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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미지와의 조우 - 쥐베르의 조선 원정기
게시물ID : history_70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gsik
추천 : 12
조회수 : 111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2/28 00:06:38

"(미사여구는 무시하고) 필자는 오늘날에 흔치 않은 귀한 행운을 누려 이제껏 그 누구도 탐사한 적이 없는 조선의 해안으로 들어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그 때의 원정기간 동안 내가 보고 체험한 바를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1866년,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 앙리 쥐베르는 소중한 기회를 잡습니다. 조선으로 가게 된 것이죠. 여기서 그는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그걸 기록으로 남깁니다. 당시 프랑스의 잡지 '르 투르뒤몽드(Le Tour du Monde)'에 이게 실렸죠. 세계일주라는 뜻으로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소개하는 잡지였습니다. 

단지 자기가 본 것만 다룬 게 아니라 조선의 역사, 지리 등도 나름 공부했고, 지금 봐도 그럴듯한 평가가 보입니다. 뭔가 정곡을 찌르는 부분도 있구요.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 살거나 한 것도 아니고 잠깐 보고 나온 사람의 한계가 있죠. 서양인의 시각으로 본다는 한계도 존재하구요. 가령 중국과 일본에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기에 고구려가 축소되고 임나일본부가 나옵니다 -_-;

그래도 남이 조선을 어떻게 봤는지가 참 흥미롭죠. 당시 서양은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게 됐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하멜 표류기로 알려지긴 했고, 선교사들에 의해서 조금씩 더 알려져 가긴 했지만요. 

하지만 그는 조선에 놀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해군의 일원이었고, 그들은 선교사 처형에 대해 항의하러 조선에 온 것이었죠.

자, 그가 본 조선이 어땠는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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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고 또 기후가 쾌적한데도 유럽 국가들의 탐욕을 피해 안전하게 남아 있으며, 그들의 정치 수단에서 벗어나 있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이 중국과 일본에 눈길을 보냈을 때도 한반도는 그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중략) 이렇듯 국제사회가 이 나라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는 동안, 항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새로운 나라를 찾아 떠나는 카톨릭의 사제들만큼은 조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 시대는 참 자랑스러운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와서 퍼진 게 아니라 조선 내부에서 퍼져서 선교사를 요청한 것이었으니까요. 거기다 모진 탄압에도 끝까지 살아남았구요. 이런 역사 덕분인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이 아닌 한국에 직접 와서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추대합니다. 

하지만 이건 천주교의 입장이고,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일이 너무 커져버린 게 문제였습니다. 중국이 직접 통치하고 프랑스에서 군대를 파견해 신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 말 그대로 나라 팔아먹는 짓이었으니까요. -_-; 믿음의 자유라는 게 그렇게 컸던 것인지... 

어찌됐든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조선 교구가 분리되면서 주교도 들어옵니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이를 맡았죠. 조선에서는 이들을 탄압하며 선교사들이 순교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는 이를 따지기 시작했죠. 39년 기해박해를 계기로 46년 함대 사령관 세실이 직접 왔다가 난파됐고, -_-; 56년에도 덕적도까지 왔다가 한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죠.

그리고 1866년, 혹독했던 병인박해로 베르뇌 주교와 8명의 신부가 희생됩니다. 평신도들의 희생 역시 가장 컸죠. 헌데 이 때 신부 한 명이 탈출에 성공합니다.

+) 박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생략 -_-a


로즈 제독

  그가 리델 신부입니다. 조선인 신자 11명과 함께 탈출한 그는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했고, 함대 파견이 결정됩니다. 다만 코친차이나(프랑스령 베트남 -_-a)에서 반란이 일어나 9월까지 미뤄졌죠.


1866년 양력 9월 12일, 기함 프리모게, 통보함 데룰레데, 포함 타르디프 세 척이 조선으로 떠납니다. 여기에는 리델 신부와 조선인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 덕분에 쉽게 한양으로 가는 길, 강화도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 프랑스에서 파악했던 건 덕적군도 정도였죠.

+) 그들이야 조선에 남은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을 구하려고 한 것이었겠습니다만... 선교사들은 본심이야 어떠했든 언제나 이런 역할을 맡게 되죠. 

그리고 쥐베르 역시 여기 포함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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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도는 한강 입구에서 내륙으로 100리 안쪽의 강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략) 물이 아주 짭짤해서 현지인들이 염하(소금강)라고 이름을 제대로 잘 붙였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염하, 강화 해협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좁고 유속이 빠른데다 곳곳에 암초가 있었죠. 큰 피해는 없었지만 프리모게가 암초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좌초될 경우 조선에서는 잘 맥여서 돌려보냈습니다만, 제너럴 셔먼호처럼 깽판을 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지 몰랐죠. 이 때까지 그들은 (혹은 그 후에도)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무고한 상선을 불태우고 선원들을 학살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함대는 약간의 무력 충돌 속에 조선인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은 "월식 관측"이 목적이라고 둘러댑니다. -_-; 이 때 쥐베르는 이런저런 것들을 관찰합니다..

"그 와중에 그는 기계에 관심을 두어 기계를 돌리려면 남자가 몇 명이나 필요한지 물어왔다. 우리는 그를 이해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 쏟았지만, 압축된 수증기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의 팔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다음 날부터 매일 조선인들이 찾아왔다. (중략) 그들의 행동거지는 일본인들의 품위나 세련된 예의와 거리가 멀고 중국인들의 아첨과도 달랐다. 그들은 조심성 없으며 아주 불결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가르강튀아(소설 주인공)에게나 어울릴만한 거대한 부채라든가 황소 등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선량한 마음을 지녔다. 우리는 그것의 대가로 돈을 지불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게 조선의 방식이었죠. 통상 안 한다, 그냥 가라. 대신 손님이니까 잘 맥여줄게 이런 거요. 

"조선의 여성들은 현명하여 스스로 발을 손상시키는 일(전족-_-)은 하지 않으며 머리 모양에서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중략) 조선의 여성은 중국 여성보다 훨씬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혹자는 조선의 여성들이 너무 쉽게 그 자유를 남용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좀 의외입니다. 뭐 중국에 비해서긴 하겠지만요. 저 "혹자"가 조선인이 말한 건지 외국인의 눈으로 본 건지는 모르겠네요.

그 외에 그는 조선의 사회구조를 신기해 합니다. 양반은 세습되지만 관리는 과거를 통해 뽑히는 방식 말이죠. 이 때문에 "일종의 약탈" 이외에는 재산을 늘릴 방법이 없는 양반들이 많다고 얘기하죠. 그리고 "백성은 그들의 약탈에 대해서 지극히 관대한 모양이다"고 평가합니다. 

그 외에 시파와 벽파를 프랑스의 자유주의파와 보수주의파에 대응하는 게 재밌군요. 근데 이 쪽은 몰라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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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척으로는 힘들다는 걸 알고 정찰만 하고 돌아간 후, 2차 원정이 시작됩니다. 이번엔 7척이었죠. 병인양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때 상륙한 쥐베르는 소풍온 것처럼 곳곳을 둘러보죠. 아예 집주인이 도망간 집에서 규방까지 뒤져봤다는군요 -_-;


http://www.musenet.or.kr/E_Book/201211/special1.asp
선비의 방

"우리가 차지하고 들어간 집들은 처음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러웠다. (중략) 기생출들을 단번에 몰아낼 방도는 없었다. 이 난공불락의 해충들은 놈들의 합법적인 집주인들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복수해 왔다." (...)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와 뜨거운 증기는 수직으로 세워진 굴뚝을 통해 곧장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 밑에 수평으로 놓인 고래를 통해 방 전체를 돌아 지나서 가옥의 반대편 쪽에 야트막이 세운 굴뚝으로 나가게 돼 있다. (중략) 우리는 이 난방 시설을 무척이나 고맙게 사용했다."

"대부분의 동양인들이 그렇듯이 조선인들도 물을 넣어 익힌 쌀을 주식으로 삼기에 이 싱거운 밥맛을 돋우기 위해 발효된 반찬과 자극적인 양념이 필요하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고추를 많이 소비한다."

"조선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 완벽하게 자모를 갖추고 있는 이 기호체계의 언어는 극동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언어이다."

"극동의 모든 국가들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 안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냥 솜씨가 능란한 조선의 사냥꾼들은 조악한 무기를 가지고서도 저러한 맹수들과 어렵지 않게 싸워내니, 이 맹수들의 피륙은 조선의 주요 수출 품목이 되고 있다." 

부분마다 예상 외의 찬사를 노골적인 멸시를 볼 수 있습니다. 그건 니들 입장이라고 반문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날카롭다 할 만한 부분도 있죠. 



그래도 역시 씁쓸한 건... 그의 기록과 병인양요라는 무력 충돌의 온도차가 난다는 것이죠. 그는 떠나면서 "이 소풍을 오래오래 추억하리라"고 합니다. 조선의 반격으로 프랑스군이 물러나긴 했지만 프랑스군에는 그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들에게 패하고 쫓겨난 조선인들과 한강이 막힌다는 공포를 느꼈을 한양의 조선인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죠.

하긴 프랑스 잡지에 실은 글이라는 점도 있겠지만요.

그렇다 해도 그의 글 곳곳에서 조선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연이나 예술품에 대해 찬사를 빼놓지 않죠. 그리고 이런 개화의 흐름 속에 이런 조선의 문화가 사라질 것을 걱정합니다. 양복을 입은 일본의 예를 들면서요. 그리고 프랑스의 침략에 대해서도 날 선 비판을 하죠.

"유럽의 국가들이 처음 접촉하는 이국의 국민들에게 폭력을 드러내고 횡포한 요구를 주장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다. 일단 그 나라가 아직 전신기를 갖지 못했고 또 그들 문명의 본원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면, 우리는 그들이 입는 폐해를 감안하지도 않고 주민들의 모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 허락된 줄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교의란 본질적으로 속칭 '무력'이라고 명명되는 이 슬프고도 의심스러운 설복 수단의 힘을 빌려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 대한 약탈, 학살 등과 선교사가 탄압당한다고 무력을 써서 나라를 굴복시키는 것을 비판한 것이죠. 그가 바란 건 다른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무력보단 무역으로 전세계와 교류하는 프랑스인 것 같아요.

"우리는 조선 원정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조금도 얻지 못했다. 한편, 우리 함대의 퇴각과 동시에 조선에서는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배가 되었고, 조선 정부는 유럽 국가의 침입을 비롯한 타협 일체를 격퇴하고 규탄한다는 선언문을 내렸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사실 어느 쪽으로 보든 짜증나는 상황이긴 해요. 신부나 신자들은 믿음의 자유를 원했고, 조선은 그걸 원하지 않았으며, 무력으로 압박하는 건 할 수만 있다면 참 쉬운 길일 겁니다. 급하기도 했을 거예요. 병인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더 죽어가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제국주의 침략을 도와줄 뿐이었죠. 어느 나라든 나오는 상황이었잖아요. 선교사들이 현지인들과 갈등을 벌이다 피해를 입고, 그걸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고...

쥐베르 같이 호기심이나 그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다가온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그 나라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있든 자국과 더 친해지길 바랄 것이고, 그 나라가 문을 닫는다면 그 방법은 무력 뿐이었으니까요. 개개인끼리야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간의 관계가 어디 그리 쉽나요.



그가 군인의 길을 계속 갔거나 외교관의 길로 갔다면 친한파로 조선에서 잘 지낼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 어땠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되죠.

출처 :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 H.쥐베르·CH. 마르탱 지음, 유소연 옮김/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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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의 전개와 함께 쓸까 했는데 -_-a 분량이 미친듯이 많아지네요. 왠만하면 생략.
방송 보면서 쓰니 역시 잘 안 써지네요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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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indbard.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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