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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사로잡은 왜인의 이름은 망고다라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놈들의 정체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죠.
그들이 조공차 간 왜인인지 아니면 약탈을 위한 왜적인지는 역시나 알 수 없었으나
중국 영파부 지역에서 중국인과 충돌이 있었고 그 일로 중국인 8명과 같이 빠져나왔고,
그러다 배안의 식량이 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바다 어딘가의 섬에
그 8명의 중국인을 버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단순 조공선이어도 중국과 간접적으로 관련되는데 이놈들이 중국에서 난리를 치고 중국인 8명을 데리고 왔다니
이 왜인들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지는 정말로 외교적 문제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여하튼 버렸다는 중국인의 행방을 찾는 게 상당히 중요해졌습니다.
이에 중종은 잡은 왜인에게 중국인을 버린 그 섬이라는 게 대체 어디쯤인지 추궁하게 합니다.
7월 9일, 보고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망고다라의 초사에 '중국 사람을 둔 곳이 육지에서 내려 걸식하던 곳과 10여일 거리로,
네 개의 작은 섬을 지나 다섯 번째의 섬이다.' 하였는데 이미 그들을 버린 지 한 달이나 경과했으니,
생존하여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비록 찾게하여 그들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중국으로 송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유치시킬 수도 없으니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난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고서도 사람을 시켜 찾지 않는 것은
또한 미안한 일이니, 이에 대해 영의정 남곤에게 의논하게 하라.'
라고 전교합니다.
참고로 중국으로 송환하는 일이 어렵다는 이유는,
만약 중국 영파부에서 왜변을 숨기고 황제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 왜변으로 잡힌 중국인을 송환해버리면 진상이 들어나니
영파부 관청이 분명 처벌을 받을 것이기에 제후국인 조선 입장에서 곤란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남곤은 왜인들이 한 말을 다 믿을 수도 없고
사실이라 해도 버려둔 지 한 달이나 지났으니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다,
찾아도 송환하는 게 곤란하니 찾아나서는 게 무익할 것같다는 회의적인 의견을 비추지만,
중국인이 우리나라에 버려졌다는 말을 들은 이상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찾아 나설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회의적이긴 해도 영의정도 중종의 의견에 동의를 했으니 그들을 찾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이에 선전관 여맹온과 중국어, 일본어 통역관을 한 명씩 보내 찾게 합니다.
'걸식한 곳에서 열흘 정도 떨어진 곳.'
이라는 단서 하나로 조선에 섬이 대체 몇 개인데 어떻게 그 중국인을 찾을까 싶지만....
한반도가 좁긴 좁나봅니다.
또 찾았습니다-_-;;;
영을 내린 지 11일 후인 7월 20일, 충청도 수사 황침의 장계가 올라왔고,
실록 기록에 누락됐지만 후의 이야기 맥락으로 봤을 땐 전라도에서도 일부 찾은 듯합니다.
일단 황침의 장계를 보면,
고기잡이 최임송이 조업을 위해 가외덕도에 들어갔다가 8명의 표류인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배에 싣고 왔는데,
황침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필담으로 물으니 중국 영파부 사람이라는 겁니다.
망고다라가 말한 그 중국인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표류하게 됐냐라고 물으니,
자신들은 소금을 굽는 사람들인데 황제가 삼근야륵(무엇인진 모르겠습니다ㅠㅠ) 4개를 구하므로 이를 굽다가
나무가 모자라 해산(海山:바닥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바다 한가운데에 이룬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었는데,
캄캄한 밤에 풍랑을 만나 배가 바람에 불러 밀려 나가 10인 가운데 8명만 목숨을 보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라?
뭔가 표류한 이유가 너무 이상합니다.
그들은 분명 납치되어 이리로 끌려와서 버려져야 하는데
중국 바다섬에서 나무를 하다가 조선까지 밀려와 표류를 하다니요.
일단 포획한 중국인 8명을 서울로 올려보내게 합니다.
남곤 등의 상소로 일단 이 중국인들을 추국하게 하는데 그래도 중국사람인지라 상당히 대우해줍니다.
추국하는 방식도 고문은 하지 않고, 음식도 장만해 먹이는 등의 호의를 배풀죠.
하지만 이런 호의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나무하다가 표류한 사람이라 말하니,
남곤이 이야기 하기를,
'중국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추문하였으나 다들 바른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소금을 고는 일 때문에 섬 안에서 땔나무를 베다가 바람에 표류되었다.'고만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사람이 전라도로 표류해 간 중국 사람과 미리 입을 맞추었기에 그런 듯한데,
전라도에서 사로잡힌 중국사람은 글을 안다고 하니 태평관 관반청에 옮겨두고 직접 묻겠습니다.'
하니 중종은 끝까지 묻되, 승복하지 않으면 왜인과 면질시켜서 알아내도록 하게 합니다.
다음날 8월 3일 결국 중국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합니다.
중국인 한 명이 공초하기를
'5월에 왜적이 변방에 침범하여 영파부 태수가 곤사를 거느려 맞싸우고
태수가 왜적을 져부수니 그들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며칠 뒤 자신들이 소금 땔나무를 베는 일 때문에 바다 가운데 있는 도화산 밑에 있다가
바람을 만나 닻줄이 끊어졌고 표류하여 바다 가운데 들어갔다가 왜선을 만났다.
10명 중 2명은 물에 뛰어들려다가 창에 맞아 죽고 8명은 사로 잡혀 굶주리다가
왜적에게 놓아달라 애걸하니 섬에 방치하였는데, 그러다가 귀국 사람을 만나서 나오게 되었다.'
라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대체 왜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남곤은 우리나라에 와서 약탈을 했을 때 그들도 가담을 일정부분해서
조선 정부에 추궁당하고 벌을 받을까 두려워 숨기려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합니다.
뭔가 미심적은 구석이 없는 건 아니나 여하튼 사건의 전황이 들어난 듯 보입니다.
사실 조선 조정에선 중국인이 끼어있는 이상 정확한 사건 진상을 크게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미 왜적은 모두 섬멸 했고 중국인이 발견됨으로써 뭔가 일이 너무 커져버린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파부에서 조공선이든 왜적이든 그들이 분탕칠을 친 것은 사실이었고
중국인들이 조선 영토에서 사로 잡힌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젠 이 일을 어떻게 깔끔하게 마무리하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었죠.
중종은 일단 중국인은 중국으로 송환하는 걸로 결정 짓습니다.
문제는 포로로 잡은 왜인들인데
사실 마음같아선 조선 정부에서 처리하고 싶지만,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경복궁 사성전에 나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판윤, 좌참찬, 우참찬, 형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죄다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중국사람과 왜인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가에 대해 의논하게 합니다.
전체적인 의견은 중국사람을 찾았으니 송환하는 게 맞고,
왜인도 같이 보낸다면 평소 명나라에서 조선이 왜국과 가까워 몰래 교통한다고 여길 것인데,
이 왜인들을 중국으로 보낸다면 이런 의심을 없앴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도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에서 분탕질을 친 왜적이니 조선이 처리해야하는 것이 옳으나
명나라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이상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죠.
결국 중국인과 왜인, 그리고 섬멸한 왜인의 수급(잘린 머리)까지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고,
중국인과 왜인을 추문한 기록 문서를 정리해 보내는 것으로 결정짓습니다.
이렇게 중국 송환을 위한 일이 한창 진행되던 8월 15일,
몇 개월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조원기가 돌아왔는데 여기에서 이 왜적들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옵니다.
왜인 종설과 송소경이라는 인물이 각기 중국으로 갔는데,
종설은 조공을 사칭하고 무언가 다른 일을 꾸밀 계획으로 중국 영파부에 갔으나
뒤에 온 소송경이 진짜 조공을 위해 와서는 종설의 거짓을 갖추어 말하니,
종설이 크게 노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조공선이 맞으면서도 아닌 것이었고
중림 등이 자신들이 조공선이라 주구장창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죠.
8월 29일, 형조참판 성세창을 명나라 수도로 보내어 중국인을 소환하게 하고,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같이 보내는데 그 내용이 대략,
'사방이 대대로 큰 은총을 받아왔으나 작은 공로도 보이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왜노가 상국 지방을 교란하여 흉악을 부리고 관병을 죽이기까지 하고도
천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지역에 이르렀음을 알고, 신(臣)이 황위에 의지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습니다.
사로잡은 중림 등 2명도 죽여야 하겠으나, 죄가 상국을 범한 데에 관계되므로
마음대로 처치할 수 없기에 이제 적왜 2명과 수급 32개,
영파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 2개와 왜선이 타고온 배의 선창을 성세상을 시켜 보내며,
아울러 탈환한 중국인 8명도 데려가게 합니다.'
이렇게 조선 서해안을 들석이게 만들었던 왜적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일은 잘 마무리 된듯 보이나
조선엔 사실 여전히 숙제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명나라와의 관계엔 최상의 선택을 했으나 반대로 말하면 일본과의 관계는 당연히 좋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왜인들이 명나라와 조선에서 분탕칠을 친 건 맞으나 왜적 그 자체는 아니었으니까요.
15년이 지난 중종 32년(1537년) 일본 국왕(정확히는 쇼군)이 사신을 보내는데,
그 때 서신의 내용이,
'저희나라 백성 50여명이 역풍에 표류하여 귀국의 변방 포구에 닿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나라로 보내지 않고 도리어 중국에 아뢰고 바쳤습니까?
듣건데 유구국(오키나와)의 표류한 백성이 귀국의 바닷가에 닿으면 잘 돌보고 후에게 상주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한다하니,
한 나라에는 박하고 한 나라에 후하게 하는 것은 한가지로 인애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따지듯 물었죠.
이에 답하기를 '중림 등은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표류한 것이 아니라,
영파부에서 난을 일으켜 장수를 죽이기까지 하고, 또 우리나라 변방에 이르러
세 지역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표류한 백성이 아니라 도둑의 무리이므로
형구를 채워 중국에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긴 합니다.
오히려 일본 국왕보다 문제는.. 이 중림 일당이 대내전, 즉 오오우치 일족이 다스리는 지방 사람이었는데,
조선에선 대내전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쪽에서도 그것을 강조하였기에 상당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내전은 그 세력 면에서 대마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컷고
특히나 왜구들이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본국에서 팔면 대내전이 찾아 조선으로 되돌려 주는 등의 일도 하였기에
이번 일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후에도 계속 이 일을 잘 무마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조선이 가진 다른 숙제는 조선에서 난리치 왜인을 섬멸하긴 했으나,
조선 수군의 헛점이 그대로 들어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다음편엔 가능하다면 이 일을 계기로 조선 수군, 특히 선박에 대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논의
그리고 어떻게 판옥선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 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사두사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