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삼한설은 오랜기간 내려왔지만 그 부정확함으로 지금뿐만 아니라 오랜기간 비판을 받았던 내용입니다.
일찍이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최치원의 고대사 서술이 부정확함을 지적한바 있고 조선 초기에 이르러 권근이 최치원의 삼한설을 부정했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면 한백겸의 삼한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지금에 통설에 가까운 삼한설을 주장함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 최치원의 삼국 삼한설은 부정확한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 이해되며 전면 부정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신라의 최치원이 삼국 삼한설을 주장했는지가 의문인데요
이에 대한 사료의 부족으로 추론만 가능하지만 대체로 2가지 이유를 상정합니다
일단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한일통의 성격이 컸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의 판도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으로 신라의 대상이 아닌게 됨에 따라
신라의 무열왕계의 업적은 삼국통일이 아닌 진한에서 비롯하여 삼한을 통일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을 가능성이 크죠
신라 중대 무열왕계의 통치를 거치며 삼한통일에 대한 의미 부여가 상당히 진행되었을 것이고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는 경향도 이 시기에 나타났을리아 봅니다.
최치원의 삼한설의 쟁점은 주로 마한에 대한 논란입니다. 마한이 백제에 병탄되었음을 인지하는 상황에서
당시 이런 마한을 백제가 아닌 고구려라 정의하게 된 이유에 대한 고증인데요
사서에는 단순하게 고구려에 마읍산이 있고 백제에 변산이 있다는 식으로 간결히 논중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이런게 아닌가 합니다.
1. 마한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의 찬탈로 남하하여 정착한 땅임을 들어
마한 = 고조선으로 판단하고 고조선의 원래 주요거점인 평양-낙랑군을 고구려가 병탄함에 따라
고조선 = 마한 => 이를 이어받은 고구려라는 식으로 마한 = 고구려 관념이 형성된게 아닌가라는 점이며
이는 삼국유사의 일연이 고조선과 삼국 삼한 신라 고려를 연결하는 계승적인 관점에서
고조선은 마한이 되었고 마한은 고구려가 되었으며 삼한을 통일한 신라가 이를 어어받아 고려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서술한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2. 마한의 거점인 금마저에 고구려의 후예인 안승이 왕으로 봉해진 사건을 통해 당대 신라인들이
마한 = 고구려 인식을 형성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준왕이 자리잡아 마한땅을 통치한 중심지역이 금마저이고 이는 신라가 통일전쟁을 수행하며
유민으로 받아들이 고구려왕족과 유민들이 이후 정착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중대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과 신라의 억제정책으로 금마저의 고구려봉지가 회수되었지만
고구려의 멸망이후 남하한 신라에 거주한 고구려계 유민들의 중요생활지역이었고
또 그 지역이 과거 준왕이 정착한 마한의 거점이라는 점을 들어
고구려 = 마한설이 탄생했다는 것이죠.
신라가 고구려 백제 삼국간의 투쟁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통일 국가로 자리잡으며
신라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삼한통일이라는 업적을 관념하며 삼국과 삼한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신라 중대에 형성이 되었고 이를 합리적으로 논증하기 위해 고구려 = 마한설을 통해
신라가 비록 정식으로 합병한 바는 아닌 고구려이지만 삼한통일을 통해 고구려도 신라가
흡수 계승하였다는 당대의 관념을 표현한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최치원의 삼한설이 처음 등장하는 상태사시중장은 신라인으로 중국의 제왕에게(이극용으로 보죠)
표문을 올리며 신라인이 지향하는 바를 표현한 정치적인 수사에서 나온 삼한설입니다.
대외적으로 신라의 삼한일통 관념을 과장하여 표현한 한 방식이 아니었는가 싶네요
물론 이는 정치적 이념일 뿐 사실과 부합하는 내용이 아니기에 이후 사서편찬자들로 부터
부정확한 서술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고 조선 중기 이후 완전히 부정되며
지금의 삼한설이 정설로 자리잡았습니다.
마한 = 고구려 설이 핵심이지만
위에 언급한 2가지설로 보통 설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대사 사료의 부정확한으로 추론에 불과하고 상상력으로 이해되는 범위에서
설명하면 이런게 아닐까? 라는 것이지 역시 정확한 분석은 아닌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안승의 금마저 정착과 마한=고구려설이 탄생했다는 주장을 믿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