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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안중근, 제국주의를 쏘다 (예고)
게시물ID : sisa_4732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ookhyunii
추천 : 2
조회수 : 766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2/27 13:33:15
 
 
 
안중근, 제국주의를 쏘다
12월 28일 (토) 밤 9시 40분 KBS1TV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하얼빈역.
세 발의 총탄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리고 권총을 든 젊은 조선인, 안중근의사가 외쳤다.
코레아 우라! (대한 만세)

■ 대한국인 안중근, 이토히로부미를 쏘다
하얼빈 역을 가득 메운 러시아 군악대와 환영인파 사이로 왜소한 일본 노인이 기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울린 여섯 발의 총성.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한 청년이 붙잡혔다. 서른 한 살의 조선 청년 안중근의사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그 날,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대한독립의 꿈을 꾸다
대대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집안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 그는 어려서부터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가 선택한 민족중흥의 방식은 총이 아닌 교육이었다. 교육으로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안중근 의사. 하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 그는 결국 무력투쟁을 결심한다. 열한명의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대한 독립! 대한독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나온 그의 여정을 살펴본다!
 
 
■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하다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헌병대에 건네준 총에는 한 발의 총알이 남아있었다. 충분히 달아날 수 있었던 상황, 그는 왜 어떠한 저항도 없이 당당하게 붙잡혔을까? 안중근 의사의 선택은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닌, 붙잡혀 조선의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하얼빈이 아닌 일본관할이던 뤼순으로 호송돼 받은 재판에서도, 일본의 노림수대로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되는 그 순간까지도 당당하게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외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되짚어본다.
 
 
■ 대한 독립의 영웅으로 남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지닌 한국인을 체포했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진마저도 일제에는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눈감는 순간까지 듣지 못한 독립의 소식,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유해, 절반도 쓰지 못한 <동양평화론>까지...그가 염원했던 것은 지금도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우리에게 ‘영웅’이 되었다.
명사수이자 교육자였고, 의병장이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12월 28 밤 9시 40분, KBS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안중근이 그렇게도 지켜내고자 했고, 마침내 우리가 지켜가야 할 이 땅에서 1909년 10월 26일 그 의거의 의미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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