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타지 설화 분석
거타지 설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진성여왕 때 나라가 어지러워 도적들이 일어나고 시중에 은어가 유포되었다. 왕과 신하들 이를 보고 말하길 왕거인이 아니면 이런 글을 쓸자가 없다하여 잡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글을 지었는데 하늘이 감응하며 옥에 벼락을 쳐서 그를 풀려나게 하였다.
이때 왕의 아들 양패가 사신이 되어 당나라로 가는데 후백제의 해적들이 길을 막음으로 50명의 궁사를 뽑아 데리고 갔다. 배가 곡도에 도착 했을 때 풍랑이 일어나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는데 점을 치니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활 잘 쏘는 사람을 하나 이 섬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요”라 하였다. 이에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남기기로 하였는데
거타지라는 병사의 이름이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남겨두고 떠났다. 남겨진 거타지가 수심에 잠겨 있노라니 홀연히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하길 ”나는 서해약인데 해가 뜰때마다 중이 내려와 다라니를 외면서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모두 빼먹고 남은 것은 우리 부부와 딸 뿐이요 그를 활로 쏴주시오“라고 했다. 거타지가 응하고 숨어서 기다리니 이틑날 과연 중이 와서 주문을 외워 용의 간을 빼어 먹으려 했다. 거타지가 중을 맞추자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서 죽었다. 노인이 나타나 사례를 표하고 자신을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를 호위하여 당나라로 보내니 당나라 황제게 그것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여기어 후하게 연회를 베풀고 상을 내렸다. 거타지지는 본국으로 돌아와 꽃가지를 꺼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고 함께 살았다.]
설화의 전승은 구전으로 민중들을 통해 전하여지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변형을 거치겠지만 그 창작의 기원까지 모두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창작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삼국유사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삼국유사의 설화들 대부분은 첫째 대외적인 경외심을 심어주는 사건이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비상한 사건들을 주로 기록한다는 것 둘째 기록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대부분 실제 정치적 사건, 역사적 사건을 이끄는 인물들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삼국유사의 설화들은 보통의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창작되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세련된 고도의 상징과 비유가 많다는 점이다. 때문에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설화의 대부분은 당시 집권층이나 지식인층에서 정치적 목적 혹은 국력을 결집할 의도로 창작되어 퍼트려졌음에 기인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거타지설화 역시 단순한 민중설화의 차원이 떠나 당시의 특정한 정치집단에 의해 창안되어 유포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번에 분석하고자 하는 거타지 설화 역시 이러한 목적이 반영된 설화라고 생각한다. 이는 설화의 처음 도입부에서 서술되는 왕거인 설화를 통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삼국유사 보문에 전하는 [진성여왕 거타지조]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 51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지 몇 년이 되자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 위홍잡간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하여 정치를 어지럽히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어를 만들어 글로 써서 길 위에 던져 두었다. 왕과 권세를 잡은 신하들이 이것을 보고 주워 보고 말하기를 “왕거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글을 지을 것인가?”하고는 즉시 왕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였다. 이에 하늘이 옥에 벼락을 쳐서 그를 나가게 했다.]
해당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대야성에 은거하던 왕거인이란 인물로 유사하게 기록된 내용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듯 보인다. 이 구절을 살펴보면 신라 하대에 이르러 과거 왕권강화와 호국 불교적 성향을 보였던 불교가 선종불교의 발전 속에 점차 지방분권적이고 왕권에 비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과거 호국불교로 왕권을 보좌하던 불교사상은 은어인 다라니경에서 보듯 거꾸로 그 지식을 바탕으로 왕권을 비난하는 위협으로 변질되었음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와 동일하게 기록된 왕거인의 사례다. 이 부분은 신라 하대에 이르면 지식인층에서 정치적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민중들에게 선동적인 글을 유포하는 사례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에 유포된 비판적 논조는 위의 은어로 표현된 글만이 아니였을 것이다. 지방통제가 무너진 신라국정 상황 속에 다양한 소문들, 이야기들, 설화로 만들어 민중들에게 유포되었을 정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중국 설화와의 유사성
이 설화의 외부적 정황이 이러하다면 설화 내부에서도 또한 설화가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한게 아니라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해당 이야기의 기본적 뼈대가 되는 [어려움에 처한 용의 구출과 보상]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중국의 설화에서도 비슷한 유형이 보여 지고 있다. 태평광기 권 421에 수록된 [임욱] 설화가 그것으로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당나라 건초연간에 서책을 읽는 청년에게 한 노인이 찾아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며 구해 달라다한다 노인은 사실 연못에 사는 황용으로 어떤 도사가 주문을 외워 물을 마르게 하여 자신을 해치려 함으로 도와달라 하는데 임욱에게 자신이 알려준 주문을 외워 막아달라는 것이다. 임욱이 노인의 말대로 가보니 한 도사가 주문을 외워 물을 마르게 하여 황용이 다 드러나 있었다. 임욱은 용이 알려준 주문을 외워 물을 채우자 도사가 말하길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황용을 잡아 먹으려 하는데 왜? 방해하느냐며 도사는 다시 적용으로 변해 물에 들어가 다시 물을 마르게 한다. 다시 임욱이 재차 주문을 외우자 결국 도사는 포기하고 도망쳤고 황용은 임욱에게 귀한 보석을 주어 보상한다]
거타지설화와 비교해 보았을 때 풍랑을 만나서 배가 못 나간다는 부분과 화살을 쏘아 용을 구한다는 것과 용녀 혼인 부분만 빼면 거타지설화는 중국의 임욱 설화와 기본적인 구조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해당 중국 설화가 실린 서적은 송 태조의 명령으로 편찬한 것이지만 내용상 이전의 중국의 설화를 정리한 것이다. 때문에 삼국유사에서 거타지 설화가 나타날 당시에는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란 뜻이 된다. 따라서 거타지설화가 이를 모태로 삼았을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물론 중국에서 이러한 설화가 존재하였다 하여 거타지 설화에 바로 반영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한편 당나라를 오가던 상인과 유학생후해진많았던 신라사회의 풍토와 송태조 시기 수집한 설화에 수록될 정도로 유명했음 생각해 보면 이후해진이야길 접하였을 가능성도 많다. 따라서 거타지 설화는 중국의 문헌을 읽은 독서인이나 혹은 이야기는 접할 가능성이 있는 당나라를 오고간 사람에 의해 전승된 중국의 “용의 구출”이야기가 바탕이며 이 이야기는 한반도로 건너와 다시 신라 말의 시대적 상황과 민중들이 이해할 만한 여러 상징이 보태어지며 거타지 설화로 완성되었다. 이는 원형 설화의 성격상 거타지 설화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지식인 혹은 대당유학, 교역이 가능한 계층에서 처음 출발한 특정 목적을 지닌 설화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떤 의도가 반영되었을까? 설화를 좀 더 살펴보자
2) 작제건 설화와의 관계.
한편 거타지 설화와 유사한 또 다른 설화가 [고려사] 권1 세계편에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권 1에는 고려왕가의 세계를 밝히며 왕건의 5대조에 대한 설화와 “작제건 설화”를 함께 적고 있는데 이 역시 주요 뼈대가 되는 스토리가 거타지 설화와 매우 흡사하다 다음과 같다.
[보육(寶育)이 곡령(鵠嶺)에서 소변을 보아 삼한을 덮는 꿈을 꾸고,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이야기하였는데 형은 제왕을 낳을 꿈이라면서 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이어 두 딸을 두었는데 아우의 이름이 진의(辰義)였다. 진의는 언니가 꿈에 오관산(五冠山)에서 다시 오줌이 천하를 잠기게 하는 꿈을 꾼 것을 비단 치마를 주고 샀다. 당나라의 황제가 잠저 시에 송악의 보육가에 와 묵게 되었는데, 찢어진 옷을 깁는데 언니는 코피가 나서 아우가 대신한 것이 인연이 되어 동침하고 작제건을 낳았다. 작제건이 장성한 다음 아버지를 찾아 신물(信物)인 신궁(神弓)을 가지고 당나라 상선을 탔다.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점을 치니 고려인을 섬에 내려놓으라 하였다.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은 서해 용왕인데 늙은 여우가 나타나 경을 외우면 두통을 일으키니 쏘아 달라는 것이었다. 약속한 대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니 용왕은 작제건을 용궁으로 초청하였다. 작제건은 용녀를 아내로 삼아 칠보와 양장(楊杖) 및 돼지를 얻어 돌아왔다.]
위에 언급한 작제건 설화는 2가지 이야기 구조를 지닌다. 첫 번째는 매몽 설화로 이는 삼국유사의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김춘추를 맞이하게 되는 매몽 설화와 흡사함을 알 수 있고 두 번째는 작제건이 황제인 아버지를 찾아가는 설화로 이는 삼국유사의 거타지 설화 흡사하다. 따라서 작제건 설화는 고려 왕가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설화를 윤색하며 다양한 설화를 혼용했음을 알 수 있다. 작제건이라는 이름부터 풀이해보면 “作帝建”황제를 만든다는 뜻으로 아들이 용건(왕륭)이라 전함에서도 알 듯 모두 고려 태조 왕건을 중심으로 고려 왕실이 제왕이 되는 신성함을 논하기 위한 설화다. 거타지설화와 유사한 설화인 작제건 설화에서 차용한 매몽 설화를 보자 원형 설화의 주요인물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누구인가? 이는 왕통의 성격과 연관이 있다. 김춘추의 가계는 성골인 선덕여왕을 끝으로 등장한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삼한을 통일한 가문이다. 신라는 김춘추 왕계의 치세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마지막인 김춘추 계통의 왕인 혜공왕의 죽음을 끝으로 화려한 영광을 끝내고 잔인한 왕권 다툼과 극심한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삼한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 되어 있는 삼한을 통일한 김춘추의 존재와 그의 설화를 끌어와 작제건 설화에 차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작제건 설화에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한 윤색으로 매몽 설화가 나타났다면 또 다른 축을 담당하고 있는 ‘용의 구출’설화 즉 거타지 설화 역시 성격과 목적상 그 역시 왕통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소를 함께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의미의 정도가 적어도 삼한을 통일한 왕계인 태종무열왕계의 혼인설화에 맞먹을 정도의 강한 왕위 계승의 상징을 민중들에게 전해주는 내용이며 뜻이다.
3)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이야기.
[아찬 양패(良貝)는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선발하여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에 이르자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은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하니 "섬에 신지(神地)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으니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았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공에게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오." 했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 3년 지방 각지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었고 진성여왕 6년 완산의 견훤이 후백제라 부르며 새로운 국가를 참칭했다고 적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신라의 국가시스템은 이미 붕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성여왕을 시작으로 신라는 더이상 삼한을 통일한 신라가 아니라 경주지역 지방정권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 국가의 대외적 존립과 국왕의 위신과 관계된 대당외교 역시 막히게 되었음은 자명한다. 진성여왕 6년 후백제의 궐기 이후 진성여왕 7년 왕의 사신이 당나라로 가는 도중 일어난 사건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모르겠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이렇게 전한다. “진성여왕 7년 병부시랑 김처회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을 바치게 했으나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거타지 설화의 첫 문장이 바로 이러한 시대상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일까? 더불어 곡도는 지금의 백령도로 이 섬은 신라시대 대당교역로 3개 루트 중에 2개가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으로 전통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자 항로였다. 때문에 참고한 글에서는 더불어 거타지의 존재를 지역의 해상권을 상징 한다 보고 있다. 한편 잠시 작제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작제건 설화에서도 설화는 이러한 해상권과 연계된 지명을 전한다. 송악 즉 고려 태조 왕건 가문의 고향이자 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돌아오며 끝을 맺는게 그것이다. 고려 왕건의 가문이 송악지방의 호족으로 대당무역을 통해 성장한 해양세력 가문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거타지 설화에 나오는 곡도라는 지명에서 보듯 두 설화 모두 동일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거타지설화와 작제건 설화 모두 경인지역 해상세력의 성장과 연결된 동일한 설화의 다른 전승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문제는 두 설화는 이러한 배경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연대적으로 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거타지설화는 진성여왕 때의 일이라 적으나 작제건 설화의 경우 찾아가는 아버지가 당나라 숙종(재위기간 756~762)이라는 점이 그것으로 고려사에 나오는 원나라 한림학사와의 대화에서 유추한 숙종이 아닌 선종(재위기간 846~859) 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시기적으로 진성여왕(재위기간 887년∼897년)과 심한 괴리를 지닌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 설화의 이야기에 비해 거타지설화는 . 배경인 진성여왕이 즉위할 때 왕건은 이미 10세로(877년 출생) 청년이었다. 대체 어떤 이유일까? 설화의 내용으로 좀 더 들어가 거타지 설화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진성여왕의 아들이라는 양패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일단 진성여왕은 자식이 없었으며 헌강왕의 서자인 요를 태자로 세웠던 기록만 있다. 따라서 왕자 양패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가 않는다. 한편 양패(良貝)는 삼국유사상 표기가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양원(良員)으로도 읽으며 더불어 거타지 설화와 동일한 설화를 전하고 있는 [고려사] 권1에서 김양정(金良貞)이란 인물을 전하기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 양정(良貞)으로도 읽기도 한다. 이는 두 설화의 유사성을 염두해 둔다면 고려사의 김양정이라는 인물과 삼국유사의 양정이라는 인물이 동시에 보인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더불어 김양정 이란 이름을 기록한 고려사의 출처인 편년통록은 김관의가 고려 초에 만든 편년통재와 예종 때 홍관이 이것을 보완 ·찬술한 편년통재 속편을 개찬한 것이다 그 역시 오랜 전거를 기초한 것임으로 나름의 근거를 두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는 또 다른 가설도 가능하게 된다. 양정이 실존 인물이라는 본다면 거타지의 양정은 진성여왕의 아들이 아닌 더 윗대의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양정은 사료에 전하고 있는 신라의 인물 헌정, 균정과 같은 항렬의 인물을 의미하며 거타지 설화에 등장하는 양패와 선원 50명의 이야기 역시 진성여왕이 아닌 문성왕 때의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문성왕 때 무슨 일 있었는가? 다시 삼국사기를 보자. [문성왕 8년 청해진의 궁복은 왕이 자기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이지 않음을 원망하여 진에 웅거하여 배반 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는 용서 할수 없는 것이므로 근심하고 염려하여....중략...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배었다...] 이 시기는 전남 진도에 근거해 해상왕국을 세웠던 장보고가 피살되었던 시기다. 당시 신라 정부는 장보고를 어찌하지 못 할 정도로 매우 강성했으며 암살이란 방법으로 겨우 평정했다. 전한다. 이때 장보고가 죽임을 당한 이유로 신라왕과 혼인관계를 맺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못 함을 전하는데 장보고의 혼인을 통한 신분상승시도는 용과 혼인에 성공한 작제건과 거타지를 연상 시킨다. 문성왕 8년 장보고는 죽었다고 하나 그의 죽음으로 청해진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문성왕 8년에 일어난 청해진의 반란은 장보고의 죽음으로 어느 정도 진정은 되었지만 그 후 신라조정은 5년이 넘도록 청해진 자체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 하였으며 이들은 수년간 전남 해안에 웅거하며 신라의 해상권을 장악한 독자적인 세력으로 신라를 위협했다. 신라조정이 청해진을 완전히 해체한 시기는 문성왕 13년이다 이때 청해진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과거 청해진의 통제를 받았던 군소 해상 세력들은 이때를 계기로 중앙과 교감을 가지며 청해진을 벗어나 지역의 해상세력으로 거듭나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보는 연구가 있다. 공교롭게도 두 개 설화의 무대가 되는 송악 주변의 해상세력이 비로소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 이후다. 고려사에서는 3건을 이름에 써야 삼한을 평정한다는 설화를 보고 이제현이 주석을 달아 3대에 이름이 建 이라는 것은 신라의 관등인 찬에서 나왔다고 고증한 부분이 보인다. 이 역시 이 지역 해상세력과 신라왕실의 협력관계를 가늠하게 하며 모두 왕건 가문의 성장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고려사에는 왕건 가문의 시조인호경의 설화에서 거타지 설화의 제비뽑기와 유사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해질녁 모여 바위구멍에 취숙했다, 호랑이가 있어 입구에서 대후 하니 열명이 서로 이르길 호랑이가 우릴 먹으려 하니 시험 삼아 투관을 잡아 채는 사람이 이를 당하자 하고 모두 던졌다, 호랑이가 호경의 관을 잡아 채니 호경이 나아가 호랑이와 더불어 싸우려고 하니 호랑이는 홀연 봉지 않고 구멍이 무너져 아홉사람이 나오지 못 했다.”혹시 청해진의 압력에 눌려 지내던 군소해상 세력들이 모두 무서워 나서길 꺼렸는데 경인지역의 왕건 가문이 신라와 모종의 협력 관계를 맺어 호랑이 같은 청해진 세력을 제거하고 신라의 관작을 받아 기반을 다졌던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설화는 아닐까? 거타지 설화에서는 해적으로부터 보호할 50명의 궁사 중에 거타지가 제비뽑기로 뽑혔음을 전한다. 거타지 설화의 이러한 첫 부분은 신라 말 성장한 송악지역의 해상세력이 우연히 신라 왕실을 도왔던 사건을 전하는게 아닌가 한다. 송악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자신들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던 이 사건이 양패를 위시한 50여명의 궁수로 표현된게 아닐까? 곡도와 궁사이야기의 역사적 경험이 이렇다면 이어지는 용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4) 삼국유사에 나타난 용의 의미
["나는 서해약(西海若)(서쪽 바다의 신)이오. 중 하나가 해가 뜰 때면 매양 하늘로부터 내려와 타라니의 주문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어 먹고 오직 내 부부와 딸 하나만 남겨 놓았소. 내일 아침에도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했다. 거타가 말하기를
"활 쏘는 것은 나의 장기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했다.[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사라지고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와서 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을 맞히니 중은 바로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서 치사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내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 바라오." 하니, 거타가 말하기를 "따님을 나에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던 바입니다." 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모든 문명은 발생 성장 좌절 해체의 과정을 거친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용은 신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문명의 발생기라고 할 수 있는 혁거세왕이나 탈해 왕 때 나타나는 용과 성장기인 선덕여왕 문무왕의 시대에 나타나는 용의 성격이 다르며 좌절 해체기인 원성왕과 진성여왕 때 나타나는 용의 성격도 확연히 다르다 도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발생기 - 혁거세, 탈해왕 : 왕권의 탄생과 보호에 기여하다. 성장기 - 진흥왕, 선덕여왕 문무왕 신문왕 : 불교로 정신적 통일을 기해 지도자와 일반민중이 일치단결 토록하다. 좌절 해체기 - 효소왕 성덕왕 원성왕 헌강왕 진성여왕] 때문에 거타지 설화에 나타나는 용의 의미는 무기력한 신라가 몰락하고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예고는 상징성을 지닌다 볼 수 있다. 더불어 용은 민중들에게 농업을 관장하는 상징이자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풍요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비를 다스리는 용의 성질은 농경국가에서 곧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삼국시대 이후 국가를 주재하는 힘이자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보면 거타지 설화에 등장하는 용은 신라의 국운 혹은 왕권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해약인 용은 기울어지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을 상징하고 직접적으로 이미 나약하여 삼한을 주재할 수 없는 신라의 왕실을 말한다. 따라서 설화에서 역할은 새로운 제왕의 탄생을 알리는 매개체 역할이다. 거타지 설화가 단순히 지역설화의 차원을 넘어 설화가 제왕의 탄생으로 나아가게 되는 부분이 여기서 부터다. 그리고 그 제왕은 바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창한 왕건을 지칭한다. 신라 말 진성여왕의 즉위와 함께 사실상 신라는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에서는 궁예를 휘하로 둔 양길이 10군을 탈취하였으며 지금의 전주, 익산지역에서는 견훤이 일어나 후백제를 참칭하며 여러 주현들을 각자 장군을 자칭하며 사실상 신라에서 이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의 가문은 송악지역의 호족으로 궁예에게 투항하였으며 이후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개창하여 삼한을 통일하였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용의 구출과 혼인은 바로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설화로 돌아가 거타지가 쏘아 죽이는 중과 여우를 보자 다라니 경을 통해 신라 왕권을 비판하는 은어가 유행했음은 거타지 설화의 초입부에 이미 적고 있다. 왕건이 투항했던 궁예는 과거 “선종”이란 법명을 가졌던 중이었다. 그는 왕조를 개창한 뒤 스스로 불교의 수호자이자 미륵불의 현신임을 자청하며 불교에 심취 했던 군주다. 궁예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가헌강왕의 아들이란 설이 있고 지난번에 분석한 경문왕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어찌하였건 기록에서 궁예는 신라의 버림받은 출생 때문인지 신라를 증오하였다.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설령 귀화라고 해도 모두 죽였으며 그는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반드시 멸망시킨다는 마음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왕과 왕권을 의미하는 용의 자식들을 잡아 먹는 중은 바로 이런 궁예를 지칭한다. 거타지가 중을 활로 쏘아 죽이자 여우가 되었다는 부분을 보자. 궁예대한 설화로 <궁예와 구미호>가 전해진다. 내용은 여우가 왕비를 잡아 먹고 왕비 행세를 하였는데 궁예는 이를 모르고 왕비를 위해 사람들을 죽이며 폭정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구미호라는 것을 알았지만 궁예는 몰랐고, 한 신하가 삼족구를 구하여 구미호를 잡았다. 라는 것으로 가짜 왕비 행세를 하는 여우의 살육과 이를 돕는 궁예의 존재는 거타지 설화에 나타나는 중과 여우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거타지 설화와 유사한 작제건 설화에서도 이런 이야길 전한다 “부처님 모습을 한 늙은 여우가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는데 ...그가 부처님인 줄 알고 활을 쏘지 못하는데 용왕이 의심하지 말고 쏘라고 했다 작제건이 활을 쏘자 과연 늙은 여우가 떨어졌다”궁예는 왕이 된 후 스스로 경전을 쓸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으며 자칭 미륵불의 현신임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잔인한 살육을 일삼았던 궁예의 이야기는 그가 진정한 부처인줄 알았으나 가짜부처였고 사람을 잡아먹는 여우에 불과했다는 상징으로 나타난게 아닌가 한다. 결국 거타지 설화에서 용을 구하고 여우를 잡는다는 스토리는 나약한 용인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그 자손들을 모두 죽이고자 했던 가짜 부처이자 늙은 여우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개창한 왕건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용의 딸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뜻 역시 알 수 있다. 왕건은 그의 딸 2명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내며 신라왕가와 혼인을 맺었고 본인도 신라의 공주를 후비로 맞아 들였다. 때문에 신라왕계와 고려왕계는 혼인으로 결속을 맺었던 관계다. 고려왕실과 신라왕실의 이런 연계는 고려 현종 이후 고려정계에서 신라계가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고려왕조에 친신라적인 기풍을 남겼다. 앞서 장보고가 그의 신분상승을 위해 문성왕과의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음을 기억해 보자. 과거 해상왕 장보고조차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 하였던 신라왕실과의 혼인은 또 다른 해상세력인 왕건 가문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이는 마치 해신의 딸 하백을 맞이한 해모수와 그의 아들 주몽의 이야기처럼 신화적이며 정치적 상징성을 내포한다.
5) 고구려 유민 그리고 거타지.
앞서 분석을 통해 거타지 설화가 이제 단순한 악마 퇴지의 영웅설화가 아니라 새로운 왕의 등장을 알리는 건국설화임을 말했다. 설화에 나타나는 이야기가 건국설화라면 작제건의 이름에서처럼 거타지 설화의 주인공 거타지 역시 왕조의 건국을 상징하는 바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거타지라는 이름도 고려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거타지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미당 서정주는 居陁?의 타가 施의 오기라 보고 정확한 이름이 거시지이며 이는 우리말 거시기의 한자음 표기라 보았다. 이 것 말고도 거타지의 知를 존칭어미로 보고 “거타”는 지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거타지를 합성어로 보아 어미의 知는 벼슬아치의 줄임이며 거타지는 징수의 우두머리라는 견해도 있는데.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의 따라 거타지의 이름이 지역 명칭과 존칭에서 나왔다고 보면 대략 거타지역의 님, 거타의 어르신 정도가 맞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지역 “거타”는 어디인가? 거타는 지금의 거창으로 바로 고구려부흥군의 유민이 세웠던 보덕국이 신문왕 때 봉기하여 신라군을 대파시켰던 지역이다. 고구려 보장왕의 조카로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던 안승은 금마저에 봉해서 보덕국왕에 임명되었다. 신문왕 때 사실상 보덕국 해체의 의도로 그의 족자 대문이 처형되자 고구려 유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신라로 진군하였고 이들은 거창에 이르러 신라군을 대파하여 필십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이후 평정되어 보덕국은 해체되지만 이때의 사건은 고구려유민과 신라인들의 기억에 각인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보덕국이 해체되어 흩어진 이후로도 고구려 유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삼한에 투영시키며 유지한 듯 보인다. 마한에 속한 보덕국이 고구려라는 인식을 그것으로.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이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적는다. “최치원은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는 마한이요 백제는 변한이요 신라는 진한이다”이에 대해서 일찍이 조법종은 그의 연구를 통해 이 구절을 밝히며 고구려 유민이 금마저에 정착한 이후 이 지역을 고구려와 동일하게 인식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기존 삼국에 대한 인식을 신라인이 삼한에 대한 의식으로 대체했음을 고증한바 있다. 즉 고구려 유민들이 삼한에 세운 나라가 곧 고구려라는 의식이 있었으며 통일신라 시대 이러한 삼한 의식은 후삼국이 등장하고 고려 건국해 삼한이 다시 통합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왕건 가문과 연결해 고려사에 기록인 왕건 가문의 시조인 호경이 백두산에서 왔음을 근거로 고구려, 발해의 유민이라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런 이유를 빼더라도 왕건이 건국한 나라는 고려이며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천명해 왔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설화에서 거타지는 바로 이러한 고구려 유민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신라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 사이에서는 과거 고구려왕족 안승이 세운 보덕국과 이들의 마지막 항거 기억은 곧 사라진 그들의 영광을 말하는 것으로. 거타지 설화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논하며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즉 설화에서 이러한 기억을 대변하는 “거타에서 오신 분”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제시한 것이다.
6) 건국설화의 탄생 그리고 고려왕조
거타지 설화는 서해항로를 위시한 해상세력과 이 지역의 민중들이 과거 청해진의 혁파 과정에서 신라조정과 협력관계를 맺고 대당무역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며 기반을 쌓었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신라의 변방 한산주 지역에서 발해의 혼란기 속 고구려 유민들이 유입된 이 지역은 신라의 몰락 과정에서 고구려에 대한 의식적인 동질감을 공유하며 성장했다. 진성여왕의 즉위와 함께 신라는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진성왕 5년 처음 등장한 궁예는 이후 북부지역의 석권하며 고구려를 참칭했고 진성왕 6년에 견훤은 이미 후백제를 참칭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는 쇠락한 용으로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새로운 제왕의 등장은 바로 이 진성여왕의 시기를 설화적 배경으로 삼는다. 왕건은 신라에 대한 증오심으로 신라를 멸족하고자 했던 가짜부처 궁예를 죽였으며 나아가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여 고려왕실과 신라 왕실과 혼인을 맺었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치설화로 탄생한게 아닐까? 물론 설화의 정확한 제작 시기는 추정하기가 어렵다. 직접적으로 서술된 시대는 진성여왕이라 하지만 설화의 내용은 신라 말 100여년 간 기나긴 스펙트럼을 담고 있다. 어찌하였던 설화의 정치적 목적은 왕건의 쿠데타와 신라의 흡수하고 삼한통일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좋은 시점에 민중들에게 유포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후 거타지설화에서 나타난 내용은 이후 고려 의종 때에 이르러 편년통록의 저자 김관의에게 전해졌고 그 시기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 설화의 주인공이 바로 왕건의 가문의 이야기라 적고 있다. 그리고 보다 윤색된 설화를 전승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세계편의 기록을 두고 고려사에는 당시 편찬자가 보기에도 연대적으로 맞지 않아 수많은 주석과 논란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서 김관의의 설화를 근거로 채록한 이야기가 시기상 불일치를 보이는 것은 이 설화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는 특정 시대의 특정 사건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설화는 경인지역의 호족이 성장하여 고구려 유민들의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삼한을 통일하게 되는 과정 100년의 역사 전체를 담고 있다. 지역이 번영하는 계기가 된 신라왕실과 협력, 고구려 부흥군의 영광이 깃든 거타의 인물이란 설정, 이 지역출신의 호족이 궁예를 죽이고 신라왕실과 혼인하여 삼한을 통일한 사건 등이 그것으로 이러한 상징들은 지식인 계층에 의해 중국과의 접촉으로 알게 된 이야기를 뼈대로 삼아 보타 상징성 깊고 세련된 정치 설화로 탄생했다. 바로 고려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당시 민중들이 감성적으로 이해하도록 유포된 설화가 거타지 설화다. 거타지 설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고구려 유민이 가짜 부처를 죽이고 삼한의 왕통을 이어받는다. 설화는 고려 왕조의 정당성과 신성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오래 전 학창 시절 한국문학 수업 레포트로 제출한 글입니다.
밑에 삼국유사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나서
또 파일 창고를 보니 이 글이 남아 있길래 ㅎㅎ
그중 일부분 설화분석 파트만 올려 봅니다
수업 주제가 한국문학인데 역사 분석에만 매진하는 바람에
점수도 못 받고 되려 깍였던 비운의 글이죠
(하라는 문학분석 안하고 왠 역사 분석이냐 이거죠 ㅋ)
당시 어찌보면 당연한 요구로 수업이 종료한 후
본문의 거타지 신화가 바로 고려건국 신화의 원형이라는 제 주장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이메일로 구했지만
정작 요구한 학문적 의견에 대한 답변은 없이 기계적으로 점수만 한단계 올리는 조치만
하시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또 안타까웠던 글이기도 합니다.
(한국 대학수업이 순수학문에서 멀어지는 것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닌듯 합니다.)
물론 본문의 내용은 정설도 아니며
개인의 상상력이 투영된 다소 허무맹랑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삼국유사의 거타지 설화가 바로 고려건국 신화라는!!
제 주장이 먹힐 날이 올거라는 믿음으로
뭍혀있던 묵은 글을 한번 올려봅니다
그냥 세상에는 이런 상상력도 있구나 여기며
가볍게 읽어주셨음 하는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