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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짧은 단상
게시물ID : phil_78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emnTruth
추천 : 1
조회수 : 937회
댓글수 : 55개
등록시간 : 2013/12/25 14:41:47

언어 자체는 선험적일 수 없다. 

언어는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애초에 의미수용가능성이 선험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보디랭귀지를 통해서 하나의 단어를 습득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그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습득한 것인가?   만약 인간에게 언어성-언어성은 의미의 전달과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이 선험적으로 없다면 애초에 단어의 의미를 가르치기 전에 의미의 수용법을 먼저 주입시켜주어야만 할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순이다. 아이에게 애초에 의미의 수용가능성이 있어야만 그것이 주입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란 무엇이다" 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이것 자체가 이미 의미수용성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즉 보디랭귀지로 보디랭귀지가 무엇인지 가르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순환논리적일 것이다. 

 

 

모든 경험은 선험적이고 선술어적이다. 

인간은 선험적인 의미수용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술어화되지 않은 상태의 의미를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지추론능력만 발달되면 언어자체에 대한 가르침이 없이 누구나 이미 언어를 사용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내가 분석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처음에 유아가 어머니에게 말을 배운다. 어머니가 '사과' 라고 불리는 한 사물을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과"라고 말을 하고, 아이는 마음깊은 곳에서 어머니가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인지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내는 소리가 바로 그 대상에 연결됨을 인지한다. 

 

여기서 이 연결, 소리와 대상이 연결되어 있는 그 고리는 바로 "개념"이라고 말 할만한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눈길과 소리에서 개념을 읽어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을 이해하는 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애초에 기표와 기의의 연결은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결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고로 이것 자체를 눈에보이는 것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인간이 경험을 선험적인 것을 가지고 선술어적인 세계 내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전달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전달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랑"이라 할 만하다.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신뢰할 수 있고, 그러므로 어머니가 바라보는 눈길과 그 말 안에서 거짓이 없음을 인지하기 때문에 그 안에 오롯이 담겨진 개념을 습득할 수 있다.   즉 사랑을 통해서 아이는 유아론적 세계를 탈피하며 외부의 의미들을 인식해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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