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하십니까?’ 현상, 배신감을 느끼며 반성하는 2013년의 젊음들
2013년이 마무리되어 간다. 2013년 한국은 ‘무역액 1조 달러 달성, 사상최대 흑자, 최대 수출액’을 이루면서 무역트리플크라운을 이뤘다. 다양한 국가와의 경제협상이 타결되면서, 경기회복의 기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빌딩이 높아질수록 그림자도 길어진다. 화려한 수치 뒤에는 ‘갑을논란’, ‘국정원 댓글 사건’ 등이 있었고, 여전히 체감경기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밀양 송전탑 근처 주민은 제초제를 마셨고, 삼성 노동자는 낡은 차에 번개탄을 피웠다. 밝음과 어둠이 미묘하게 뒤섞인 2013년의 끝자락에 짧은 대자보가 한 대학교에 걸렸다.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2013년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확히 2013년을 살아가는 청년들을 덮고 있는 그림자이다. 대자보에는 사춘기 때 IMF를 경험하고, 패자부활전이 없는 입시전쟁을 치르고, 스펙을 쫓아 어학연수와 토익공부를 하고, 폭력적인 경쟁률의 취업전선에 내몰린 한 청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청년들을 공감시켰고, 수많은 학교에서 릴레이 대자보가 걸렸다. 물론 대자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논리적 비약이 있고, 감정이 뒤섞인 선동 글이라는 것이다. 실제도 대자보에서는 ‘직위해제’와 ‘해고’를 엄격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찬반논리가 있는 쟁점에 대해 한쪽 입장만을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논리적이 않다고,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쳤다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은 ‘자유주의의 당위성’을 밝히는 논리와 이성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지극히 감정적인 구호가 자유주의의 시작점이었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도 이러한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자보가 가진 논리적 모순이 아닌, ‘대자보 릴레이’가 일어나게 된 본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안녕들하십니까?’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그림자가 무엇인지를 짚어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안녕들하십니까?’ 현상을 관통하는 지점에는 ‘배신감’이 존재한다. 배신감의 대상이 사회일 수도 있고, 기성세대일 수도 있고, 스스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배신감이 이 시대 청년 전반에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자보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 내도록 허락 받지 못했고,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었다. IMF 시절 가정의 몰락, 입시전쟁, 스펙전쟁 속에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침묵하도록 강요받았고,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도록 살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 앞에 놓은 것은 88만원의 불안전한 삶과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전쟁이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청년들 스스로에 대한 ‘반성’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사회이든지 청년은 그 시대의 활력을 담당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것도 그 당시의 대학생들이었고, 경제 분야의 혁신 또한 많은 젊은 CEO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청년들은 어떠한가? 이유가 어떠하든,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주변에 침묵하지 않았나? 배제의 공포 속에서 떨기만 하지 않았나? 자기 개발서로 위안 받고, 인터넷으로 불평만 늘어놓지 않았나? ‘안녕들하십니까?’ 현상은 이러한 반성 속에서 이제 서로에게, 직접 광장에 나와서, ‘안녕’을 물어보자고 제안한다. 그 내용이 어떠하든, 그 방식이 어떠하든 그저 서로에게 무관심하며 앞만 보고 달리는 지금보다는 희망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안녕들하십니까?’ 현상은 우리에게 ‘청년들의 삶과 안녕’에 대해 고민케 한다. 그리고 이 고민은 대자보 릴레이에서 보듯이, 이미 시급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이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을뿐더러, 단편적인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했던 것처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식의 접근법은 오히려 문제를 부추길 뿐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러하다.’, ‘직장을 찾는데 눈을 낮춰보는 것이 어때?’ 식의 대처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청년들 스스로는 ‘안녕들하십니까?’ 현상에 담긴 문제의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 한 철 지나면 버려지는 유행가처럼 ‘안녕’을 소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