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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를 지내셧던 분들
게시물ID : history_70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암행어사.진
추천 : 5
조회수 : 11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01 21:24:58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였던 퇴계 이황도 암행어사.
이황은 34세 때 대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특히 40대 초반에는 암행어사로 임명되어서 충청도에 파견.
충청도를 돌면서 탐관오리의 횡포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해주었다.

이황은 평생 청렴결백하기로 유명. 베옷에 칡으로 엮은 신을 신고 다녔고, 높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집에 재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만큼 검소한 청백리. 50세 이후에는 고향에 내려가 서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가르쳤고, 성리학을 연구하고 책을 쓰는데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을 세운 이황의 학문은 세계적으로도 유명.



암행어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박문수.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문수는 33세에 문과에 급제. 하지만 이듬해 당파싸움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1727년 영조가 당파싸움을 해결하면서 박문수를 영남지방의 암행어사로 임명.
1730년에는 충청도의 암행어사가 되어서 굶주리는 백성을 구하는데 힘을 썼다. 1741년에는 진휼사(흉년에 백성을 돕기 위해 파견되던 관리)로 함경도에 파견돼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굶주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애씀.
이렇게 박문수는 여러 차례 암행어사를 지냈고 매번 지혜롭게 임무를 수행해서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박문수에 관한 설화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목민심서>를 지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도 암행어사였다.
정약용은 1789년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여러 관직을 거치는 내내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행복을 위하는 일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도르래를 이용해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거중기 알죠? 또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제도는 고쳐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33살이던 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됐다. 또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농민을 위한 정치, 경제 개혁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올바른 도리를 적어놓은 <목민심서>, 농민을 위한 제도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가 그 대표적인 책이다. 

 

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는 세 살 때 붓을 잡고 글씨 쓰는 흉내를 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문신이자 실학자였고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는 서화가였다. 김정희는 당시 유명한 실학자였던 박제가의 제자. 24세 때는 중국 연경에 가서 중국 최고의 학자였던 옹방강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김정희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글씨체 ‘추사체’를 만들었다.
김정희는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과도한 세금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 잡아서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말년에는 당파싸움에 휘말려서 12년 동안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분들이 모두 암행어사를 지내셨다는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역사 공부를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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