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1년 3월 19일 백 장군의 구속
작년 여름, 한 인물이 화제에 올랐다. 백선엽 장군이었다. KBS에서 제작했던 백선엽 관련 다큐멘터리 <전쟁과 인간>은 솔직히 졸작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만주 벌판의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대로 일본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전쟁과 인간>은 그 부분을 생략했다. 백선엽이 6.25 전쟁사에서 획기적인 군공을 세운 것이 맞지만, <전쟁과 인간>은 그 빛
...만 보다 보니 그림자를 놓쳤고, 그래서 실패한 것이다.
한 사람을 평가하려면 빛과 그림자 모두를 보아야 한다. 빛을 외면하는 것도 그림자에 눈 감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백선엽과 매우 관련이 깊은 한 사람의 빛과 그림자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름은 백인엽. 백선엽의 동생이다. (백선엽 형제는 2남 1녀였는데, 그 중 여동생 백희엽은 현금동원력 랭킹 수위를 다투었던 ‘백할머니’로 더 유명하다) 백인엽은 전쟁 당시 17연대장으로서 지금의 황해도 땅인 옹진반도에 있었다. 백인엽은 급작스런 인민군의 공격에 맞서 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는 세기의 오보의 주인공이 된다. 17연대에 와 있던 종군기자에게 “서울로 돌아가시오. 17연대는 해주로 돌입한다고!” 라고 일갈한 것이 ‘국군 해주 점령’으로 커지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북침설’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공을 세웠고, 절치부심의 17연대를 이끌고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수훈을 세운다. ‘형제는 용감했다’라는 헐리웃 영화 제목에 꽤 어울리는 역정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데 백인엽은 적에게 용맹스러웠다지만 그만큼 아군에게도 잔인했다. 그는 ‘즉결처분’으로 유명했다. 적에게 등을 보였다거나 중대한 과오로 아군에게 피해를 입혔다거나 하는 명목도 있었겠지만 정말이지 어이없는 죽음들도 있었다. 한겨울에 지프차 운전병이 시동을 꺼뜨렸다는 이유로 즉결처분됐다. 전화 가설 장비를 잔뜩 지고 가던 통신병이 대열에서 떨어져 허덕이며 걷는 와중에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자 통신중대장에게 총살을 명령했고, 중대장이 통신병의 손에다 한 방 쏴 버리고 물러서자 자신이 직접 쏘아 죽였다. 그리고 사단장 훈시 중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병사들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붙였다는 전설(?)도 존재한다. 그에게 인격적인 모욕과 즉결처분의 위협을 당하면서 ‘네가 권총을 뽑으면 나도 뽑아서 너 죽고 나 죽는다.’라고 이를 갈았던 장교들도 많았다고 전한다. 그가 군단장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도 휘하의 사단장으로 데리고 있었는데, 백인엽은 박정희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내리치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고, 그런 날마다 박정희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다. 아마 술 먹고 서울의 이승만을 두고 이렇게 한탄했을 것이다. “각하. 이런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나라가 지켜지겠습니까.”
허영도 많았던지 대령 신분으로 자기 지프차에 별판을 달았다가 시내 한복판에서 형 백선엽에게 걸려 조인트를 까이는 등 호되게 혼난 사건 등 여러 낯부끄러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끝내 별 넷은 달지 못하고 중장으로 제대한다. 5.16 이후에는 군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되기도 했다. 무려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감형으로 풀려난다. 박정희 소장이 선글라스 너머로 자신의 상관이 어떻게 해먹는지 똑똑히 지켜 보았을 테니 그만한게 다행이리라.
그런데 그의 군 생활은 기껏해야 15년도 안되었다. 그리고 예편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 여덟이었다. 그 뒤의 기나긴 세월을 그는 ‘교육자’로서 보냈다. 형 백선엽의 선자와 자신의 이름의 인자를 따서 만든 선인학원을 세우고 그 이사장으로 자리한 그는 산하 학교에도 형의 호인 '운산'을 비롯 자신의 호인 '운봉', 어머니의 이름 '효열', 아들의 이름 '진흥' 등을 학교의 이름으로 지었다. 모르긴 해도 ‘김일성대학’과 ‘김형직사범학교’ 등이 즐비한 북쪽 공화국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백인엽은 박정희와 감정이 좋을 것 같지 않았지만 형 백선엽은 박정희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선인학원은 국내 사학 발전사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급성장했다. 법 따위는 백인엽에게 ‘즉결처분’ 대상 이상이 아니었다. 학교 확장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는데 주민들이 집 팔기를 거부할 경우 그가 쓴 수법은 가히 군 작전을 연상케 한다. 동네 가운데의 집을 사들인 후 폭약을 터뜨리는 등 난리를 쳐서 주변을 못 견디게 하는 수법을 썼다. 학교 확장을 위해 도화동 언덕 위의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은 중대한 외교문제까지 야기시켰다.
교사와 학생은 그의 졸병과도 같았다. 흐트러진 모습 보였다고 졸병들 총살하던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교사는 가차없이 해고시켰고 교사들로 하여금 예비군복을 입고 보초를 서도록 했다. 학교를 세우는 인부로서는 학생들이 제격이었다. ‘돌 하나 나르기 운동’을 펼치면서 학생들은 검은 교복을 입은 노가다로 “공부하면서 건설하는” 보람(?)에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인건비, 건설비는 무지하게 아껴서 임금을 떼먹히게 생긴 목수 한 명이 들이미는 톱 앞에서 혼비백산 도망가야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조직적인 부정입학과 편입학, 심지어 졸업장 판매는 일상이었다. 한 번도 교문안에 발을 디밀지 않고도 졸업장은 영수증처럼 현금 내지 수표와 교환됐다. 1천평이었던 학교 부지는 60만평, 학생 수는 3만 명이었다. 가히 인천의 학교 왕국이었다. 교문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저게 다 돈이라고 흐뭇해했다는 백인엽이 1981년 3월 18일 구속된다.
‘서울의 봄’ 시절, 운봉공고 운산기계공고, 항도실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농성을 벌인 것을 시발로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에서도 백인엽 타도의 깃발이 올랐고 (대학생들에게 백인엽은 남학생은 정장, 여학생은 투피스를 의무화했었다) 박정희가 죽은 이후 끈떨어진 갓이 된 무소불위의 빽이 사라진 선인학원은 문교부의 감사를 받는다. 그 결과 ‘인천의 무법자’ 백인엽이 마침내 두 번째로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학교를 나라에 헌납한다고 했는데 인천 시민들은 이를 “인천직할시 승격 이후 최대의 경사”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출소 이후로도 ‘건설본부 자문위원’으로서 선인학원의 주인행세를 하려던 그를 몰아내기 위해 학생들은 피땀을 흘리며 싸워야 했다. 시국적 이유가 아니라 학내 분규로 휴교령이 내려진 것은 인천대학교가 해방 이후 처음이었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백인엽이 박정희보다도 오래 군림했던 선인학원은 인천시로 그 운영권이 넘어간다. 백인엽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94년이었다. 그가 구속된 1981년 3월 19일로부터도 13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