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 개인의 주관적 시선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살 빼면 완전 잘생겨지는 來人] 다사다난했던 2013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돌아온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노련한 신인 김병우의 ‘더 테러 라이브’의 대결이 화제가 됐다.
이 두 영화는 ‘기득권층의 폭력’이란 주제에 대해 상징을 잔뜩 담은 암호로 보여주고, 반대로 적나라하고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노는 결국 탄탄한 연출력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영화 ‘변호인’을 통해 세상에 대한 고발과 호소로 이어지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정말 잘생겼지만 살이 쪄서 ‘잘생김’을 숨기고 있는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사는 來人은 2013년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영화에 대한 단상을 정리해 봤다.
◆설국열차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의외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영화의 결말 문제로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크게 세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첫번째는 혁명의 실패로 계속 열차의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 두번째는 커티스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 마지막이 남궁민수의 말대로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결론으로 이야기는 흘러갔다. 하지만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열차는 탈선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는다. 빙하기의 얼음이 다 녹기도 전에 나타난 이 갑작스런 사태로 인해 최후의 생존자는 요나와 아이 단 둘 뿐이었다. 이러한 결론이 최선의 선택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커티스의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서 훌륭한 결말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조차도 잘못된 사회다. 이미 혁명이라는 것 자체가 시스템 유지의 일환이며 믿었던 정신적 지주 ‘길리엄’마저도 ‘윌포드’와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 분명 마지막 결론보다야 생존자가 많겠지만 올바른 사회라고 부르기 힘들다.
결국 관객들은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그럼 어쩌자는 거야?”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제대로 된 해결책의 제시가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궁금증만 증폭된다.
다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됐다. 결국 무엇이 성공하든 우리는 막대한 피해만 남긴 채 공멸할 개연성이 높다. 이런 세상을 안겨줘서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읽혔다.
◆더 테러 라이브, 적나라하고 디테일한 분노 “너흰 X발X끼들이야”
반면 ‘더 테러 라이브’는 ‘설국열차’처럼 모호하고 뜬구름 잡는 전달방식이 아니라 한편의 뉴스처럼 확실한 주제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테러범의 등장과 더불어 언론사는 돈을 받고 단독보도를 따내고 테러에 대한 생중계를 따낸다. 힘 없는 노동자의 아들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다. 테러범은 지극히 약자의 입장에서 얘기한다. 당신들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죽었다, 근데 억울하다, 그에 대한 대가를 받고 싶다, 돈을 요구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과 한마디면 된다고.
그럼에도 국가와 언론에서는 테러행위가 왜 일어났는지 보단 테러 행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 일부 팩트에 살을 붙이고 포장을 해서 사건을 자극적이고 극단적이게 포장해 나간다. 사과만 하면 끝날 일을 오히려 테러리스트의 극악무도한 행위, 무고한 시민의 학살로 간주한다.
정권에 반하기만 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요즘은 좀 더 세련되게 ‘종북’이라더라) 모습을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결국 관객들은 분노에 분노를 더해가며 격분하기에 이른다. 극 중 앵커 윤영하도 마찬가지. 테러범에 대해 공감한 그는 영화 말미에 방송사 사옥을 무너뜨리며 국회를 덮친다.
기득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북좌빨’로 몰아가는 정부와 그의 끄나풀인 방송사를 동시에 ‘엿’먹이는 행위를 통해 분노의 표출을 연출한다.
◆변호인의 지극히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말 “부끄러운 줄 아시오”
사실 개인적으로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에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대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단순한 정물화와 인물묘사를 벗어난 피카소의 작품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신파극’은 진부하고 재미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은 무척이나 강력하다. 슬프고 아픈 것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하고, 기쁘고 재미난 장면에선 웃어야 한다. ‘변호인’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잊고 있지 않느냐고 일갈한다.
그냥 동네 순박한 청년들이 야학 활동을 하는데 ‘빨갱이’란다. 60일이 넘도록 온갖 가혹행위를 하며 억지 진술서를 받아내 증거로 채택한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폭력 앞에 그 누구도 대항하지 못한다. 하지만 부동산, 세법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세속적인 변호사 하나가 크게 깨닫고 나서서 너무나도 듣고싶고, 너무 당연한 얘기를 외친다.
“국민의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아주 정석적인 영웅서사를 따라서 그는 속물 변호사에서 영웅으로 변모해 간다. 그리고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혹자는 정말 몰랐을 것이고, 누군가는 알고 있던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는 것에 부끄러워 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 서사를 보고도 외면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부끄러웠다. 사는게 힘들다는 이유로 뉴스나 깔짝 보면서 “어휴! 현 정권 저질이네 노답이다”라며 욕이나 했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고문 장면을 보며 마치 내가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음속 깊이 숨겨둔 내 양심도 두들겨 맞았다. 저 꼴을 보고도 나서지 않을텐가. 무죄를 무죄라 말하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나. 언제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을텐가… 영화가 끝나는 내도록 불편하고 불편했다.
◆ “미안해요 못난 나라서”, “아오 빡쳐”, “가만 있어서 되겠니?”
결국 이 세 영화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미안해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서”와 “빡친다”, “나서자”가 될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이 세 영화들은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설국열차’는 900만 관객을 넘었고 ‘더 테러 라이브’도 400만을 넘었다. ‘변호인’은 주말 관객만 138만을 넘어섰다. 역대 최단기간 최다 관객이다.
모두 이야기하는 방식과 결론은 다르지만 거대한 사회의 억누름에 대한 표출이 주제다. 그리고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 세 영화의 주제도 긴밀히 연결된다. ‘설국열차’의 반성과 ‘더테러’의 분노, 그리고 ‘변호인’의 행동으로 말이다.