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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드립]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가 말이죠, 사실은...
게시물ID : history_132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리비
추천 : 16
조회수 : 5457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3/12/25 22:17:51
제가 가장 흥미를 갖고 있는 역사는 1789년 프랑스 혁명입니다. 사건의 흐름이 엄청 빠른 데다 전례 없는 사태들이 빵빵 터지는 게 엄청 역동적이거든요! 참여한 세력도 자유주의적 귀족, 부르주아, 상퀼로트, 농민 등 다양하고 그 안에서도 서로 갈리고, 그러다 보니 굉장히 다양한 요구와 행동들이 얽혀서 겁나 복잡해요! 그러면서 근대의 모든 명암들이 응축되어 있고 폭발적으로 터져나와 근대를 통째로 만들어냈고, 지금의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죠.
중국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혁명의 파급효과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것을 답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라고 했다죠. 사실 68혁명 이야기하는 걸로 착각했다는 소리도 있지만요 ㅋㅋ 지금도 가만히 있는 한 무리의 역사학자나 역덕후들에게 "프랑스 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면 곧 자기들끼리 씬나게 싸우는 광경을 보게 될 겁니다 ㅋㅋㅋ 사실 무엇을 던져도 싸우지만 프랑스 혁명이 제일 심한 축에 들걸요?
 
싸움 남.jpg
레알 ㅇㅇ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들로 초기에 제일 거물이었던 미라보, 푀양파의 라파예트, 바이이, 라메트, 뒤포르, 바르나브, 지롱드파의 브리소, 롤랑 부부, 페티옹, 뷔조, 베르니오, 이스나르, 자코뱅파(산악파)의 에베르, 비요바렌, 콜로 데르부아, 바레르, 탈리앙, 프레롱, 바라스, 푸셰 등등 각종 인사들이 있지만...
역시 제일 유명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독특한 기간인 자코뱅 집권기=공포정치 기를 이끈 자코뱅파(산악파)의 세 거두,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죠.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jpg
왼쪽부터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마라(Jean-Paul Marat)입니다. 화가 Alfred Loudet가 1882년에 그린 그림이래요. (출처 : 프랑스어 위키피디아 로베스피에르 항목) 마라가 좀 뿜기네요 ㅋㅋ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은 로베스피에르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여타 시민혁명과 구분되는 가장 독특한 부분을 가장 중심적으로 이끈 사람이거든요. 공포정치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가장 중심이었고, 그 전부터 자코뱅파의 집권을 가능케 한 '민중적 경향'을 앞장서서 고무했죠. 그 과정에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가 공포정치의 대량 처형을 주도하게 되는 등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었고(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예전에 제가 이 역게에 쓴 글을 참고하셔도...ㅎㅎ), 그런 양면성(내지는 다면성) 때문에 선악 판단을 쉽게 내리기 힘들어 논쟁을 잔뜩 불러오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그에게 얽힌 프랑스 혁명의 독특성을 주로 공부해 왔는데요...
...공부하다가 딴 길로 안 새면 이상하잖습니까! 하하하하...
인물사도 역사 공부의 유의미한 부분이지만...어쩌다 보니까 로베스피에르의 성격, 외모, 과거사 같은 개인적이고 역사랑은 별 관련 없는 부분을 조사하고 있더군요 ㅋㅋㅋㅋ
 
산악파 세 거두라곤 하지만 마라는 공포정치 본격 시작인 1793년 9월 5일이 오기 전, 93년 7월 13일에 지롱드파를 추종하던 젊은 시골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해서 존재감이 둘보다 조금 더 떨어지죠 ㅋㅋㅋ 당통은 그 전까지 로베스피에르와 정치적으로 함께 행동했고 자코뱅파의 부상을 함께 이끌었고 개인적으로도 친했지만, 마지막에는 공포정치에 반대하며 격렬히 대립했습니다.
게다가 둘이 성격도 외모도 판이해서 짝지어 대립시키기 좋죠.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로 어그로를 많이 끌다보니, 통속적으로 당통은 키 크고, 건장하고, 목소리 우렁차고, 호탕하고, 외향적이고, 여자 잘 사귀는 등의 남성적 이미지가 씌워져서 찬양받는데, 로베스피에르는 키 작고, 마르고, 목소리 가늘고, 소심·섬세하고, 내성적이고, 여자 못 사귀는 등의 좀 여성적인 이미지가 씌워져서 희화화되곤 합니다. 사실 다 맞는 특징이긴 한데, 그것 때문에 찬양하고 희화화하는 통속적 이미지를 보면 페미니즘 지지자로서 기분이 좀 그래요... 로베스피에르가 딱히 페미니스트 같은 건 아니었지만요.(당대 평균에 비해선 조금 나은 것도 같지만, 자코뱅 집권기에 여성차별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아오, 얘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애매하네!)
 
서론이 겁나 길었는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요...
휴...
아직 정황 증거들만 있고 결정적인 입증은 못했는데...
이걸 입증해낸다면 프랑스 혁명사계는 물론이고 전체 역사학계에 거대한 센세이션을 몰고 올 텐데...
휴, 타이핑하기도 떨리네요.
뭐냐면요...
로베스피에르가 말이죠!
사실은!
 
 
 
진짜 여자였다는 겁니다!!
 
......
...에헤이~ 그런 표정 짓지 마시구요~♡
잠깐만 보세요. 오래 안 걸려요! 하하하...
프랑스 혁명이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음모였다는 얘기보다는 설득력 있을 걸요?
(잠깐 진지 : 프랑스 혁명이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라는 말 - 이 음모론은 일반 민중이 주체적으로 세상의 전면에 나설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민중을 경멸하는 시각을 전제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는 음모론입니다 - 을 믿지 않듯이, 이 얘기도 절대로 제가 믿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믿으면 우스꽝스러운 음모론자일 뿐이죠. 그래서 개드립이라고 제목에 써놓은 겁니다. 오늘의'유머'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말도 개그 삼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절대로!! 믿으면서 보시지 마시고, 제가 이걸 믿는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이런 왜곡을 할 수도 있다니! ㅋㅋㅋㅋ' 하면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자 드립으로 연결시켰지만 사실적 정보들은 당대인들이 증언한 사실입니다 ㅋ) 
 
위에서 키 작고, 마르고, 목소리 가늘고, 소심·섬세하고, 내성적이고, 여자 못 사귀는 등의 특징이 있다고 썼잖아요.
키가 5피트 3인치, 즉 160cm밖에 안 되었대요. 지금 한국 여성 평균 키잖아요! 사실 당시 프랑스 성인 남성 평균이 164cm였지만. 마라는 1인치 더 작았지만. 게다가 엄청 말랐고요. 위의 당통, 마라와 함께 그려진 그림에서도 그렇고, 모든 그림에서 그래요. 완력도 참 약했어요. 피부도 초록색 핏줄이 비칠 정도로 -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ël) 왈 - 창백했다고 하는데, 남자가 그 정도로 하얀 경우가 잘 없잖아요?
 
새되고 거친 목소리(shrill, rough voice -링크)라고도 하고, 곱고 동정적인 목소리(his singularly sweet and sympathetic voice -링크)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톤이 높고 가는 목소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멀리 잘 들리지가 않았고, 다른 의원들이 항의하는 소리를 치면 바로 묻혀서 입 다물어야 했다네요. 혁명 초기 듣보잡 극좌파였을 때 자주 그랬고, 테르미도르 반동 때도...
사실 그런 목소리도 여자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아서 그나마 그 정도로 만든 겁니다! 입가에 자주 경련이 일고 몸이 뻣뻣했다는데, 사람들은 그게 무슨 병 때문일지 추측하지만 사실 그냥 목소리를 억지로 낮게 깔아서 오래 연설하다 보니까 목도 아프고 입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그런 겁니다!!
애인이 있었다는 소문이나 약혼했다는 소문도 있긴 한데요, ㅅ...성행위를 한 적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당통이 "걔는 섹X도 못함"이라고 하기도 했어요. 목 자를 만했네. 사실 그것도 그런 사연이...
 
또 상당히 소심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대요. 사교성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가깝게 사귀는 일은 잘 없었던 거죠. <마라의 죽음>(욕조 속에서 머릿수건 쓴 마라가 평화롭게 죽어 있는 그림 -링크),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나폴레옹이 탄 백마가 앞발 들고 있는 그림 -링크) 등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로베스피에르와 친구였고, 프랑스 혁명 중에 <마라의 죽음>을 비롯한 혁명을 홍보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프랑스 미술계에서 거의 독재자로 군림해서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때문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당한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 27일) 며칠 후에 재판을 받았는데,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사람을 접근 못하게 해서 난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음. 나만 걔한테 속은 게 아니잖음." 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선을 긋고 자신은 시키는 대로 그림만 그렸다며 자신을 변호했죠. 살고 봐야지.
(이걸 적으려고 했는데 빼먹었네요. 베스트게시판에 간 건 수정 불가인데 ㅜㅜ) 이 시대에는 남자끼리 '우정의 입맞춤'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어요. 1792년에 라무레트 의원이 다른 의원들에게 모든 문제의 원인이 분파주의라고 하자, 그렇게나 격렬하게 정치적 싸움을 벌였던 모든 의원들이 형제애(fraternité)의 물결 속에 모든 분열을 잊은 듯 감격해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었죠. 물론 그런 보람도 없이 정파싸움은 계속되고 프랑스 혁명은 실패합니다....(이 라무레트의 입맞춤은 <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산책> 37쪽에 나와요.) 아무튼 이렇게 남자끼리의 스킨쉽이 자연스러웠던 시대에, 로베스피에르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너무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한테 손도 못 대게 했다는 거죠. 그것도 사실은....
 
로베스피에르는 옷을 깔끔하고 멋있게 입었죠. 목깃을 높이 올리고 목에 크라바트(넥타이처럼 매는 남성용 스카프)도 높이 꽁꽁 감았어요. 그게 사실은 목에 목울대(일명 '아담의 사과')가 튀어나오지 않은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상퀼로트*의 기수를 자처하면서 절대 상퀼로트 복장은 하지 않고 항상 단정한 허리 길이 코트에 퀼로트 차림이었는데, 그것도 상퀼로트 복장을 입으면 우아한 크라바트를 매는 게 이상하니까... 항상 깔끔하게 면도를 했다는데, 인간적으로 한번씩 늦잠을 잔다든가 해서 하루쯤 면도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항상 깔끔했다는 건 사실 수염이 아예 안 났다는 것...
 
* 상퀼로트(Sans-culotte) : 귀족이 입는 우아한 반바지인 퀼로트를 입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 주로 수공업자, 장인, 소상인, 근로자 등 도시 하층민들. 소규모 공방을 소유한 중산층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그런 공방에서 하루하루 노동해서 먹고 사는 빈곤층까지, 현대에 생각하는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보다 넓은 개념이었다. 이들이 무장 투쟁을 벌이며 혁명 정부를 압박하고 이들과 결속한 혁명가 세력인 자코뱅파가 점차 주도권을 잡게 되며 프랑스 대혁명이 과격화, 급진화되었다.
 
정치 경력이 31살부터 36살까지인데요, 아무리 스트레스 만땅 받을 상황이라지만 심히 자주 아프거든요. 그것도 사실은 상당수가 생리통...!
꽃을 좋아했고 꽃을 들고 다니거나 단추 구멍에 꽂고 다니곤 했다는데, 그건 사실 미처 숨기지 못한 소녀 감성이 나왔......
 
자코뱅 혁명정부의 2인자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은,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단두대에 갈 때 겨우 26살이었던 젊은 청년 생쥐스트(Louis Antoine Léon de Saint-Just)였습니다.
생쥐스트_귀.jpg
보다시피 잘생겼죠. 아무리 적이라도 그건 부정 못했습니다 ㅋ 당대에도 후대에도 잘생긴 혁명가로 유명하죠. 별명이 '혁명의 대천사', '죽음의 대천사', '단두대의 대천사' 등이에요.
저렇게 젊고 잘생기고 권력도 짱짱했는데, 1789년에는 <바티칸의 오르간(Organt au Vatican)>이라는 세태 풍자와 섹드립을 섞은 서사시를 써서(안 팔렸지만 ㅋ) 성의 해방을 주장했는데, 1792년 25살이 채 못 된 나이에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당시 프랑스 국회) 의원이 되고 로베스피에르의 심복 내지는 정신적 제자가 된 뒤로는 금욕적으로 살다 독신으로 죽었거든요. 사실 연애를 했거나 썸을 탔다는 소문도 있지만. 대신에 정치에만 몰두했고, 로베스피에르를 끝까지 엄청 따르고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양키 역덕들이 호모 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사실은......
 
여동생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Marie Marguerite Charlotte de Robespierre)의 회고록도 그렇고 모든 기록들에서 그런 얘기가 전혀 전혀 없는데 어찌된 일이냐고요?
로베스피에르의 어머니가 철저하게 모두를 속인 겁니다! 맏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태어난 날이 1758년 5월 6일인데, 로베스피에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 날이 1758년 1월 2일이거든요. 로베스피에르는 속도위반 혼외임신된 거죠. 그래서 그 동네에서 상당한 스캔들거리였고, 아버지 쪽 가족들은 결혼식에 참석도 안 했다고 합니다. 시댁으로부터 안 그래도 눈총받고 있는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도 풀릴까 말까 한 판에 속도위반 한 자식이 딸인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산파와 짜고 해서는 안 될 선택을...아들이라고 주변에 거짓말 하고 철저히 아들로 키운 겁니다!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는 아들로 키우면 시댁으로부터 인정받을 거라 생각한 거죠! 막시밀리앙은 일류 콜레주(구체제의 중등학교)인 루이르그랑(Louis-le-Grand)에 들어가 최고 수준의 장학금을 받았고 변호사로도 잘 나갔으니 성공한 것도 같지만....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여동생 앙리에트는 1780년에 죽었고 남동생 오귀스탱은 정치하다가 형이랑 같이 처형됨) 샤를로트는 로베스피에르라는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써야 했죠. ㅉㅉ 샤를로트는 무슨 죄...
 
로베스피에르의 어머니는 로베스피에르가 6살일 때 다섯째 아이를 사산하고 죽었습니다. 그 후 로베스피에르의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식에도 참석 않고 방황을 하더니 2년 후부터 가출을 반복하다 이내 행방이 묘연해졌죠. 어머니를 잃은 네 아이에게 빚과 가난과 뒷소문만 남기고 그렇게 사라져 버렸고(20세기 들어서야 1777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죠), 로베스피에르는 장학금을 받아 겨우 학업을 마쳤고, 헤진 옷과 구두 차림인 게 자주 목격되었고, 자신이 장학금을 받게 해준 아라스의 주교가 파리에 왔을 때 입고 나갈 옷이 없어서 못 만난, 가난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나요? 사실은 아내가 그렇게 모두를 속였다는 걸 알고 너무나 충격받은 나머지.....
 
로베스피에르 본인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다면 여자가 정치를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에(프랑스 혁명 때 롤랑 부인처럼 살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고, 1789년 10월 5-6일 베르사유 습격처럼 여성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정치클럽을 결성하기도 했지만, 반감도 컸죠)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로 출마하기까지 했을까 싶네요... 알았다면 극좌파의 지도자가 되어서 물러날 수 없게 되었을 때일 듯요. 죽을 때까지 몰랐을지도.... 상당히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는데, 사실 들킬까봐 신경쓰였기 때문이거나, 또는 자기도 모른 여성으로서의 불편함 - 가슴을 싸매야 하는 불편함이라든가 여자들이랑 잘 어울리긴 하는데 사실은 다 친구 감정이라 결혼까지 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내가 고자인가 하는 고민이 생기고 등등 - 때문이거나... 
 
* 삼부회(États généraux) : 프랑스 세 신분(제1신분 가톨릭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의 대표자가 모여 중요 의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으로서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다. 국가 재정이 파산 상태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면세 특권을 누리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는 이러한 과세안에 반발하였고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삼부회는 봉건적 특권의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는 제3신분과 귀족, 성직자의 대립에 의해 붕괴되었고, 이로부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1830년 7월 혁명 후에 로베스피에르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무덤에 가서 유골을 찾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파도 없었대요. 그것도 사실은 여자 하나한테 온 프랑스가 떨었다고 하면 쪽팔리니까, 처형 후에 다른 데에 시체를 버렸든 태워서 없앴든 흔적을 완전히 없애 그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한 겁니다!
 
 
 
 
 
아, 잠깐만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상퀼로트 흉상-자름.jpg
이미지 출처
 
우와! 우리 집에 상퀼로트 투사가 찾아왔어요! 역시 듣던 대로 카리스마 쩌시네요! 삼색 휘장에다, 빨간 프리기아 모자(Bonnet phrygien) 하며... 하앍~
따라오라고요? 어디로 가요?
꺄아앙 갈게요! 그렇게 거칠게 잡아당기지 마세...
 
 
 
단두대.gif
 
 
 
 
 
P.S. 다들 오늘이 며칠인지 아세요?
오늘은 바로...
 
혁명력 222년 니보즈(Nivôse, 눈雪의 달) 5일(décade 1, quintidi), 날짜마다 붙인 이름으로는 Chien(개)이죠! 날짜 변환기
네? 2013년 12월 25일? 지금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 체제)의 당당한 제1신분이었던 가톨릭의 낡은 달력인 그레고리력 따위를 쓰는 겁니까?! 뭐라고요? 크리스마스? 제1신분으로 십일조 따위를 뜯으며 민중을 착취했던 가톨릭의 명절을 기념한다니! 이렇게 '반혁명 분자'들이 넘쳐난다니 통탄할 노릇이군요! ㅜㅜ
 
프랑스 혁명력은 자코뱅 정권이 있던 1793년 11월 24일부터 공식 사용돼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있던 1806년 1월 1일에 폐지되었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18일 동안 사용되기도 했죠.
프랑스 공화국이 성립한 1792년 9월 22일을 첫날로 삼은 이 새로운 달력은, 프랑스 혁명을 낳은 합리주의 정신을 담은 것이었죠.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지는...) 과거의 유산을 청산하고 이성이 지배하는 새 시대를 연다는 것을 보여주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독재자의 이름을 따기도 했던 각 달의 이름을 계절의 특징에 따라 지었죠.
솔직히 이번 달이 30일까지인지 31일까지인지 헷갈릴 때 많잖아요~ 프랑스 혁명력은 모든 달 수를 30일로 통일시키고(예아, 평등!) 남는 5~6일은 달에 들어가지 않는 축제일로 삼았어요. 그리고 1주가 원래 7일인데 10일로 바꾸고 décade라고 불렀죠. 이런 걸로 계산의 편의를 도모한 겁니다. 하루를 10시간, 1시간을 100분, 1분을 100초로 하는 시간 개혁에 착수하기도 했는데 그건 결국 못했죠. 프랑스 혁명이 도입한 이런 십진법은 '미터법'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세계 표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력에는 가톨릭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없어요! 예이!!
일요일도 없지만, 10, 20, 30일에는 아주 쉬고 5, 15, 25일에는 반 쉬었으니 일요일 휴일 제도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어요! 앞서 말한 달에 안 들어가는 축제일도 있었고요. 사실 그 전에도 토요일은 오전 근무만 하는 곳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바뀐 달력 체계에 혼란스러워 했고, 외국과의 교류에도 지장을 초래했고, 가톨릭 교회의 어그로도 끌었고, 후에 역사학자들이 혁명 중 사건의 정확한 날짜를 헷갈려 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따위를 기념하면 반혁명 분자입니다!!
특히 솔로레타리아트를 억압하는 커플주아지 타도! 만국의 솔로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프랑스 혁명이 끝난 1799년에서 49년이 더 흘러서 나왔지만)
아, 네, 로베스피에르는 종교의 자유나 방데 같은 지방 반혁명 봉기 위험을 이유로 에베르(Jacques René Hébert)파의 비기독교화 운동에 반대하며 '예배의 자유'를 입법화했죠. 소심한 부르주아 권력자 같으니, 과거를 청산할 거면 화끈하게 쓸어내야지! 에베르 만세!!
로베스피에르파는 당통 같은 관용파 말고 에베르 같은 과격파들과도 날을 세웠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결국 두 파 다 숙청했죠.
그래도 전 두렵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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