잡히지는 않았죠.
아이고.. 글을 어떻게 마무리 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네요.
요약을 하자면 현실은 휠씬 치열하고 비참했다는것과.
영화를 보고 와서는 분통하고 억울해서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는것.
뭐 ~ 그정도인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국민이란 존재 하는지.
정말 그들에게 국가란 국민인지를 묻고 싶어집니다.
그게 현실임에 더욱 분개 하고요.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 하구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니 엉망이네요.
글도 역시 쓰던 사람이 쓰는것인가 봅니다
오징어가 글을 쓰려니 영.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